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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Jan 03. 2023

굴착 10

신 포도


23.01.03



불가능해 보이는 작업을 시작한 지 2달이 지나고 새해가 됐다. 자칫 기만적인 합리화로 빠질 공산이 컸던 이 작업은 막바지에 이르러 나에게 물음 하나를 남겼다. 사람은 어째서 망가지는가. 22년 5월 중순에 관련 논문을 앞부분만 번역했던 적이 있다. 추상적으로 말하면, 사람은 자신이 인지하는 현실과 실제 현실 간 괴리를 어찌하지 못할 때 망가진다.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일상이자 오래된 우화에서도 보여주는 면모다. 대충 말하면 인간의 고통은 저 벌어진 괴리에서 피어오르는 거라고 할 수도 있겠다. 나는 인지를 교정하거나 실제 현실이 수정되면 이 고통이 완화될 거라 믿었다. 양쪽 다 굳건하면, 가하고 받는 고통의 나선에서 나올 수 없을 거라고. 자기 기만, 거짓 자아의 체계는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수단이자 자신의 고통을 바깥 현실에 떠넘기는 방어 수단이다. 이 수단이 문제라면, 이것 없이는 과연 살 수 없는 걸까. 사람은 어째서 망가지는가.


 굴착이라 이름 붙인 이번 작업을 적확하게 빗대는 우화는 [여우와 신 포도]다. 거진 모두가 알음 직한 이 우화에는 배고픈 여우가 나온다. 이 여우는 포도를 발견하고는 먹으려 하지만 너무 높아 도무지 주린 배를 채울 수 없었다. 애를 쓰던 여우는 끝내 마음을 돌리며 '어차피 저 포도는 시어 맛이 없을 거야'라고 합리화를 한다는 내용이다. 다른 사람이 이처럼 굴면 한심하게 생각하기 쉽지만, 자기 자신이 하는 합리화에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도리어 '신 포도'는 강화된다. 주가가 폭등한 종목을 보다 폭락한 걸 보면 신 포도를 하고, 집값이 떨어진 요즘에도 신 포도는 강화된다.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에 대해 잘 나가는 사람을 보면 신 포도를 하고 자신이 누리고 싶었던 것들을 누리는 사람을 보면 신 포도를 한다. 합리화와 인지 부조화, 방어 기제라고 이름 붙여진 이 자기 기만이 스스로에게는 적용되지 않고 늘 남에게만 적용되는 것도 신 포도를 하는 것이다. 굴착이라 이름 붙인 이번 작업에서 내가 하고 싶었던 건, 사실은 너무 달아서 엄청 맛있는 포도라서가 아니라 먹어 보지 않고는 모른다는 걸 인정하는 일이고, 그걸 먹지 못하는 건 너무 높기 때문이지 '먹고 싶은 마음에 현실이 맞춰주지 않아서'가 아니라는 걸 인정하는 일이었다.


 자기 기만에는 한 가지 원칙이 있다. 스스로가 나약하다는 사실을 들키지 말 것. 할 수 없음을 들키지 말 것. 무능이 발각되어선 안 되는 것이다. 이 두려움을 더욱 크게 느끼는 정신의 사람은 자기 기만이 거세다. 세상이 온통 신 포도가 된다. 두려움은 극복되어야 한다고 쉽게 조언할 수 있지만, 그것은 언어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정신과 현실의 문제, 따라서 심리로만 다뤄질 수 없는 문제이다. 만약 굳건한 실제 현실을 수정할 게 아니라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타인이 필요하다. 자신이 나약하고, 할 수 없는 무능한 인간이라는 걸 들켜도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현실을 느끼기 위해. 스스로 그런 믿음을 품어야 하고, 바깥에서는 타인이 그런 믿음을 건네줘야 한다. 이 둘이 만나면 두려움은 극복될 수 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더라도, '그저 자기 자신이 될 뿐인데도', 강화된 자기 기만이 무화될 것이다.


