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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Dec 28. 2022

굴착 8

줄탁동시啐啄同時 1


22.12.28



올해 나는 놓쳤던 나를 되찾고 싶었다. 수년에 걸쳐 희미해진 나를, 놓쳐버린 나를 다시 되찾고 싶었다. 그래서 회복에 힘을 썼고, 만회를 하기 위해 마음을 기울였다. 여기에 쓰는 글은 죄다 나를 향하고 나밖에 모르며 집요하리만치 나, 나, 나만 나타난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바깥에서 자기중심적인 인격이나 나르시스트, 자폐적인 인격을 불쾌하게 느끼는 것만큼이나 이중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최근에 들은 말이 있다. '자기중심적'이라는 말. 내 글에 타자가 없다는 말. 타자가 없는 글을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런 글만 보고 나라는 사람을 그렇게 말한다는 건 부당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왜 부당함을 느낄까. 그런 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왜 그런 판단에, 함부로 사람을 판단하는 그 말들에 부당함을 느낄까. 이건 분명 다른 문제고, 나에게 있어 못 본 척 감히 넘길 수 없는 중대사항이다.


 올해 하반기부터 시작된 나의 회복은 지금 순항 중이다. 잃어버린 많은 것들을 되찾았으며, 놓쳐버린 많은 것들 속에서 지켜내는 힘을 기를 수 있게 단계를 밟고 있다. 감사하면서도, 뿌듯하면서도 자주 울었다. 나는 진심으로, 눈물이 나에게 주는 물이라는 걸 믿는다. 나는 진심이 나올 때 눈물이 난다. 내가 눈물을 흘린다는 건 진심이라는 의미라고. 울지 않는다고 진심이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눈물로 나오는 진심은 나에게 있어 무척 소중하다는 의미이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고, 그렇게 생겨먹은 인간이라서 그렇다.


 처음으로 아버지 이야기를 담은 시를 사람들에게 내보였다.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은 불편해 할 것이고, 부담을 느낄 것이고, 나 또한 이 시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쓰여진 게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나의 마음을 지켜내지 못했다. 시간에 쫓겨 시 편 수를 채워야 한다는 압박에 결국 그 시를 고르게 됐다. 내가 안일했다. 작품이라는 바깥의 실재에 무능했고, 영리하지 못했고, 멍청하게 약점을 노출하고 말았다. 합평을 하기 전 누나를 만났었다. 누나에게 나의 기로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시를 보여주게 되었다. 누나는 우리 가족 이야기가 담긴 시를 2연까지 읽다 울면서 못 읽겠다고 했다. 나도 그 시를 쓸 때 하염없이 울었었다. 시 속에는 나의 시선밖에 없지만, 아비가 죽고 난 뒤 내가 필사적으로 매달린 일 중 하나가 바로 아비라는 타자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타자, 타자라. 내 삶 자체가 온통 불가능한 타자를 받아들여야만 살 수 있는 현실인데, 타자, 타자라. 나는 여태 어떻게 살아 있는 걸까.


 억울하지는 않다. 그랬으면 이런 내용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책을 읽고 현대 담론의 수혜를 받은 사람들에게 타자는 꽤 안전하고 보장받는 권고 사항이고 요청인 건 맞다. 모름지기 그들에게는 각자의 삶 속에서 타자의 반경을 넓히는 게 관건일 게다. 때로는 이성의 힘을 빌려 주제넘을 수도 있겠다. 자신의 삶과는 무관하지만(유관하다고 인정할 수도 있지만) 상상을 하는 동안은 적극적일 수 있는 수많은 고통과 삶에 타자라는 이름을 붙여 이에 대한 호소력을 북돋는 방식으로. 그런 면에서 '타자에 대한 요청'은 무차별적으로 마구 쏘아대도 면제 받는 분위기가 맞다. 인간중심주의를 갖고 오든, 근대 인간을 갖고 오든, 각종 인권 유린과 자유, 평등, 학살, 참사, 비인간적인 면모들을 갖고 오든, 기후 위기를 의식하든 타자에 대한 요청은 강력한 동시대적 명령이다. 21세기 도시에서 사는 나도 이 명령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걸 안다. 어쩌면 내가 삶을 걸고 있는 문제 의식, 공부, 글의 주제들이 죄다 '타자' 때문에 그 존재 이유가 성립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할 필요도 없고, 이렇게까지 할 일도 아니다.


