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탁동시啐啄同時 2
22.12.30
점점 끝이 다가오는 게 느껴진다.
잘 하고 있는지 아무런 상관이 없어지는 이 느낌 참 오랜만이다. 미혹이라는 단어, 별로 내키는 건 아니었는데.
저번 주에 누나한테서 한 대 얻어맞는 말을 들었다. 이제는 행복하게 살았으면 싶다고. 희미하게나마 살기가 느껴졌다. 그랬었지. 제 삶을 살 수 있다는, 살아도 괜찮다는 그 용기로 살기 시작했지. 누나는 분명 '이제는'이라고 말했다. 그 날 너무 울어서 다음 날 눈이 붓고 말았는데, 새벽에 집에 도착해 토해내듯 울면서(술을 너무 마셔서 결국 토하기도 했다) 자꾸만 되뇌였었다. 이럴 줄 알았다고. 내 이럴 줄 알았다고.
누나의 말 한 마디로 불현듯 생생해진 나의 마음은 처음으로 내 삶을 살기 시작한 마음이었다. 우리가 어떤 시간을 보냈고, 끝끝내 살아남았으며, 그래 이제는 삶으로 살아도 되지 않을까 그런 마음을 허락해준 이 현실을 살기 시작한 마음. 그러다 서서히 잊어버려 잃게 된 마음. 결국 나를 잃게 된 마음.
솔직히 원망스럽다. 여전히 남아 있다. 이상하게 생판 남에게 가 있다. 이 고통을 함부로 여기는 사람을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 나에게 여전히 남아 있다. 죽인다고 죽였는데,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내가 겪은 고통을 누군가에게 짊어지우고 싶은 걸까? 혼자만의 고통이 아니라고 위로를 받고 싶은 걸까? 이제 와서? 아직도? 이런 게 아닌 거 같다. 내가 내려놓지 못하는 건 억울함도 부당함도 아닌, 그때 그 시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능력한 나다.
결국 내가 이 작업을 통해 도착할 끝이 여긴 거 같다. 다음으로 가기 위해 처음으로 가는 시간인 거 같다. 앞으로 갈 게 아니라 뒤로 갔어야 했나 보다. 어쩐지. 수 년간 메말라 있던 불감증에 잠깐이나마 가슴이 울렸던 장면도 그랬지. 우리의 마음과 감정은 늘 이렇게 신호를 준다. 알아보는 게 늦더라도, 결국은 알게 된다. 나는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이 좋다고 느끼는 것만을 좇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결국 정답은 거기 있다. 자신의 마음이, 가슴이 알려줄 거라고. 느낌에 거짓은 없다고. 아무리 다른 사람이 의심스럽게 만든다 할지라도, 그 느낌은 훼손될 수 없다고. 오히려 의심하는 그 사람을 의심해도 좋다고. 한 친구가 나에게 이런 얘기를 들려준 적이 있었다. '내 삶은 거짓이 아니'라고. 이 처절한 절규를 듣고도 모른 척할 현실이 나에겐 없었다. 거짓에 사로잡혀 있었다. 머리로는 벗어날 수 있어도 나는 따라가지 못했다. 말에 의해 대접받고 싶은 만큼, 말을 대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곱씹으면서도 대접받지 않는 순간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의 무능이 들통나니까. 이를 투사라고 말하기도 한다. 거울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벗어나려면 자기 자신을 똑바로 보고 깨부셔야 한다. 그간 내가 수행한 불가능의 타자는 거진 내가 없는 세계에서 이뤄졌다. 아주 가끔 거울을 부술 수 있어도, 다시 둘러싸맸다. 오늘날 사람들은 정말 환생을 믿을까? 나는 그 마음에서 거울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탈출하고 싶은 간절함을 읽는다.
내가 함부로 다룬 무능은 바로 이 지점이었다. 말할 수 없는 공포에 맞서기 위해 언어를 단련하고,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 맞서기 위해 인식에 매달렸다. 나는 한때 아비를 자신의 그림자로부터 도망치려 하염없이 도망치는 중국 우화 속 인물로 빗댄 적이 있다. 맨 정신으로는 현실을 마주할 수 없어 하루도 빠짐없이 술이 든 병과 자기 몸을 바꿔칠 수밖에 없었던 그 마음을 빗댔다. 나라고 뭐가 달랐을까. 그 아비에 그 자식이다. 내가 안 한 건 폭력과 범죄일 뿐. 무서워서 겁에 질린 표정을 감추는 건 그대로 보고 배운 모양새 아니었나. 나약하지 않으려고, 사람에게 상처주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꼴이 얼마나 볼썽사납게 보였을까. 힘이 없어서. 나약함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사로잡히는 꼴이 얼마나 부풀어 보였을까.