 아비에게 물려받은 고집은 아마도 이 두려움일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 여기에 당도하기까지 거쳐야 했을 수많은 합리화와 기만, 방어 기제는 하나둘 해체되었고 다행히도 성공적이었다. 즉, '증상이 반복되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까는 결코 속단하지 않는다. 증상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노력이 반복될 뿐이니까. 나에게는 수많은 신 포도들이 있었다. 당연히 지금도 있다. 현생을 살지 않고서 유년을 보낸 자아에게 신 포도란 얼마나 자라기 비옥한 토양이겠는가. 무능이 곰삭기 얼마나 적합한 삶의 토대겠는가. 나는 이를 잘못된 선택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시간을 되돌리는 망상을 자주 했다. 범람하는 이세계물과 환생물이 일본에서 한국으로 넘어온 문화 현상과 결을 같이 한다. 자신이 유보한 현실과의 직면 만큼 기성 세대의 자생하는 건강함을 신 포도로 취급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나의 부모와 조부모의 삶에서 우직함과 강인함, 성실함을 읽어내는 건 무엇보다 내가 못났기 때문에 그런 요소가 눈에 더 들어오는 것이다. 나는 이 불편한 진실을 다른 해석으로 무마시킬 마음이 없다.


 자아의 기만과 거짓은 삶에 있어 필수적이지만 안정적이진 않다. 12월 31일, 어머니에게 나의 고민을 털어놨다. 어머니는 나에게 안정적으로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돈이 됐든 마음이 됐든, 불안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미였다. 나의 어머니는 늘 이랬다. 어떠한 강요도 한 적이 없고, 어떠한 삶도 제안한 적이 없다. 관심을 갖지 않으면서도 관심을 거두지는 않는다. 나는 대학 졸업을 유보해서 늦게 했지만(역시 21세기 인간 답다), 대학 과정을 모두 이수할 때까지 어머니는 내가 어떤 전공을 하는지 몰랐다. 그래서 졸업 작품 전시할 때도 나만 가족이 안 왔었다. 내가 마주하지 못했던 두려움의 근원은 삶을 응원해주는 마음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가 최초의 경험이었다. 그때 숨어서 이렇게 오래 자는 척할 줄은 몰랐다. 한 편으로는 노력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히키코모리의 정신이었다. 이 모라토리엄의 체험이 분명 잘못된 선택은 아니라고 믿지만, 합리화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유는 바깥 사람들이 이런 자폐성을 하찮게 여겨서가 아니라 기만과 거짓이 현실과 짝짜꿍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기성 세대가 가고 나면, 분명 이쪽 감수성이 중심이 되어 여러 콘텐츠가 소비되고 향유될 수밖에 없는 수순임을 느낀다. 두려움을 극복하려면, 이제는 이 승부에 참여해야 한다. 멀찌감치 관망만 하던 태도를 그만두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삶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게 될 때 신 포도를 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째서 망가지는가. 그 잘못에 짓눌리기 때문일까. 나는 이 잘못이 '먹고 싶은 마음에 현실이 맞춰주지 않아서'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욕망을 현실이 채워줄 거라는 마음. 쉽고 수월하게 충족할 거라는 마음. 자신의 이기심이 중심이고 나머진 주변이거나 이용 가치가 있는 무엇으로 구조화하는 정신. 그것이 틀어졌을 때 발생하는 게 잘못이라고. 세상 편에 서라는 카프카의 말에는 꽤 방대한 함의가 있다. 이 기만과 거짓을 어떻게 파훼할 것인가에 대한 가장 분명한 등대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해, 그는 자기 편에 선다는 게 어떤 건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의 아비는 자신이 한 잘못된 선택에 짓눌려 처참히 망가지고 말았다. 나는 어떤가. 시간이 흐르면 지금까지의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게 될까. 그래서 합리화를 하고 주구장창 신 포도를 하며 끊임없이 기만과 거짓을 강화하며 전전긍긍 살아갈까.


