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상투적인 문구가 가장 어울리는 한 해였다. 작년 이맘때 덜 중독적인 삶과 글이 되기를 희망했었다. 하반기부터 시작된 '치료'는 다시 제 삶을 되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정신과를 다니고 식단을 짜고 가볍게라도 운동을 했다. 동시에 시 쓰기에 돌입했다. 막혀 있던 시작에 손을 얹었다. 한 2주 머리를 쥐어싸매면 한두 편 써내는 게 고작이었다. 새로 썼던 시들은 대체로 좋다는 이야기를 합평 자리에서 들었다. 어떻게 써야 사람들에게 좋게 다가가는 시가 되고, 어떻게 써야 나만의 고집스러운 시가 되는지 그 경계가 좀 더 분명해졌다. 아직은 이 균형을 잘 잡지는 못한다. 근 2달 간 5편의 시를 새로 썼다. 썼던 걸 고친 건 포함하지 않았다. 4~5년 만이다.
일본어 공부는 마음만 먹고 시작하지 못했다. 외국어는 늘 나의 기만 징표였다.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함부로 다짐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한 2달은 열심히 했는데, 살짝 허들이 올라갔다고 그만 내려놓고 말았으니. 그래도 목표에 달성하면 분명 큰 만족감을 줄 게 뻔하기 때문에 마음의 짐은 23년에도 가져갈 생각이다.
올 한 해는 시 작업에 모든 걸 걸어볼 마음이다. 돌진하는 마음으로 시집 한 권을 목표로 삼고 있다. 뜻대로 안 되겠지만, 시작에 있어서 만큼은 두렵지 않다. 가닿고 싶은 세계에 전심을 다해 기울이고 싶은 마음뿐이다. 22년에 다시 배운 것 중 하나는 맞서기, 직면하기다. 다음, 처음, 다음, 처음. 가보겠다.
책은 많이 읽지 않았다.
튀는 신세대 숨는 신세대 - 와다 히데키
쥐와 굴 - 배수연
새로운 배려 - 오히라 겐
아가씨와 빵 - 심민아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 - 신미나
스티그마 - 어빙 고프만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 이기리
21세기의 욕망 - 오히라 겐
정신병의 나라에서 왔습니다 - 리단
문학 천재 진단하기 - 이리나 시롯키나
우리 모두 - 레이몬드 카버
정보기술은 시간을 어떻게 변화시킬까? - 이희진
케이크를 자르지 못하는 아이들 - 미야구치 코지
뉴 로맨틱 사이보그 - 마크 코켈버그
템포 템포 - 칼 하인츠 가이슬러
디지털이다 - 니콜라스 네그로폰테
피상성 예찬 - 빌렘 플루서
21세기 문제군 - 나카무라 유지로
몸짓들 - 빌렘 플루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 프랑수와즈 사강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 - 최재원
최소 저항의 법칙 - 로버트 프리츠
역동적 기억 - Roger C. Schank
탈출속도 - 폴 비릴리오
장치란 무엇인가? 장치학을 위한 서론 - 조르조 아감벤
반란의 조짐 - 보이지 않는 위원회
동력의 기술 - 폴 비릴리오
현대성과 자아정체성 - 앤서니 기든스
나르시시즘의 문화 - 크리스토퍼 라쉬
열정으로서의 사랑 - 니콜라스 루만
현대의 침몰 - 리차드 세네트
자아 연출의 사회학 - 앤서니 기든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 제니 오델
책 대 담배 - 조지 오웰
침묵의 세계 - 막스 피카르트
분열된 자기 - 로널드 랭
사고와 언어 - 비고츠키
연필로 고래잡는 글쓰기 - 다카하시 겐이치로
사물들 - 조르주 페렉
이십억 광년의 고독 - 다니카와 순타로
엔딩과 랜딩 - 이원석
현대시작법 - 오규원
편집증 - 데이비드 벨
사랑은 탄생하라 - 이원
읽다 만 책들은 적지 않았다. 시집과 얇은 책이 많아서 목록은 좀 길어 보이지만 분량으로 따지면 별로 안 된다. 올해의 책은 역시 빌렘 플루서 아저씨다. 이 아저씨 만난 건 크나큰 행운이었다. 다시 읽고 시 작업에 있어 기초로 삼을 자극을 받을 심산이다. 이 외에 몇 권 꼽자면, [뉴 로맨틱 사이보그], [탈출속도], [현대성과 자아정체성], [열정으로서의 사랑], [현대의 침몰], [분열된 자기], [사물들]이다. 조르주 페렉은 예전부터 침 흘리던 작가였는데, 이제야 읽었다. 존나 매력적인데 분량이 좀 많아서 미루게 되는 [인생사용법]이 좀 기대된다.
올해는 플루서라는 이름 하나로 구심점이 잡히는 거 같다. 23년에는 본격적으로(두려움에 맞서며) 미뤄뒀던 기술 철학 텍스트들을 집요하게 읽을 것이다. 공부를 그만하라는 말은 씹고 내 길을 가기로 했다. 사람의 다양성을 믿는다면, 정신의 다양성 또한 믿어야 하고, 자신에게 맞는 방식으로 가는 게 결국 결과를 떠나 자기 확신의 중력이 된다. 나는 추상에 특화된 사람이고, 미분인지와 분열적으로 친화된 정신을 지닌 사람이다. 이런 인지 구조를 특징으로 삼는 사람은 현실과 사실에 가닿기 위해 이에 걸맞는 방법을 채택해야 할 뿐, 훼방하는 말은 들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들어야 할 건 그런 말들에 담긴 함의, 있는 그대로를 훼손하여 보고 싶은 대로 보려는 그 태도는 내가 알아서 잘 경계하고 무화시켜야 할 내 몫일 게다.
미완성으로 남거나, 완성하여 결국 돌파해내거나 둘 중 하나인 이판사판의 2023년이다. 올 한 해는 '현실적으로' 살기를 마음으로 다잡고 있다. 2021년은 태만의 해, 2022년은 만회의 해, 2023년은 노력의 해가 되기를. 만약 돌파를 하지 않고 다시 느슨해지거나 또 다시 기만의 굴레에 빠질 때를 위해 올해 집요하게 글을 썼었다. 어떤 시간을 보냈고, 어떤 마음이었으며, 어떤 몸부림을 쳤는지 속속 새기고 또 새기려고. 이렇게까지 삶을 걸면서도 만약 또 다시 17년의 굴레로 돌아간다면, 그게 최선인 사람일 것이다.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어. 두려움에 맞서는 마음에 방심하지 않으며, 한 해를 시작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