 내가 부당함을 느꼈던 그 부분에 사로잡혔다는 건 이런 내용들이랑 연관이 있지만서도 내가 집요하리만치 나, 나, 나만 중얼거리는 글을 써내려가는 이 태도와도 맞물려 있다. 정말 나는 자기중심적이지 않은가? 이 문장에 티끌의 거짓도 없다면 나는 진심으로 아무렇지 않아야 마땅하다. 내가 부당하다고 느껴서 항변을 토해냈던 건, 나 스스로를 기만했기 때문이다. 나는 자기중심적인 걸 숨기고 싶어 했던 게 맞다. 나의 노력과는 별개로, 나의 삶과는 별개로, 그동안 수행한 수많은 타자 수용에의 지난한 고민과 시름과는 별개로, 나는 자기중심적이라는 틀에 스스로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이 기만의 틈새에 들어온 말인 것이다. '자기중심적이다, 타자가 없다'는 말은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건드려진 나의 진실, 나는 사실 자기중심적이라는 것.


 부당함을 느낀 데에 어느 정도 참작을 할 수는 있다. 그걸 전면으로 드러내지 않았다고, 그것만 있는 게 아니라고, 그런 자폐성에 함몰되어 있지 않다고 말이다. 당연히 그러겠지. 근데 작품이란 건 그렇지 않다. 작품이라는 건, 바깥에 있는 아바타에 가깝다. 이 이야기를 먼저 해보고 싶다.






 처음 미디어 아트 작업을 하면서 깨달았던 건 작품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당시 지도 교수가 했던 말이 있다. '보는 순간, 승부가 나는 것이다'. 이 말은 작품에 의도를 넣고, 메시지를 넣고, 이렇게 봐줬으면 한다는 마음에 도발적인 태도다. 작가가 이런 마음으로 작품을 만들었고, 이런 의도로 이렇게 만들었으며, 하고 싶은 보여주고 싶은 건 이런 거였다는 걸 배신하는 태도다. 그래서 함부로 대해지는 데에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고 때로는 억울함이, 부당함이, 나아가서는 분노를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보는 순간 승부가 나는 것이다. 이 승부가 뭘까? 소비? 향유? 주관적인 무엇? 내가 비인간에 관심이 많고 정신병리와 기술 철학을 계속해서 추구하는 건 바로 이 '승부'에 대한 태도의 변형을 제안하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대중이니 무지몽매니 수준이니 하는 따위의 배척하는 태도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건 사실이고 현실이다. 사람 개별의 가치 판단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바깥에 놓인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태도 그 자체가 사실이고 현실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때로 '있는 그대로'를 말할 수 있어도, 이 있는 그대로는 여지껏 속 시원히 해소된 적 없는 난제였다. 바깥에 실제하는 사물, 현상 들에 어떤 본질적인 자체적 가치 존재를 부여하려는 태도의 탐색이 서구 철학에 있어 수천 년간 이어져온 건 충분히 숙고할 만한 문제임을 시사함과 동시에 되돌아오는 질문, 인간에게 그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가 있다. 우리는 살면서 '진짜'를 따져묻기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이 배신당했을 때 그 무엇보다 매몰차게 거부하지 않는가. 가짜에 대한 환멸, 기만에 대한 경멸, 가상-허구에 대한 불신. 진짜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무의식적 태도는 '있는 그대로'가 우리에게 없다는 것, 돌려 말해 그 기반이 우리에게서 확인되지 않다는 걸 의미하지 않는가.