원망과 증오를 딛고 처음으로 용서와 사랑으로 가닿으려 할 때 아비는 이때다 싶을 정도로 절묘하게 세상을 떠났었다. 이 간극이 내 삶에 이토록 지난한 기만으로 증식했다. 나는 나를 용서하고 사랑했어야 했는데.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없어서 그렇게 파괴되는 아비를 나 대신으로 여기는 건 아닌지 들여다 봤어야 했는데. 지랄맞다. 지랄맞아. 눈물이 차오르는데 어이없어 헛웃음도 나온다. 내가 무엇에 그리 쫓겨 지금에 당도했는지 이렇게 모를 수가 있을까. 아무렴, 모를 수밖에. 기만이 없었다면 살아남을 수 없었을 테니, 모를 수밖에.
오리무중 같았던 막막함이 다 소용 없어지는 기분이다. 사람에게는 자기 기만이 무작정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조건을 붙이면서, 나에게서 포착된 기만을 어떻게 붙들어야 하나 자꾸만 실패해 막막했는데. 있지도 않은 허상을 붙들려고 하니 아무것도 될 수 없을 수밖에. 파내려 갈 게 아니라 그저 왔던 길을 돌아오기만 하면 되는 일인데. 마음이 참 우습다. 우스워서 귀여운 구석도 있다. 이것도 고작 하나일 뿐이겠지. 더도 말고 하나일 뿐이겠지. 현실에 발붙인다는 그 하나. 늘 바깥에서 살아간다는 하나. 바깥으로 산다는 하나. 세상 편에 서라는 카프카 선생의 말 한 마디가 이제야 가벼워진다. 얄미우면서도 고마운 사람. 무능과 무지를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작가들은 나에게 이런 걸 배울 수 있게 돕나. 참 멋대로 사는 거 같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배워야 하는 느낌이다. 언어라고 하는 건 늘 나에게 '배운다'는 동사 하나만 써먹는 기분이다. 대단하지도 않은 걸 대수롭지 않게 하라고 혼내는 기분이다. 삐져나오는 마음, 사로잡히는 마음, 미혹에 빠져드는 순간을 감시하는 기분이다. 나는 무슨 도를 닦나? 전혀 그런 거 같지도 않은데.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대충 눈치는 채고 있긴 하다. 아마도, 침묵 때문이다. 침묵에 다가갈수록 응당 그렇게 답하기 때문이다. 게임 중독자로 살아 놓고, 여전히 게임 좋아하면서 침묵이라니. 21세기에 살고 있으니, 이런 것도 21세기라고 받아들여야겠다. 자연은 허용하지만 인공은 닫혀 있는 그런 게 아니라고, 하나씩 받아들일 수 있을 거 같다. 자연에 야비가 없는 것처럼 인공 또한 잔인이 없으니까. 변한 건 인간이고, 태도라고. 지금껏 살면서 한 거라곤 이것뿐이기도 하다. 나는 바깥에 있는 무언가를 바꿔본 적이 없다. 바뀐 건 나일 뿐이었다.
자생하기 위해 매달린 올 한 해가 끝나간다. 자생이 없는 세계에 둘러싸여 살면서 자생을 꿈꾸고 있더라.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자생하는 상생이 아니라 자생 없는 상생, 생명을 위하지 않는 상생도 배울 필요가 있다는 걸 알았다. 이걸 배운 적이 없으니 알아본 적이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기계 장치들의 세계와 정신병이라 불리는 의사 정신의 세계로부터 환대를 받으려면 이걸 배워야 하는 직감이 들었다. 두 세계는 사회화된 언어로 자폐적인 세계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이렇게 처음부터 가로막고 있으니 결코 소통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이 두 세계가 없는 인간 현실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으면서,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서 이토록 몰라볼 수 있나 신기하면서도 두렵다. 지난했던 나의 무능과 무지의 경험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기를.
