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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

by 김인철

"조선이 나무라면 왕은 그 나무의 꽃이다. 그러면 그 나무의 뿌리는 또 누구인가? 그들은 바로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유림과 신진 사대부들이다. 꽃은 화려하나 금방 시들고 만다. 꽃은 시들면 꺾어 버리면 되지만 뿌리가 썩으면 그 나무는 쓰러지고 만다. 해서 뿌리가 깊고 튼튼한 나무를 만들어야 한다."


사진출처=pixabay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건국했던 정도전은 조선을 이렇게 정의한다. 하지만 건국 초기 왕권이 약했던 방원[태종]과 이도[세종]의 입장에서 보자면 정도전의 [재상총재제-재상이 조선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사상은 삼족을 멸하고도 모자랄 만큼 위험한 사상이었다. 결국 삼봉은 방원에게 죽임을 당한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다. 한번 박힌 뿌리는 쉽게 뽑히지 않는다. 밀본이라는 조직으로 남아서 세종과 대립각을 세운다.


"이도는 성군이나 그다음은..."


드라마상 설정인 비밀 단체 '밀본'의 수장 정기준은 이렇게 말한다. 뿌리 깊은 나무는 오랜만에 보는 명품 사극이다. 하지만 나는 조만간 종방 할 이 드라마를 상찬 하려는 게 아니다. 작지만 앞으로도 지속될 또 하나의 [뿌리 깊은 나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뿌리 깊은 나무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서있다. 그곳은 집일 수도 있고 학교일 수도 있고 경찰서나 주민센터 같은 공공기관일 수도 있다. 이 세상에 서있는 모든 것들은 뿌리가 튼튼해야 한다. 신흥동 푸른 학교도 '뿌리 깊은 나무'다. 지금 내가 선 이 자리는 지난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점점 이 지역의 깊숙한 곳으로 뿌리를 뻗어나갔다.


이곳에 뿌리를 내린 순간부터 다양한 이야기들이 내 마음 깊숙이 새겨졌다. 고통스럽고 절망에 허덕이던 순간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 맵고 짭조름한 시간들은 일기를 쓰면서 어느 정도 사라졌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들을 기록하지 않았다. 할 수도 없었다. 잊힌 이야기들은 각자의 기억 속에서 추억이 될 것이다.


올해도 한 해가 저문다. 신흥동 푸른 학교라는 나무에 매달린 가지들도 마찬가지다. 이 나무의 가지들은 올해도 어김없이 세상을 향해 뻗어 나갔다. 그렇게 뻗어나가던 가지 중 몇 개는 상처를 입거나 부러지기도 했다. 그렇게 뻗어나간 가지마다 크고 작은 열매를 맺고 있다. 열매를 거둬야 하는 시간이다. 내일을 위해 그 열매가 품은 씨앗을 다시 심을 시간이다.


청소년 인문학 수업은 가장 큰 수확이다. 일부 성과도 있었다. 지역아동센터 중앙 지원단이 전국에서 공모한 우수프로그램에 신흥동 푸른 학교 청소년 인문학 수업이 당당히 장려상을 받았다. 자치활동 평가 시 어렵지만 내년에도 다시 수업을 하겠다는 아이들의 이야기에도 힘이 난다.


동아리 활동은 올해 가장 중요한 프로그램이다. 축구, 미술, 댄스, 오케스트라다. 오케스트라 수업은 매년 하던 수업이라 진행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매회 같은 형식의 반복이라 아이들이 수업에 흥미를 갖지 않는 게 문제였다. 하지만 내년 초에 있을 푸른 학교 문화제 발표회를 아이들이 직접 기획하고 준비하게 함으로써 반복되는 매너리즘에서 오는 지루함을 극복할 생각이다. 발표회 준비를 열심히 한다면 아이들이 긍지와 뿌듯함을 느낄 것이다.


축구는 남학생들을 위한 전유물이었다. 특히 남학생이 다수인 일 학년들을 위한 고민에서 시작한 동아리였다. 다행히 이우학교 학부모들이 주축이 된 '이우 FC'에서 축구 멘토를 비롯하여 축구용품 일체를 후원해 주셨다. 멘토 선생님들은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매주 화요일 아이들을 위해서 축구 지도를 해주셨다. 그리고 지난 11월 4일 황송공원에서 정규 리그전도 치렀다. 다른 팀에 비해서 신장과 체력에서 약세였던 우리는 2전 2패를 당했지만 내년을 기약하며 지난 6개월의 동아리 활동을 멋지게 마무리했다.


이학년 여학생들이 중심이 된 댄스 팀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들이 보여준 댄스를 향한 열정만큼 다른 아이들에게 최소한의 배려를 해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갈등 상황들이 불거져 나왔다. 그들 사이에서 중심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모든 책임은 교사인 나에게 있을 터. '권리'를 말하기 전에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 이 숙제는 내년에도 지속될 것이다.


청소년 자치활동은 청소년 인문학 수업과 더불어 가장 성공적인 활동이었다. 아직까지는 내부적인 문제와 갈등의 해소를 위한 방편이었을 뿐 처음에 의도했던 여름캠프 기획이나 어린이날 행사 코너 기획처럼 바깥에서 펼칠 수 있을 만큼은 역량이 확대되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들 간에 그리고 선생님과 갈등 상황이 생겼을 때 아이들 스스로가 자치회의를 통해서 문제를 풀어나가려고 시도했다는 사실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다.


졸업을 앞둔 삼 학년들은 서로 끈끈했다. 하지만 그 외의 활동에선 모래알 같았다. 나와 가장 오래 만났던 아이들이다. 마음속에 담아둔 사연들이 많다. 갈등도 많았고 화해의 시간도 많았다.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얼굴을 붉히던 상황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시간을 인내하며 극복했고 서로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이제 그들을 만날 수 있는 시간도 몇 개월 남지 않았다. 그들도 그 사실을 아는지 남은 시간 뭔가 하나 만들어 보자는 나의 제안에 '졸업여행'이라는 화두를 꺼낸다. 마지막을 멋지게 장식할 수 있도록 기획을 해보라고 했다.


올해는 유난히 비가 자주 내렸다. 야외에서 하는 프로그램은 언제나 비가 따라다녔다. 그중 여름캠프는 비가 심술을 떠나 거의 패악을 부리는 수준이었다. 국/영/수를 중심으로 한 기초학습은 학교 시험 성적이라는 굴레 속에서 매번 지지부진했다. 자원봉사 선생님이나 상근 선생님이나 늘 같은 고민 속에서 허덕였다. 좀 더 창의적인 수업 아이들이 흥미를 갖게 하는 수업은 도대체 어느 현자의 우물에서 길어 올려야 할까?


여기 신흥동 푸른 학교, 뿌리 깊은 나무, 에서는 누가 꽃이고 누가 뿌리일까? 이 작은 나무에서는 꽃과 뿌리의 경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각자가 맡은 역할, 누려야 하는 권리, 그리고 각자가 지켜야 하는 의무만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모두가 뿌리가 될 수도 있고 꽃이 될 것이다. 그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도는 유림과 신진사대부의 견제를 받으면서도 '한글 창제'라는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 우리는 이 작은 나무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2011년 1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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