 결국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건 바로 수용의 태도다.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어떻게 인정하지 않을 것인가. 있는 그대로를 따져 묻는다는 건 실지로 있는 그대로가 있다고 말하기 위함이 아니라 스스로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의 반성적 태도를 유도한다. 그 '변화'를 위해 있는 그대로가 요청되는 것이다. 보는 순간 승부가 나는 것. 우리는 보는 순간 본다. 이 본다는 행위는 개별의 주권이자 한 종으로서의 생존이며, 삶이며, 무엇보다 '시작'이다. 눈을 통해 본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행위는 자신이 놓인 세계와의 관계 초석이며 따라서 필수불가결한 일종의 호흡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다는 행위는 무척이나 기초적이면서도 그것으로 전부인 행위에 가깝다. 승부가 난다는 건, 바로 이 단순한 사실에 스스로가 어떤 마음으로 임하는지를 오롯이 투사한다. 엄격하고 냉정한 것. 어떠한 기회도 제공되지 않는 단 한 번의 순간. 그 순간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후로 나는 지지부진하더라도 많은 고민을 했더랬다. 과연 그 엄격함이 정답인 걸까. 그래서 모든 작품에, 작가에게 이 태도를 조건부로 달아야 하는 걸까. 한 작품을 두고 부연 설명을 길게 늘어놓는 일에는 당연히 피곤함과 억지스러움이 느껴진다. 꼭 뒷받침하는 설명이 있어야 이 작품의 의미가 살아나는 건 마치 실력이 부족해 좀 봐달라는 타협같이 느껴진다. 엄격함을 부여하면 이런 감각에 너그러움을 가져야 하는 걸까. 이 태도가 작품에서만 한정되지 않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현실이지 않나? 일을 잘 못해서 변명만 늘어놓는 사람한테 어떤 마음인지.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는 어떤 마음인지. 투자에 실패한 사람에게는 어떤지. 힘들다는 사람에게는 어떤지.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사람에게는 어떤지. 본다는 행위가 기초적인 세계 관계의 초석이라면, 보는 행위에 포착되는 모든 사물 현상 들에도 마땅히 반영되는 거 아닌가? 관심을 줄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고, 유명한 사람에게는 저렇고가 당연한 건 아니지 않는가? 상을 받고 주목을 받는 작가의 작품과 아마추어니 초보니 하는 무명의 작품에 희미하게라도 어떤 판단의 특권이 부여되는 건 아닌가? 내가 정신병리에 대한 공부를 포기하지 않는 건 나카이 히사오 선생의 글 덕분이었다. 그는 따듯한 시선으로 '사람'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아니라 우리로 설명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글을 '보는 순간 승부가 났다'.


 이 고민에는 엄격함이라는 함정이 우선적으로 다가오고,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실패하고 만다. 과도함을 벗어나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작품을 만들어도, 성공을 해도, 유명세를 타도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 과도함은 '승부'라는 감각이 유발한다. 오직 하나, 유일함, 단 한 번의 순간. 모든 싸움과 경쟁, 생존이 작동하는 1과 0의 세계. 이 세계는 자연의 세계이고 인류 역사에 있어서 한 번도 사라진 적 없는 양식이다. 다만 인간만이, 그 어떤 다른 종들은 감히 하지 않는데 오직 인간만이 하는 짓이 바로 이 세계를 부인하고 수정하고 다르게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까지 공부를 하며 이해한 내용이기도 하다. 인간은 있는 걸 없는 것처럼 믿을 능력이 있고, 없는 걸 있는 것처럼 믿을 능력이 있다. 1과 0의 세계를 벌려 1과 0을 바꾸고 복제하고 없애고 만드는 능력이 있다. 이 능력으로 자연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인공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받아들이는 태도를 수정할 수 없었다면, 과연 털도 없고 피부도 얇고 강력한 무기도 없는 이 연약한 생살들로 변모할 수 있었을까. 나는 '승부가 난다'는 걸 이런 방식으로 이해했다. 승부는 본래 죽음을 거는 결사의 도약이고, 인간은 이 결사의 도약을 다른 걸로 대체하고, 숨기고, 복제하며 한 가지 가능성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그 가능성의 다른 이름은 바로 '다음'이다.


