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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이 내리다

뮤지컬의, 그리고 대학에서 어린 시절의

by pomme

막이 내렸다는 말이 있다. 극이나 삶에서 어떤 이야기가 어느 정도 매듭을 짓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갈 때 쓰는 말이다. 지난 4개월 간 준비했던 뮤지컬의 막이 내렸다. 내가 대학에 입학한 2020년은 모든 대학 동아리들, 특히 공연 동아리들에게 겨울이 시작된 해였다. 모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신입 부원을 붙들어두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공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어느새 자연스럽게 삶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며 하나 둘 동아리를 떠나갔다. 춥고 긴 겨울이었다.


나도 무대에서 타인의 삶을 연기하는 배우를 꿈꾸며 뮤지컬 동아리에 들어왔지만, 그 꿈은 희미한 허상 같아 현실이 될 거란 기대를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2년 반을 보낸 뒤 나는 호주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나기 위해 1년을 휴학하고, 여름방학에는 서울에 올라가서 인턴 생활을 시작했다. 다음 학기에는 3년 만에 정기공연을 준비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미 워킹 홀리데이 계획이 뚜렷했던 터라 뮤지컬에 대한 꿈은 아쉬운 마음과 함께 접어두었다.


재택근무를 하던 어느 수요일, 다음 학기에 하기로 한 뮤지컬에서 내가 하고 싶었던 역할이 불현듯 머리를 스쳤다. 오전에는 "하고 싶다"는 생각이 일을 마쳐갈 즈음에는 "해야겠다"로 바뀌었고, 퇴근하자마자 아직 오디션이 있는지 물어봤다. 그렇게 내 처음이자 마지막 뮤지컬이 시작되었다.


주말마다 서울과 포항을 오가며 뮤지컬 연습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절대 아니었다. 출근길이 왕복 3시간인 나는 평일에 연습할 기력이 없었고, 혼자서 스스로를 충분히 동기 부여하지도 못했다. 첫 단체 연습에 나는 아무 대사도, 넘버도 익혀가지 못했고 처음부터 어긋난 뮤지컬 연습은 이후에도 지독하게 여파를 미쳤다. 잘 알고 지내던 선배는 나의 태만과 지키지 않은 약속에 대해 나를 나무랐고, 나는 "너를 캐스팅해서 더블 캐스팅된 다른 배우는 공연 기회를 한 번 포기하게 됐다"는 말에 폭발해서 오랜 연을 끊었다. 사실 이런 말에 무너지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의 근본적인 원인은 나조차도 나 자신에게 자부심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를 지킬 말이 없어 가시를 곤두세웠고, 상처를 주고 상처를 입었다.


주말의 단체 연습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하니 자신감이 하락하고, 옛날이면 즐거웠을 뮤지컬 연습이 너무 하기 싫어 일주일 동안 미루다 또 단체 연습에서 부족한 모습을 보이는 악순환이었다. 포항에 가는 주말이 너무 싫었고, 자존감이 낮아지다 보니 삭막한 포항에서 버티는 유일한 이유였던 뮤지컬 동아리 부원들이 모두 나를 싫어할 것이라는 생각에까지 사로잡히며 마음은 점점 멀어졌다. 취미는 즐거워서 하는 것인데 즐겁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며 어차피 더블 캐스팅이니 하차해도 뮤지컬에 문제 될 것은 없겠다, 오히려 그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패배주의적인 생각도 했다. 공연 일주일 전에 퇴사하고 포항에 내려온 후에는 남는 게 시간이었지만 연습 때마다 중요한 실수를 하나씩은 하곤 했다. 마지막 리허설에서도 중요한 대사를 통으로 날려 암전이 된 무대에서 숨죽여 울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하는 부원들은 나를 믿는다고 해줬다. 내 상대역을 맡은 친구는 "너 잘하니까 긴장만 하지 마"라고 말해줬다.


공연은 여느 연습처럼 태연하게 내게 걸어왔다. 관객들과 함께. 강렬한 조명과 대비되는 어두운 관객석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관객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애썼다. 내가 맡은 인물이 대본에 나와있지 않은 낯선 관객들을 만나면 놀랄까 봐, 그 인물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욱 집중했다. 긴장이 되어 가사가 산산이 흩어지는 것 같았는데, 목소리를 멀리멀리 밀어내듯 온 마음을 다해 다음 가사를 밀어냈다. 암전 때 소품을 급하게 정리하다가 넘어져서 쿠당탕 소리도 났을 거고, 무대 뒤쪽에서 우당탕탕 뛰어가는 소리도 관객들에게 들렸을 거다. 1막이 끝났을 때 큰 것 하나를 끝낸 느낌은 2막도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나를 격려했다.


진한 여운을 남기는 마지막 넘버가 끝나고 분위기가 반전되며 커튼콜 노래가 나올 때 "마침내."라는 생각과 함께 내가 공연을 했다는 게 비로소 실감이 났다.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엄청난 감동이 밀려오지는 않았다. 큰 파도가 밀려왔다가 멀어진 후에 남는 잔잔한 고요 속에서 안도감을 느꼈던 것 같다. 다행이다, 큰 실수 하지 않고 잘 끝내서.


그다음 날은 해가 중천에 뜨도록 자고 도서관에 갔다. 뮤지컬을 마친 소감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하는데 어째서인지 글이 잘 써지지 않았다. 억지스러운 문장을 쥐어짜고 싶지도 않아서 글쓰기를 그만뒀다.


더블 캐스팅된 친구의 공연이 끝나고 뒤풀이에서 한 사람씩 소감을 말하고 나서야 제대로 마무리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우리"의 공연이었다는 깨달음이 확 와닿았다. 술자리를 뜰 때쯤 동아리 사람들이 기다릴 테니 꼭 돌아오라고 했다. 그래, 기다린다니 돌아와야지. 춥고 긴 겨울을 지나 모든 게 흩어져도 영원히 곁에 있는 것들이 있으니.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뮤지컬의 막이 내렸다. 대학에서 나의 어린 시절도 막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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