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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Mar 12. 2023

난데없이 어김없이


23.03.12 일기



며칠 전 전역했던 군부대에 갔다. 차가 생기면 가려던, 마음이 묶여 있는 곳 중 하나다. 무식한 도로 스파이크가 깔려 있는 정문 앞에서 잠시 서성거린 게 전부였지만, 한 번 나오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 여겼던 그 문을 보니 묶여 있던 마음의 사슬이 조금 느슨해졌다.


 2012년 가을, 전역을 하면서 저 문을 나와 버스를 타고 금촌역으로 갔었다. 가는 길에 꽃다발을 사들고, 곧장 집으로 가 어머니한테 전역 인사를 하고 꽃을 줬다. 모든 게 신기하고 감사했다. 몇 시가 되면 이걸 해야 하고, 몇 시가 되면 저걸 해야 하는 구속이 싹 사라졌다. 뭔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어리둥절하면서도 즐거웠다. 그때부터 감겼던 삶의 시간이, 스스로 '내 삶'이라 자부하던 만족감이 어느새 고갈되었던 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다. 10년이 훌쩍 지나 제 발로 거길 찾아갔다는 게, 실컷 탕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지난 시절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나였다. 시간은 멈췄고, 제자리가 한계라는 듯 되감기를 일삼았다. 17년부터 써제낀 숱한 글이 그 증거였다.


 2012년 설날, 어머니에게 편지를 한 통 썼었다. 내가 안 좋은 일을 겪든, 기쁘든 슬프든 괴롭든 방황하든 행복하든 어떠한 상황에 놓이든, 내 인생을 살아갈 거라는 걸 믿어달라는 내용이었다. 이 편지는 반송되었다. 이유는 기억나질 않는다. 하지만 편지는 전달되었다. 어머니는 여지껏 그런 믿음을 가져주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이 상황은 하도 오래 되어 지겨울 만한데도 늘 새로워 지치지도 않는다. 그러나 나는 지쳤다. 이 상황을 비스듬히 지켜보는 내가 지쳤다. 시간과 힘을 헛되이 다 써 버리는 데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는다. 방에 봄이 피어나도, 어김없이 봄이 와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도, 시작되려 해도 나는 아니었다. 중독에 끌려다니는 내가 무언가 주장할 수는 없다. 나는 결핍에 집중한다. 소모시키고 탕진하는 데 혈안이 된다. 이게 내 삶이다.


 삶을 살던 젊은 시절이 멀게만 느껴진다. 까마득한 향수처럼, 봄에 각인된 기억들이 더 이상 가능할 거 같지 않다. 반대로 근래의 봄들은 어제와 같이 가깝게 느껴진다. 그 무엇도 각인되어 있지 않아서? 달라붙지 못하는 건 의미가 아니라 나일 뿐인데. 이 거리감 앞에 혼란스럽다. 부대 정문을 걸어 나오며 만끽한 자유와 탕진하며 소모시키는 자유는 같은 자유다. 지금의 내가 곧 나의 자유다. 어릴 때부터 느꼈지만, 자유를 좋게 생각한 적이 별로 없다. 자유는 늘 그저 그렇다.


 나는 문제를 겪으면 결핍이 자극되어 이를 소모시키고자 무언가에 탐닉한다. 탐닉하고 있는 동안 결핍이 자극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불안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부터 굴러 온 눈덩이로 해석할 수도 있다. 감당할 수 없는 문제 앞에 탐닉으로 도피하니, 맞설 체력이 점점 떨어지다 아예 가능하지 않을 것처럼 완전히 소진됐다고 말이다. 힘을 안 쓰니 근육이 다 빠져나간 것처럼. 각을 틀어 소진시켜야 할 결핍의 에너지가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황폐화시켜야 할 모든 걸 남김없이 황폐화시켜야 잠재워지는 결핍의 소진. 이는 논리적이지는 않다. 끊임없이 건조하게 만든다고 무언가 생성될 리 만무하다. 그런데 이 방식으로 주체를 운영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스스로를 남김없이 다 태워버려야 비로소 시작할 수 있는 게 나다. 탐닉 없이는 재생도 없다.


 그러나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알 수 없다. 스스로에 대한 중립도 가질 수 없다, 그런 게 가당키나 한 일일지. 시간을 되감고, 되감고, 되감고. 존재의 적분 속에서 나를 조립한다. 내 안에서 자극을 유발시킨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낼 수가 없다. 끊임없이 탐닉할 뿐이다. 생의 의미를 조금도 맛보지 못한다. 이 과도함을 떨쳐낼 수가 없다.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아도, '문제를 겪는다'는 상황 속에서는 인식이 진정성에의 과도함으로 불거진다. 사실에 대한 인식이 줄어들어 갈구하게 된다. 같은 환경인데, 같은 외부인데, 같은 일상인데 나는 점점 자극에 매달리게 된다. 사실을 달라고. 더한 사실을 달라고. 그렇게 탐닉에 빠져든다. 이는 다시 문제를 겪는 상황으로 가중된다. 원환이 형성된다. 결핍이 자극되면 탐닉을 하고, 이는 다시 문제 상황이 되고 결핍을 자극한다. 이 싸이클 속에서 스스로 빠져나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제 삶을 사는 게 불가능해진다. 제자리가 한계다.


 그래서 한계를 찾는다. 한계는 부딪혀야 발견할 수 있다고. 부딪히는 방법조차 잃어버려 방황하니 봄이 와서 실어다준다. 절박하더라. 절박함. 나는 늘 닥쳐야지만 움직였다. 코앞까지 들이닥쳐야 비로소 '사실'로 인식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게 허구다. 윅스킬 용어를 빌리자면, 이게 내 환경 세계다. 내보낼 수 없는 기침처럼 사는 세계다. 실수이거나 잘못으로 남는 세계. 자란다면 버섯이 되고. 몇 년만인지 모를 봄이 왔다. 내 눈이 싹트는 봄이. 난데없어, 어김없는데 난데없어. 


 그렇지만 문제를 겪는다는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다. 결핍이 자극된다는 것도. 참 좆같은 임상이다. 대의도 없고 소명도 없고 진보도 없는 임상이다. 내면이라는 말도, 심리라는 말도, 신경이라는 말도 다 비끼는 기분이라 짜증이 날 정돈데 맨날 헛다리만 짚고 몸 관리만 촘촘해진다. 이런 정신을 달고 사는 게 나의 자유다. 자유라면 자유지. 결핍은 나의 자유. 인정하기 싫은데 삶이 인정하라고 시킨다. 다른 삶을 주지도 않는다. 가능성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늘 하나다. 그저 그렇게. 콜록거리는 시계가 도무지 지칠 줄 모른다. 시계라도 대신 뱉어줬으면 좋겠다. 이 끈적거리는 기침을. 나는 필름이 없는 사진기처럼 창가에 서서 굳을 준비를 하고. 구긴 종이로도 깨질 것처럼, 반사될 것처럼 유리를 코스프레 하고. 돌연히 포획을 하는 순발로 한 줄기 문장을 쓰겠지. 지구를 그리며. 구해줄게, 구해줄게. 하고. 단순한 곡선으로.


 




https://www.youtube.com/watch?v=s06yoV5Yk5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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