 보는 순간 승부가 난다는 말은 나에게 있어 보고 나면 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말이다. 지난했던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자, 아마 오랫동안 가져갈 확고한 나의 태도다. 이 되돌릴 수 없음이, 돌이킬 수 없음이 사사키 아타루의 말마따나 '읽을 수 없는 걸' 읽는 행위이자, 쓸 수 없는 걸 쓰는 행위, 알아볼 수 없는 걸 알아보는 행위, 받아들일 수 없는 걸 받아들이는 행위로 확장된다. 내가 고집스럽게,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버리지 못했던 건 바로 이 행위에 대한 숙고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수행이 부족했고, 실패가 부족했고, 모멸감이 부족했다. 예전에도 줄곧 썼지만, 나는 배움이란 모멸감이 동반되지 않고서는 충분히 이뤄질 수 없다고 믿는다. 사유는 고통에서 태어난다는 시오랑 선생의 말에 동의하는 맥락과 같다. 작품은, 보는 순간 승부가 난다. 작품을 보여준다는 건, 보여주기 전과 후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 나는 이 전환을 받아들이지 못해 부당함을 느꼈던 것이다. 나를 내려놓지 못해서, 나의 기만을, 거짓 자아를 내려놓지 못해서 승부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비겁함을 극복하고 싶어 시작한 작업이 굴착이다.





 앞서 말한 결사의 도약은 마르크스의 통찰이다. 마르크스는 가치가 건너뛰는(게이머들은 익숙한 감각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순간이동, 포탈, 점멸 등으로) 현상을 결사의 도약이라고 말했다. 상품의 가치가 돈의 가치로 건너뛰는 건, 상품의 결사적인 도약이라고. 이 도약에 실패하면 상품 자체로는 고통스러울 게 없으나 소유자는 고통스럽다. 이는 화폐라는 상징 활동을 정신으로 확장시킨 인류에게 있어서 하나의 은유다. 만져지는 무언가를 만져지지 않는 것에서도 느낄 수 있다는 그 도약이 하나의 승부다. 이 승부에 실패하면 고통스러운 건 그 도약을 감행한 당사자다. 작품은 그저 작품일 뿐, 그 작품으로 감행한 의미의 도약에 실패하면 고통스러운 건 작품이 아니라 작가다. 나의 기만, 거짓 자아 체계가 뿌리를 내린 건 바로 이 실패와 고통이다.


 이 작업의 발단이 조현병에 대한 실존적 접근을 시도한 책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걸 분명히 하자. 우리는 언제, 왜, 어째서 세계로부터 유리되고 분열되는 걸까. 자아는 왜 쪼개지는 걸까. 망상은 어째서 편집 강박의 내용들과 친숙할까. 그렇지 않은 사람과 그런 사람을 가르는 정상-비정상의 기준이 어디에 놓인 경계인지 획정할 수 없는 걸까. 이해할 수 없는 사람, 미친 사람, 제정신이 아닌 사람은 왜 그들이고 우리가 아닐까. 기능하는 장치들은 왜 쓸모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걸까. 나는 이 어설프고 욕심 많은 주제 확장을 우리로, 현실로 소환하려는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다. 억지스러워 보일지라도, 설득력이 하나도 없을지라도 나의 직관을 믿어야만 하는 자기중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나의 바로 다음 세대를 위할 수 있다고, 내가 무수한 위로와 용기, 의미를 받은 것과 같은 맥락으로 나 또한 그런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마음으로 끌고 가고 있다. 그래서 주제를 넘고 있다. 분수를 모르고 있다. 이 거창하고 오만한 태도가 유해한 건지는 모르겠다. 강요성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를 불쾌하게 만드는 건지도 모르겠다. 로널드 랭이 일갈하는 내용이 있는데, 나는 이에 공감한다. 자신이 핵폭탄을 갖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 위험할까, 이를 정치적으로 위협하며 수많은 사람을 전쟁으로 내몰고 난민을 만들고 대의명분을 내세우는 사람이 위험할까. 아무리 미디어가 우리의 사리분별을 가속화시킨다 할지라도 현실과 가상과 실시간과 쏟아지는 정보 폭탄에 피로를 느껴 생각하기를 멈춘다 할지라도 불변할 가능성은 우리 인간이 스스로 변할 수 있는 능력이다. 나는 바로 이 능력에 도박을 걸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아무리 자기중심적이니 이기적이니 자책해도 결코 부정되지 않는 건 바로 이 도박이다. 여기에 '나'는 없다. 자의식이 없다. 그래서 자의식에 관한 비난이 먹혀들 수가 없다. 실력이 없어서, 천재적이지 않아서, 똑똑하지 않아서, 재능이 없어서 허튼 짓을 한다고 비난을 받을 수는 있어도 이 도박이 담고 있는 생명의 비밀을 알아버린 이상,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나는 100만 분의 1이라는 확률을 믿는다. 내가 1이 아니라 1을 위한 99만 9999 중 하나가 되는 '확률'을 믿는다. 이는 희생도 아니고 기여도 아니고 헌신도 아니다. 이기심의 이중적 보상과는 관련이 없다. 삶의 확률을 믿는다는 건 이렇게도 될 수 있고 저렇게도 될 수 있는 선택을 그리며 느끼는 자유라는 착각을 거부하는 일이다. 변할 수 있음을 믿는 일이며 그렇기에 다음에 대한 마음의 기울기를 꺾어버리지 않는 일이다. 열정인지는 모르겠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에 대한 모티프는 늘 다른 종이었고, 사물이었고, 장치였고, 어떠한 자의식도 없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억지스럽게 보일 수밖에 없다. 개소리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 독단적인 허황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다. 그래도 보여준다. 묵묵히 다음, 다음, 다음으로 건너뛰는 저 바깥이. 무수한 실패가 보장되어 있어도 그 실패를 거들떠도 보지 않는 저 확률이. 오직 하나만을 보고 가는 무지와 무능인 것이다. 돈이 걸리지 않은 진정한 의미의 도박이 지금의 세계를 만들었다고, 인정한다면 이 무지와 무능이 지금 가진 언어로 표현될 수 있을까.


