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바람. 따뜻한 마음

미끄러진 덕에

by 그리여

덕유산은 겨울이면 하얀 눈으로 덮여 눈이 부신 아름다운 절경으로 많은 등산객들에게 사랑을 받는 산이었다. 언젠가 그 산에서 만난 따뜻한 마음을 나누던 사람을 떠올려본다.


그는 한가득 짐을 챙겨 산으로 향한다. 혼자 살기 시작한 후 거의 매일 산에서 지내다시피 했다.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산을 오르다 보면 온갖 잡생각이 하나씩 사라졌다.

차가운 바람이 무섭게 옷 속을 파고들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덕유산의 능선에서는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어둠이 산등성이를 지우며 서서히 내려앉는 저녁. 더 늦기 전에 야영할 곳을 찾아야 했지만 마땅한 자리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조금씩 걸음을 옮기며 둘러보다가 삿갓재로 향하는 길목에서 작은 둔덕 하나를 발견했다.
그곳에 얼른 텐트를 쳤다. 어둠이 짙어지고 있어 재빠르게 움직였다.


간신히 텐트 안에 들어서니 비로소 안심이 되었고 저녁 준비에 들어갔다.

눈을 녹여 물을 만들고 그 물로 라면을 끓여 먹었다. 세상 어떤 음식보다도 맛있게 느껴졌다.
텐트가 퍼드덕 특특특 하면서 바람과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지만 그것조차도 음악처럼 들린다.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당시에는 눈을 녹여 마시고 목이 마르면 고드름을 툭 따 먹곤 했었다.

텐트 안에서는 가스소리만이 쉬이익 쉬이익 하고 날 뿐이었는데 따뜻함에 겨울의 감성을 오롯이 흡수한다.


그때 밖에서 두런두런 말소리와 낑낑 대는듯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살짝 텐트를 열고 내다보니 두 명의 등산객이 추위에 떨며 텐트를 치고 있었다.
서로 나누는 대화가 본의 아니게 귀에 든다. 부자지간인 것 같았다.

도와줄까 하고 일어서려는 찰나 "다 됐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아 라면 국물을 떠먹었다.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잠에 들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몸이 밑으로 미끄러지는 듯한 느낌에 잠이 깼다.

어두워서 급히 텐트를 치느라 바닥상태를 확인하지 못한 탓이었다.
하필이면 살짝 경사진 곳이었고 바닥이 눅눅할까 봐 깔아놓은 비닐 때문에 텐트가 서서히 미끄러지고 있었다.

자다 말고 텐트를 붙잡고 있는 신세가 되었다. 밤은 깊어가고 있었고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엉금엉금 눈을 비비고 나와서 다시 텐트를 고정시키는데 추위에 살이 에이는 듯이 아프다.


옆 텐트를 보니 그쪽도 조금씩 미끄러지고 있었다.
꽤 늦게까지 잠이 들지 않았던 그들. 두런두런 소리가 났었는데 지금은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이상하다! 이렇게 미끄러지면 느낄 텐데 왜 조용하지 하고 텐트를 두드렸다. 조용한데 왠지 느낌이 안 좋다.

뭔가 불길해 텐트를 열어보니 안에는 부탄가스난로가 켜져 있었고 두 사람은 움직이지 않고 누워 있었다.


“저기요 일어나세요!”

정신을 잃어가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큰일이라 생각한 그는 황급히 두 사람을 흔들어 깨웠다. 다행히 눈을 떴다.


“큰일 날 뻔하셨어요. 어서 일어나세요!”

"왜 그러세요..."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듯 멍한 얼굴이었다.

그가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자 두 사람은 연신 고맙다며 머리를 숙였다.

빨리 발견한 덕분에 큰일은 일어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덕유산의 눈은 포근하고도 잔인하게 산을 덮고 있었다.

만약 텐트가 미끄러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랬다면 그 텐트 속 두 사람은 어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그는 두 사람이 무사히 하산하는 것을 확인한 후 다시 정상으로 향했다.

그 인연은 어쩌면 덕유산이 그에게 건넨 작은 선물이었는지도 모른다.


산이 또한 산에서 수많은 경험을 했고 죽을 고비도 넘겼지만 누군가의 생명을 구해본 적은 없었다.
그저 산의 품에서 무사히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는 겨울의 덕유산.

눈부시게 하얗고 발이 푹푹 빠지는 길을 지나 우뚝 솟은 바위를 넘을 때 저 멀리 보이는 정상은 마치 다시는 닿을 수 없을 것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하얀 눈이 만들어낸 경치는 이 세상 것이 아닌 듯 황홀했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주목은 오늘도 묵묵히 그 자리에 서서 지나가는 등산객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준다.


“아이고, 어르신...”
그는 고개를 숙이고 그 아래를 지나간다.

사박사박 발밑의 눈들이 미끄러진다고 조심하라고 속삭인다.


덕유산은 한가득 짐을 짊어진 등산객의 볼을 차가운 바람으로 따갑게 때리기도 하고 포슬포슬한 눈으로 따스히 감싸주기도 한다.


하얗게 이어진 산등성이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앞서가는 등산객의 등을 밀어준다.



#덕유산 #등산

#일산화탄소

#선물

#주목 #눈

#감성글

keyword
이전 12화하룻밤이 어디로 사라진 걸까 있었는데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