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테서 나오는 게 아냐
22.09.24 일기
어쩌다보니 매일 쓰는 글이 되었는데,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르겠다. 오늘은 간만에 사람들을 만났다. 외출을 마치고 집에 와서 저녁 차려 먹고 해가 질 때쯤 산책을 나갔다. 차분하던 마음에 서서히 금이 가더니 외로움이 엄습했다. 서둘러 집에 와 버렸다. 지겨웠다.
몇 년 만인지 모르게 오늘 시에 대한 이야기를 사람들과 나눴다. 맛있는 걸 사오겠다고 집에 애를 혼자 두고 나갔다 그만 돌아가지 못한 느낌이었다. 집에 혼자 갇혀 어떤 시간을 보냈을지, 안아주는 일 말고는 달리 무얼 더 할 수 있을까. 집밖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당장의 슬픔, 당장의 안도, 당장이라는 만남.
무책임과 불안을 다시 느꼈다. 이 익숙한 경험은 왜 반복될까. 그렇지 않은 경험은 왜 안그랬을까. 이 사람의 차이는 도대체 뭘까. 애써 생각해내지 않으려고 했다. 대가리가 분명 그 차이를 언어화하는 순간, 또 다시 도취의 먹잇감이 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 감정들이 현실과 맞닿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의존적인 중독성으로 번질 뻔한 걸 잘 막았다. 현실이 오염될 뻔 했다.
언제부터 시와 감정들을 외롭게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오늘 김행숙 시인의 시 두 편을 읽었는데, 읽으면서 아득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다른 시인들에 비해 한참을 돌아가야만 했던 사람이었다. 기술적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데 집중하는 걸 미루고 세계를 더듬거리는 걸 먼저 택했다. 이건 어릴 때부터 줄곧 사라진 적 없는 독단적인 습관이다. 나는 무언가를 만드려고 할 때 늘 도착지를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착수에 돌입했다. 그렇지 않으면 흥미를 느끼지 못하거나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이 버릇을 뜯어고치지 않아서 지금 이 모양인가 보다.
나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문장을 진실로 믿는 사람이다. 시도 마찬가지라고 믿는다.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고, 참으로 고집스럽게 책을 붙들었던 이유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많은 걸 외롭게 했다. 나의 감정들은 발 맞춰줬다. 그래, 너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한다면 기꺼이 거기에 동조해주겠다고. 결국 조금씩 알아보는 세계의 왜소한 상황에 맞춰 감정도 길게 줄을 서야만 했다. 주어진 세계와 시를 읽을 때 나의 감정은 늘 확장되어 있었다. 이때 기술적 완성도에 집중했다면, 나는 그 현실 안에서 시를 계속 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믿음으로 하나씩 알아보기 시작하는 현실 앞에 감정은 자리를 찾지 못하고 숨고 말았다. 감당해야 할 과정이라고 믿었다. 현실을 알아본다는 건, 무엇보다 앞선다는 건 그리 쉽게 되는 게 아니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물론 고집이다. 안 그럴 수 있는 걸 알면 안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찬찬히 달래주기로 했다. 나는 감정이 자연과도 같은 것이라고, 마치 쾌락 같은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아니다. 이 태도를 관철하는 건 21세기에서 어처구니없는 짓거리지만, 이미 그런 건 상관이 없었다. 감정이 자의적일 수 있는 것이라면, 공감의 비밀에 어긋나지 않는 이질성도 가능해야 한다. 그걸 보여주는 방식을 시로 택했을 뿐이다. 그래야 소설도 가능할 거라고. 그래야 일상 언어에서도 가능할 거라고. 그래야, 우리가 좀 더 낫게 살 거라고.
이런 큰 그림을 남몰래 그리고 있다, 참 멍청한 짓거리다. 문학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걸까? 그래, 나는 믿는다. 내가 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게 아니다. 언어를 믿는 것뿐이다. 이 멍청한 확신을 사사키 아타루는 참 뻔뻔하게도 하더라. 치열한 무력의, 참으로 더딘 도박의 혁명이라니. 내가 철학이든 문학이든 글을 읽을 때 사적 체험에 기반하여 읽는 버릇을 버리지 못했던 건, 그래야만 비로소 그 진정한 사람 냄새가 풍겨왔기 때문이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살지만, 누군가는 그 누구도 꾸지 않는 멍청하고 어리석은 꿈을 꾼다. 그는 그게 실현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그게 순간의 망상이 아니라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 1년 10년, 일생이 된다고 치자. 그는 그 꿈의 실현을 위해 자기가 믿는 방법을 선택했고, 그걸 보고서 사람들은 늘 안 된다고만 말한다. 그가 꿈의 실현에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조롱하고 헛짓거리라고 말한다. 이 단순한 내러티브는 원피스도 채용한다. 사람의 꿈은 죽지 않고, 누군가 그 꿈을 알아볼 때 비로소 그 삶이 오롯이 읽힌다. 시대마다, 국가마다 자기의 꿈을 위해 언어 작업을 한 저자들의 순진함이다. 이걸 읽지 못하는 한, 그의 말과 글은 그저 나뒹구는 잡동사니로 전락한다.
가령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비롯해 각종 물리 법칙의 발견을 그저 한 천재의 뛰어난 업적으로 보면, 그저 거기에서 머물고 끝이다. 나는 뉴턴에게 진정한 소망이 있었을 거라 믿는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구원을 바랐다. 그가 발견한 '중력'이, 만유의 평등한 힘의 작용이라는 일종의 손길이라고 비유한다면, 나는 뉴턴이 왜 그런 구원을 바랐을지 가슴이 먹먹해진다. 세상에는 단순 발견과 고심하는 문제를 붙들다 유레카! 하는 순간으로 새로운 언어가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본인 스스로 자각을 안 하더라도, 결국 그의 일대기를 살펴볼 때 비로소 드러나는 그의 간절한 희망은 마침내 그가 어디에 당도하려고 했는지의 감정들을 가리킬 수밖에 없다. 프로이트의 소망, 로버트 노직의 소망, 다윈의 소망, 그런 것들이 정제된 언어와 방법론으로 전달된다 한들 꿈은죽는 게 아니라는 의미다. 사람의 꿈을 읽고 못 읽고의 차이가 그의 작업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의 핵심 부품인 것이다.
