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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mme Feb 11. 2023

교환학생을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1월 20일, 그렇게 기다리던 교환학생 공고가 떴다. 올해 유난히 공고가 늦게 떠서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초조해지던 차였다. 어라, 그런데 이상했다. 1 지망부터 7 지망까지 대학을 하나하나 채우고 난 뒤 마음이 들뜨기보다는 "OO 대학에 걸리면 어쩌지"라는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더 이상한 건 자기소개서를 쓸 때였다. 교환학생 생활에서 기대되는 것이 있다면 자기소개서를 쓸 때 이것저것 쓸 말이 많기 마련인데 쓸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1 지망으로 쓴 대학은 유럽에서 가장 머물러보고 싶은 도시에 위치한 데다 국가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엘리트 학교라 1년 전부터 별러 왔는데도 막상 지원서를 쓴 지금은 망설임을 떨칠 수 없었다. 


교환학생은 대학 생활 중에 가장 해보고 싶은 활동 0순위로 늘 자리해 왔고, 이 소망은 거의 신념처럼 단단하게 굳어졌기 때문에 쓸 말이 없는 자기소개서의 빈칸은 당황스럽게까지 느껴졌다. 왜지, 그토록 가고 싶었던 교환학생의 기회를 잡을 수 있는 때가 왔는데 왜 쓸 말이 없는 거지. 


머리를 어지럽게 만드는 당황스러움과 혼란을 정리하기 위해 지금 내가 느끼는 의문을 하나하나 톺아보고 답을 찾아나가기로 결심했다. 왠지 모를 "느낌"을 설명할 수 있는 "생각"을 찾아 결론을 내리는 것. 지원서와 자기소개서를 쓰거나, 그러지 않는 것은 내 안에 얽힌 실타래를 풀어낸 다음에 해야 할 것이었다.


1. 왜 지원서에 쓴 대학들을 보고 썩 내키지 않은 기분이 드는 거니?


오랫동안 바랐던 1 지망 대학을 제외하고는 교환학생 공고에 있는 대학 중 마음을 끄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리고 선배들의 후기를 읽어보니 유럽으로 한 학기 교환학생을 가면 1500만 원에서 2000만 원 정도 든다고 했다. 교환학생을 가서 돈에 쪼달리면서 살거나 호주에서 하는 것처럼 알바를 하는 것은 정말 싫었다. 교환학생을 가서는 그곳에서의 경험을 온전히 즐기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호주까지 와서 번 돈을 썩 내키지 않은 대학에 모두 쓰는 것이 두려웠다. 


2. 지원서에 쓴 대학의 선택 기준이 뭐였니?


지원서를 쓸 때 가장 첫 번째 기준이 된 건 유럽에 있는 학교인지였다. 나는 토플 성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 학교의 영어 수업으로 토플 점수를 대체하는 것을 대부분 허용하지 않는 영미권 국가를 지원하는 데 제한이 있었으나, 신규로 추가된 캐나다의 대학은 토플 점수를 요구하지 않았다. 젊고 야망이 넘칠 때 가서 공부하고 일해보고 싶던 싱가포르의 대학들도 리스트에 있었고, 토플 점수를 요구하지 않았다. 유럽처럼 인기가 있지 않아 넣으면 될 가능성도 높았다. 그러나 캐나다의 대학이든 싱가포르의 대학이든 교환학생으로 가고 싶진 않았다. 여기에서 슬슬 내게 교환학생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유럽의 대학들을 몇 개 고른 후 1 지망부터 7 지망까지 이들을 정렬하는 기준은 "대도시인가?"였다. 나는 대도시에서의 삶이 훨씬 즐거웠고 다양성과 역동성이 떨어지는 곳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에서 다양성을 느끼고, 내가 보지 못한 세계를 보고 싶었다.


