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이었던가
뜨거운 햇살은 회색의 구름으로 뒤덮이고
끈적끈적한 습도가 온몸을 휘감으며
기분은 한없이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덥다..
버스가 온다
얼른 올라탔다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버스는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기분이 한껏 업되고 눈이 슬그머니 감겼다
고단한 하루를 뒤로하고 집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평화롭다
까마득하게 현실과 멀어져 잠의 세계로 빠져드는 순간,
"아이고 천재네 천재야"
할머니의 커다란 목청에 화들짝 놀라 잠이 깼다
단잠을 깨우는 목소리에 적잖이 맘이 불편했더랬다.
피곤했으니까
내용을 알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았지만,
자연스레 귓가에 와서 박히는 할머니의 목소리에 안 들을 수가 없었다.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눈이 마주치면 겸연쩍을까 봐
뒤에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어느 할머니께서
옆에 친구에게 열심히 얘기를 하신다
친구할머니는 조용히 듣고 어~ 응~ 하고 호응만 하신다
우리 딸이 외국에서 살잖아
자주 못 오니까 영상통화를 자주 하거든
근데 며칠 전 통화를 하는데 뒤에서 손주가 뭐라 뭐라 얘기하는 거야
"얘 대니가 뭐라고 하는 거니"
손주 이름이 대니인 모양이다
"엄마 대니가 '할머니 허리 아픈 건 다 나았어요?'라고 하네"
"아이고 내 새끼 할머니가 아픈 걸 기억하고 있어?"
하면서 무척 대견해하신다
그러더니
"아이고 우리 손주는 천재야 이제 겨우 3살인데 왜 그렇게 말을 잘한다니"
옆에 친구 할머니도 조용하게 듣고 있다가 갑자기 격하게 호응해 주신다
"그러게 천재네 천재야"
호응을 하지 않으면 왠지 얘기가 끝없이 흘러갈까 봐 그러신가
과한 리엑션을 하시는 친구 할머니의 얘기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여태 조용히 계시다가 갑자기 큰소리로 친구의 흥을 돋워 주셨다
그러자 옆에 계시던 일행이 아닌듯한 할머니도 얘기에 슬쩍 끼어들어
은근히 손주 자랑을 늘어놓는다
갑자기 버스 안이 동네 사랑방이 된 듯하다
그렇지 이런 얘긴 못 참지
어느 할머니인들 손주 자랑을 안 하고 싶겠는가
어느 순간 몇 명의 할머니들이 자랑배틀을 벌이신다
휴! 이제 내린다
할머니들의 얘기는 어디까지 가는 노선에서 멈췄을까
버스에서 내리고 그 생각을 하면서 집으로 들어가는데
더워도 기분이 나쁘진 않고,
얼굴엔 나도 모르게 웃음이 깃들여 있었다
세상의 모든 손주들은 다 천재인가 보다
여기도 저기도 다 '우리 손주는 최고다!'라고 생각하시는 할머니들이 많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어느집인들 천재 한 명이 없겠는가
팔불출 부모도 많다
나도 어쩌면 그런지도
우리 애들은 무엇을 하든 될 애들이야 하고 늘 얘기하는 거 보면..
어딜 가도 우리 애들이 제일 예쁘다고 생각하는 거 보면..
내 뒤에 앉아계셔서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할머니의 손주 자랑하시는 얼굴엔 빛이 나리라
특별할 것 없는 일상 속에서 잠시나마 할머니의 기분을 좋게 해 주는 손주는
이미 천재이고 효손이다
세상 무엇을 준들 아깝지 않겠지
버스 안에서 들은 어느 할머니의 얘기가 내 귓가에 남아 있어
영원할 거 같던 더위도 물러가고,
시원하고 푸르디푸른 가을 하늘이 펼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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