예시로 든 이들은 결국 성공한 인간들에 속한다. 나는 이름을 남기지 않은 수많은 꿈을 상상하곤 한다. 자신의 꿈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괴로운 마음들을 겪어야만 할까, 편리하고 충동적인 충족으로 대체해서는 도달할 수 없을 거라는 걸 끊임없이 자각하기 위해 새겨야 했을 상처는 어땠을까. 그런 감정들을 떠올리며, 산책을 했다. 너무 낭만적인가. 나는 결국 21세기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하이브리드가 되서 더이상 이를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낭만적 사랑을 겪었을 때도, 그때만큼 신뢰가 쌓였던 적이 없다. 불안과 두려움과 외로움을 순간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선택들에는 결코 스며들 수 없는 감정이 있다. 스스로를 해치지 않는다는 건, 감정을 수호하는 일이기도 하다. 마음을 지킨다는 건, 결국 소중함이 무엇인지 배우는 과정이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이렇게 방황이 한 단계 일단락되는 걸까.
한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진정으로 동심을 갖고 있었는데, 나는 그 동심을 지켜주고 싶었다. 그는 현실적인 노력에 스스로를 혹독하게 만들면서도 꿈을 쫓았다. 그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걸 이룰 거라고 굳게 믿어줬고, 끝까지 응원할 거라고 몇 번이고 말해줬다. 나는 여러 관계를 통해 사람이 얼마나 쉽게 변하고, 관계를 허투루 다루고 마음을 가볍게 여기는지 지겹도록 느껴왔기 때문에 내심 그 마음의 깊이를 바로 알아보지 못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향기가 사라지지 않는 걸 보면서, 힘이 된다는 게 어떤 감정인지를 느꼈다. 자기 도취에 빠져있던 나는 그 감정을 견뎌내지 못했고, 도리어 나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는 걸 구실로 삼았다. 진정성을 그런 속성으로 다뤘던 것이다.
이런 마음들이 얼마나 교묘하게 조작된 것인지를 이제는 이해했고, 또 그렇기 때문에 감정 자체도 변할 수 있었다. 만약 감정이 자연의 그것과 같은 성질로만 다뤄져야 한다면, 그래서 자기 안의 감정이 심리적 요법으로 다뤄지는 게 정답이라면 그 폐쇄에 어떠한 출구도 나타날 수 없다. 감정의 자폐성은 소통이라는 감정의 흐름을 가로막는 데 필요할 뿐이고, 이는 도시 인간에게 써먹기 좋은 수단일 뿐 유일한 방법이 아니다. 나는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저항하고 있기에 늘 실패할 수밖에 없다. 상관없다, 그간 만난 사람, 도움을 받은 사람, 믿음을 준 사람이 정말 우연이었을까? 행운이었을까? 몇 명 안 되는 횟수더라도 삶의 국면마다 결국 나타났던 사람들이 내 의지와는 별개의 사건이었을까? 이건 도취를 벗어난 믿음의 영역이다. 이 믿음의 이름이 세속화되었을 때 낭만이라고 불릴 뿐, 개인적인 체험 안에서 이는 삶에의 기도이자 의지다.
https://www.youtube.com/watch?v=5vonRKdy99U
거리를 걸으며 바깥의 인공물들을 계속 관찰했다. 감정이 양생될 때까지, 나는 견뎌야만 한다. 이끌리는 저 바깥의 온갖 대상들이 자발적으로 나에게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유아적 의존성을 이제는 내려놓아야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쉬이 중독적으로 변한다. 이 강박을 이제는 끊어내야 한다. 순간 나에게 시적 언어가 얼마나 빈곤한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무감각으로 흐르도록 언어를 거부했던 시절, 감정은 내 안에서 얌전히 기다려줬다. 그래, 제 언어를 찾는 거지? 어디 한번 만들어 봐, 라는 그 눈초리들. 근데 연약한 나는 그걸 계속 바깥에서 만들어진 걸 찾으려고만 했다. 스스로 만들려고 해도 안 될 때마다 아직 안 되는 구나 유보했을 뿐이었다.
분명 내 안에는 기다리다 지쳐 잠든 감정들이 도사리고 있다, 벌써 몇 년이나 묵혔단 말인가. 광장의 경종을 찾아 깨워야겠다는 의지가 자꾸 생긴다. 나를 떠나야겠다. 오늘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 연습을 했다. 앞으로 주기적으로 보게 된다. 낯선 공간에도 갈 예정이다. 사람들이 자꾸 나를 치켜세운다. 비인격적 대화는 여전히 재미가 없지만, 분명 배워야 할 코드는 있다.
자꾸만 흩어지려는 감정을 붙드는 데 필요한 걸 하나 찾았다. 모순적인데, 그건 붙드는 게 아니라 놓아주는 거라는 걸. 과거 몇 년 동안은 '나한테서 나오는 거 아냐'라며 다그쳤는데, 이제는 '나한테서 나오는 게 아냐'라고 같이 쳐다볼 수 있게 된 거 같다. 시발.. 저 문구를 시로 썼던 게 15년인데 정말 인간이 이렇다. 이 지겨운 어리석음. 사실 즐거워서 하는 소리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