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인지 어렸을 때부터 해외 생활을 꿈꿨다. 여행 책자, 유학 정보 관련 책, 해외 생활 에세이 등 낯선 나라에 대한 것은 내 마음을 들뜨게 했다. 고등학생 때 워킹 홀리데이에 대해 알게 된 이래로 워킹 홀리데이는 내 버킷 리스트에서 1순위로 자리해왔다. 수험 생활 중에 지칠 때면 워홀러들의 영상을 찾아보며 마음을 다잡곤 했다.
그러나 내가 대학에 진학할 때가 되었을 때는 코로나라는 전례 없는 감염병으로 전 세계가 국경을 단단히 닫은 상황이었다. 많이 절망했고, 이렇게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삶에 큰 타격을 주는 경험을 통해 극도의 불안에 빠지기도 했다.
그렇게 2년 반이 지나고, 국경이 다시 풀리기 시작하자 나는 이때가 워킹 홀리데이를 갈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3학년 1학기를 마치자마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냅다 1년 휴학을 했고, 인턴 생활을 하며 워킹 홀리데이 자금을 모았다.
부모님께 휴학 사실과 휴학 중 계획을 말씀드린 것은 2학기를 앞둔 8월 말 즈음이었다. 호주에 도착한 후에 말을 할까 생각할 정도로 부모님께 워킹 홀리데이 계획을 말씀드리는 게 망설여졌는데, 정작 엄마 아빠는 늘 그랬듯이 나를 전적으로 믿고 지지해주셨다. 특히 엄마는 자신이 내 나이 때 일본에 가서 살면서 일도 해보고 싶었던 것을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의 반대로 못 가게 되어 아쉬웠다고 말하며 나는 더 넓은 세상에 나가서 마음껏 보고, 듣고, 경험하고 오라고 했다.
워킹 홀리데이는 처음으로 어떤 외부의 압력도 받지 않고 스스로 한 선택이자 울타리 밖으로 넘어가는 선택이었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를 증명하고 싶은 욕심이 더 컸다. 그래서 2학기 때부터는 어떤 지원도 받지 않고 인턴 해서 번 돈을 아껴서 월세와 생활비 그리고 포항을 왔다 갔다 하는 교통비를 충당하고 비자 잔고 증명을 위한 저축을 하기 시작했다. 급여가 들어오는 날에는 차는 듯했다가도 월말이 되면 다시 제자리걸음인 저축 통장을 보며 한숨을 쉬기도 했지만 스스로에게 "한국에서도 살아남지 못하면 호주에서는 어떻게 살아남을래?"라고 말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항공편과 임시 숙소를 모두 예약해두고 떠날 채비를 마쳤을 때, 내가 쓸 수 있는 초기 정착금은 170만 원 정도에 불과했다. 이 정도는 마음이 조급해지는 액수이기도 했다. 집을 구하는 것에 있어서도, 잡을 구하는 것에 있어서도. 그래서 더 마음을 단단히 먹기로 했다.
인천 공항에 가기 위해 할머니 집으로 올라가기 전날 밤, 지금까지의 삶에 매듭을 짓는 글을 쓰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엄마가 내 방에 노크를 하고 들어오더니 잠깐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네가 9월부터 온전히 네 힘으로 생활하는 동안 모았다, 이건 호주에 가서 일만 하지 말고 여행 다니는 데 쓰라고 주는 거다."라고 말하며 200만 원을 내 계좌로 송금했다고 했다. 엄마 아빠에게 의지하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던 만큼 엄마의 200만 원이 가지는 의미도 컸다. 나는 끝내 눈물을 보이고 말았는데 눈물이 많은 엄마는 오늘만큼은 같이 우는 대신 "이제는 진짜 강해져야 해."라며 담담하게 나를 달랬다.
지난 생일에는 아름다운 것을 담으라며 꼭 필름 사는 데 쓰라고 용돈을 쥐어주셨는데, 이번에는 아름다운 것을 많이 보고 느끼라고 이렇게나 큰돈을 쥐어주셨다. 정말 행복하게 살아야겠다 - 라고 생각하며 잠에 들었던 집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