그 이후에 고려한 점은 한 학기 동안 공부할 만한 가치가 있을 만큼 좋은 학교인지였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해외에서 공부하는 것을 꿈꿔왔기 때문에 교환 학생 기간 동안 그 학교에 온전히 녹아들고 싶었다. 교환 학생이 아닌 유학생처럼 열심히 공부하고, 교수님들도 만나보고, 학교 안에서 학생으로서 할 수 있는 경험을 알차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대학에 대한 평가, 해당 국가의 산업이 발달한 정도 등을 지망 우선순위 결정에 반영했다. 


3. 교환학생의 목적이 뭐니?


내 마음이 유럽을 고집하는 이유가 명확히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교환학생에서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내게 교환학생의 목적은 뭐지? 솔직하게 마음을 내려놓고 생각해 보니 유럽을 고집한 이유는 유럽 여행을 하고 싶어서였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유럽 여행인데, 거기에 좋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욕심이 강하게 입김을 부는 상황이었다.


4. 교환학생은 네가 바라는 경험에 적합한 기회니?


그렇다면 유럽에서의 교환학생은 여행도 하고, 유의미한 학문적 경험도 할 수 있는 기회인가? 교환학생은 이 목표들을 이루기 위한 최적의 방법인가? 한 학기라는 시간과 스스로 번 2000만 원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 경험인가? 6개월 남짓한 기간 중 학교에 다니는 기간은 4개월이 못 되었다. 2개월이 조금 넘는 방학 기간 동안 연구 참여와 같이 해외에서의 학문 탐구 경험을 쌓으려면 여행을 포기해야 했다. 비용 대비 만족스러운 여행을 할 수 있는가도 의문이었다. 수업을 듣는 것을 고려했을 때 실제로 여행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은 3개월 정도였다. 예산의 절반은 그냥 월세를 내고 일상을 살아가는 데 써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과연 6개월 동안 현재의 행복을 느끼면서 살 수 있을까? 학교를 떠나고 깊이에 대한 갈망을 느끼는 지금 시점에서 교환학생은 내가 정말 원하는 선택지일까? 교환학생 대신 여행을 가면 어떨까?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고, 하나하나 답을 하면서 지금의 나는 교환학생 가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교환학생은 과거의 내가 가졌던 꿈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어왔던 것을 떠나보내서 약간 허탈하면서도 무언가를 인정할 때 찾아오는 안도감을 느꼈다. 


5.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니?


6개월의 교환학생 대신, 2개월의 유럽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교환학생에 할애하려고 했던 6개월은 내가 고등학생 때부터 정말 공부하고 싶었던 KAIST로 학기교류를 갈 생각이다. 오랫동안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뇌과학 분야의 강의를 포함해서 12학점 정도로 여유롭게 수강신청을 해야지. 관심 있는 연구실에도 컨택해서 이번에는 논문 읽고 발표하는 수준의 앳된 학부생이 아니라 어엿한 연구자로서 연구에 기여하고 싶다. 그러면서 내가 머릿속으로만 상상해 온 세계의 현실을 경험해 볼 수 있겠지.


2월 10일이 교환학생 원서 접수 마지막 날이었고, 하루 지난 오늘 이 글을 발행한다. 차근차근 내 마음과 생각을 들여다보며 결론까지 이르렀는데, 사실 이 결론을 내리기까지 호주 워킹홀리데이 경험이 많은 영향을 준 것 같다. 호주 워킹홀리데이 경험으로 외국 생활에 대한 이상의 신기루가 걷어지고 현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경험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는 돌아올 때 즈음 긴 글을 쓰면서 다시 정리해야겠지만.


오랜 꿈이었던 만큼 헤어질 결심을 하기까지 꽤나 시간이 걸렸고, 여러 생각이 얽혔다 풀어졌고, 많은 감정을 느꼈다. 그러나 내 안의 의문을 외면하지 않고 하나하나 들여다본 끝에 내린 결론이기에 시원섭섭하긴 해도 미련은 없다. 


내 오랜 꿈에게 작별 인사를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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