 나의 비겁함은 이 무지와 무능에 겁을 먹고 말았다는 진실을 가리킨다. 대단한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님에도 은근슬쩍 그런 마음을 내려놓지 못한 것이다. 사람에게 좋다는 말을 듣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환영받고 싶은 환대로 앞질렀던 것이다. 따라가지 못한 마음을 보지도 못하고, 안일하게, 방심을 했던 지난 나와 화해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좋은 건 좋은 거고 싫은 건 싫은 것, 그러나 내 마음이 가 있어야 할 층위는 그 표면이 아니라 바깥이어야 했는데. 보이는 순간이라는 그 바깥이어야 했는데. 나는 나를 위해서라도 내 세계에 갇혀 벗어나는 척 껍질을 깨려 두들기는 '소리'를 냈다. 내가 나를 타인의 시선으로 보는 이상 이는 구분할 수 없다. 껍질을 깨기 위해 안에서 쪼는 것인지, 소리만 내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 자아는 왜 쪼개질까? 자기 스스로를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어서다. 왜 분열될까. 자신의 행위를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과 그런 사람의 경계는 왜 분명하지 않을까. 내가 믿고 싶은 건, 우리가 이런 모든 내용을 과정으로 본다면 분명 문제되지 않을 언어를 재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안에서 바깥으로 던지는 시선으로 세계를 보고 사물을 보고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시선으로 세계가 보여지고 사물이 보여지고 사람이 보여지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고. 바깥과 안을 가르는 껍질. 그 껍질 중 하나를 허물어야 한다고. 


 망상이다. 허황된 낙관론으로도 볼 수 있겠다. 사소한 걸 거창하게 부풀리는 낭만적 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실존적 존재와의 줄다리기에서 나는 어떻게 하면 이 게임을 끝낼 수 있을까? 이 기만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근래 깨달은 침묵이, 하나의 강력한 힌트가 될 수 있을까? 스스로 살기와 더불어 살기의 고민을 그만두지 않는 게 최선일까. 파도파도 늘 막장인 이 굴착에서 까딱하면 방향을 잃고 헛된 시도가 되어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이 변했다는 착각으로 넘어가는 일만은 안 된다, 안돼. 명심하고 있다. 이 짓거리의 목적은 단 하나. 내려놓기. 방심과 실失심 사이의 아스라한 균형. 잘못 매달리면 힘이 들어가고 결국 과도함으로 번지고 만다.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QH0tlvr3dz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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