 그런 삶을 싫어해서는 안 된다. 수많은 이들의 삶이고, 현실이고, 일상이니까. 자기 안에 간직했던 소중한 마음들, 두려움에 떨며 숨어 버린 마음들, 맞서지 못하고 얻어내지 못했던 마음들이 닻이 되어 얼마나 깊은 폐부를 찌르고 있을까,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기만과 거짓을 무화한다는 건, 그런 두려움이 들통났을 때 위협적이지 않다는 걸 믿음으로 간직하는 사람들이 일반이어야 가능하다. 그래야 불특정 다수가 지인이 되고, 친구가 되고, 가족이 되어 기회가 균등하게 분포될 테니까. 자살률 1위라는 건 모두가 알지만, 어떻게 해야 잃어버린 유대를 회복할 수 있을지 말로는 할 수 있지만, 우리 세대가 잃어버린 건 위로와 용기라기보다 자신의 두려움에 대한 자각에 가깝다. 몇몇 20세기 학자들이 이 사태를 예견하고 경고장을 날려댔던 건 뛰어난 통찰이었지만, 그 인과성을 설득시킬 수는 없었다. 오히려 모라토리엄이 더욱 늘어나 경고가 소용이 없어졌다. 자각은, 본래 어딘가에 가로막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무능력함에서 비롯되는 탈출이다. 이를 없애려면 너무 간단하지 않겠는가. 그 누구도 '가로막힌' 기분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면 된다. 예전엔 혼자가 되면 그런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지만, 21세기는 그 반대다. 오히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게 만든다. 이 기괴함을 '있는 그대로' 알아보고, 이게 작금의 현실임을 인정하여 이 토대 위에서 자생하는 감수성을 그려내려고 하는 나의 삶은 과연 잘못된 선택이 될까?


 내가 비인간에 관한 작업을 포기하지 않음에는 세상 편에 서라는 준칙이 있기에 지탱된다. 만약 이 준칙을 어긴다면, 나는 분명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이 될 것이다. 슬금슬금 시에서도 '비인간'에 대한 시도들이 파편처럼 나타나고 있다. 솔직히, 누가 먼저 하면 어떡하지 싶은 마음도 있다. 15년부터 이렇게 다져왔는데 누구한테 뺏기는 기분이 들면 얼마나 비참할까, 싶은 마음. 그렇다면 분명 나는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일 것이다. 그게 결국 나의 최선일 것이고, 그게 나의 분수일 것이다. 두려움에 맞서서, 신 포도를 그만두고 승부에 참여하겠다. 나의 자아 깊은 곳에 감춰진 두려움 중 하나가 오늘 들통났다. '돈 없는 건 핑계다'. 그렇다. 나는 돈이 없어서, 창작 작업을 마음껏 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신 포도를 했다. 먹고 싶은데 먹을 수 없어서 남들 먹는 걸 보고 신 포도를 했다. 아무리 나의 작업을 위해 수 년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을 보냈어도, 이 마음이 나의 자아 깊은 곳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패배주의자와 매한가지인 것이다. 이 나약함을 받아들이는 중이다. 쉽지 않아도,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허황과 망상들이 벌이는 기만극에서 유일한 관람객이었던 나는 이제 발길을 끊어야 한다.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이 되는' 여러 행보가 있지만, 나에게는 자기 기만이 거진 막바지에 있는 보스급인 거 같다. 이를 직면하지 않고도 현실에 밀착해 보낸 세월이 있다는 게 분명 특징 중 하나이리라. 돈이 없어서 실패도 마음껏 할 수 없었던 20대의 나에게, '돈 없는 건 핑계'라는 말을 들어야만 했던 나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극복을 전해주고 싶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이 그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으로.


 한 칼럼에서 조언을 하는 내용이 있었다. 신 포도를 하지 말고,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여 현실적인 처세를 하는 걸 권하고 싶다고. 포도가 너무 높아 먹지 못하면, '아 당장 먹을 수가 없구나, 다른 먹거리를 찾든 도구를 쓰든 해야지'라고 현실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어차피 신 포도야, 줘도 안 먹어'라든지 '나는 먹을 수 없어'라고 한탄과 연민에 빠지지 말고. 목표 달성에는 현실적인 게 맞지만, 우리는 인간이고, 결국 이 셋 다 필요하다. 신 포도도 필요하고 한탄과 연민도 필요하고 현실적인 태도도 필요하다. 나는 이제 안 해 본 걸 할 차례다.





 

https://www.youtube.com/watch?v=sJioyZOC4F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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