이 굴착 작업은 스스로를 역지사기하기, 라고 부르고 싶다. 말장난 같아서 그렇다. 타인에게는 냉철하게 적용할 수 있는 거짓 자아 체계의 기만들이 본인 스스로에게는 그토록 가혹하고 불가능할 수밖에 없음에 좌절과 절망을 반복한 사람들이 무수히 많았다고 믿는다. 그들을 소수자라고 한정하고 싶지 않고, 그렇다고 일반화하고 싶지도 않다. 그저 무수히 많았다고, 나의 상상 바깥으로 여지를 남겨두고 싶다. 지금 우리에게 이런 반성 능력이 꼭 필요한지는 모르겠다. 나는 사실 생각하지 않는 게 더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창작을 하는 것보다 현실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게 더 현명하고 탁월하다고 생각하며, 작품으로 이름을 남기는 것보다 누군가의 기억에서 맴돌다 잊혀지는 게 더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가정을 꾸리는 게 위대한 작품보다 더 월등해 보인다. 모순적인 건 나도 안다. 나에게 온갖 도움을 준 위대한 작품의 저자들도 이 모순에 대해 알고 있을 거라 확신한다. 남긴 작품에 그런 내용이 없다고 해도, 그 저자들을 한 명의 사람으로 상상할 수만 있다면 충분히 이 확신의 의미를 알 수 있지 않을까. 그 작품들에 담긴 세상살이의 온갖 고통과 시름에서, 나는 이런 걸 읽어냈을 뿐이다. 그들 중 다수가 고집스럽게 그 반대 내용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원래 혼내는 꾸지람은 말의 속내를 알아들어야 하지 않는가. 나를 바깥에서 이끌어줄 어른이 없는 삶이었기에, 껍질 안에 갇힌 나는 이렇게라도 어른을 찾아내야만 했다. 아무 상관없고 아무 차이도 없다. 다 각자의 삶으로 어디로든 통과하기 마련이니까.
한 명의 어른이 되는 일은 평생 끝나지 않을 거 같다. 우리 세대는 보육기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거라는 말을 믿는다. 위험한 생각이지만, 자연으로부터 삐져나온 인류에게 애초에 보육기가 끝난 적이 없었던 건 아닐까 의심하기도 한다. 부담을 덜어내려는 비겁함에서 비롯된 의심은 아니다. 그래서 더 부담스럽고 겁이 난다. 나에게는 종교도 없고, 그래서 그런 의사 정신으로 현실을 중첩시킬 가능성이 없고, 나에게는 자본도 없어서 물신에게 담보 맡길 삶의 가능성도 없다. 없는 건 없는 거고 있는 걸로 사는 게 처음이고 시작이라 믿는다. 그래서 모순을 견디는 거고 아이러니를 없애지 않는 거고, 싸우지 않고도 웃을 수 있는 우리를 상상할 수 있는 거 아닐까. 대단하지도 않은 그 웃음이 비인간의 세계에서 울리길 바라는 게 소박하다면 소박할 나의 욕심이고 이기심이고 포기할 수 없는 자기중심이다. 이 마음으로 간다 해도 분명 다른 데로 도착하겠지. 이 세계는 고작 출발지일 뿐이라는 걸 명심하고 싶다. 어디에도 당도하지 못할 수도 있다, 있어서 갈 수 있는 마음이라는 걸. 현실에 발붙인다는 건 그런 의미 아닐까. 현실의 의미가 그런 거 아닐까. 지금까지는 그런 거 같다.
작업하는 삶을 응원해준 첫 사람이 나의 아버지였다. 다른 삶을 살고 싶었는데. 자신과 다른 삶을 응원받는 건 참 무거운 마음같다. 그게 또 하필 마지막 말이면 그 다음이 없어 더 무거운 거 같다. 어쩌면 나는 이 마음으로부터 도망치는 삶을 살았던 걸지도. 아니, 그랬다. 나는 처음부터 그랬으니까. 왜 그랬을까. 뭘 느꼈길래 그랬을까. 별거 아닌 걸 만들어주는 게 삶이라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같은 걸 말했던 걸까. 언젠가 나도 그런 걸 말하는 사람이 될까. 올해에는 쏘아올린 화살이 많은 거 같다. 나중의 내가 맞으면 다시 돌아오겠지. 그러기 위해 잘 가야겠다. 22년 한 해를 마치며 변한 건, 나 스스로에게 잘 가라는 안부를 건넬 수 있게 됐다는 것 같다. 잘 가, 잘 가.
https://www.youtube.com/watch?v=jpkHUxsdmX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