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0.01
9월 30일, 자고 일어났더니 어머니는 일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할머니는 안 계셨다. 아침 일찍 일어나 둘이 밥을 해 먹고 각자 일을 하러 나갔던 것이다. 오전 9시. 원래는 오전에 아빠 산소에 갔다 올 예정이었는데 어머니도 바쁘니 그냥 할머니 일 도와주겠다고 하고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내가 시골집에 가면 늘 입는 작업복이 있다. 바지는 삼촌이 입던 군복 바지, 상의는 엄마가 입던 남방. 거기다 할머니 챙 모자를 쓰고 큰 삼촌이 신던 장화를 신으면 끝이다. 바로 할머니가 있는 밭으로 갔다.
할머니는 꼬칫닢을 따면서 한 할머니랑 수다를 떨고 계셨다. 나는 누군지 모르지만(시골에 가면 어르신들은 늘 나를 안다, 내가 모를 뿐) 할머니께 먼저 인사를 드렸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릴 땐 늘 손을 잡는 게 나의 버릇이다. 그들의 손에서는 항상 힘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세월이라는 힘, 사람이라는 힘, 나아가서는 환대라는 힘. 할머니에게 인사를 드리면 외할머니가 내가 누구 자식이라고 소개를 하고, 그러면 그 할머니는 아유 갸가 기여? 참 잘 컸네, 하면서 웃어주셨다. 웃으며 인사가 끝나고 나는 외할머니에게 다가가며 할미 도우러 왔다고 일 달라고 매달리기 시작했다.
나의 외할머니는 내가 일을 도우려고 하면 3번 정도는 하지 말라고 학을 떼신다. 그러면 나는 일단 할머니가 하는 걸 따라한다, 서울 촌놈이라 잘 모르니까 어떻게 하는지 알려달라고. 사실 밭일은 보고 따라해도 따라할 수가 없다, 그 능숙함은 바로 모방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렇게 옆에서 꼬칫닢을 하나씩 따니 외할머니는 '아유 하지 말랑께' 하면서 좀 더 강하게 말하고, 나는 이때다 싶어서 '아니 엄마도 바빠 이럴 때 할미 도와야지' 하고 말한다. 그제서야 외할머니가 자세를 고친다. '그랴? 아유 미안하고 고맙네' 그리고는 '그럼 저짝 작은 방 창고가서 열쇠 따가 퇴비 좀 갖곤나' 한다. 외할머니는 미안해서 일을 안 시키려고 한다면서 결국 돕기로 되고 나니 에구 우리 손주가 할미 생각해서라고 계속 되뇌이셨다. 신뢰는 입으로 하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한다는 게 먹히는 화법이다. 내가 늘 할머니 고집을 꺾는 건 이 방식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전 일이 그렇게 시작됐다. 밭에다 퇴비 60kg 나르고 옆에서 꼬칫닢 따려고 했더니 할미가 이건 자기 혼자서도 할 수 있다며 그럼 뒷산 밭에다 비료 좀 두자고 나를 집으로 끌고 갔다. 가는 길에 아침 안 먹냐고 자꾸 혼났다. '할미 나 원래 아침 안 먹어야'라고 했더니 이 세상에 아침 안 먹는 사람이 어딨냐고 말하셨다. 그래서 이 세상 사람 되려고 아침 먹었다. 밥 한숟갈 뜨고 오전에 엄마랑 할머니가 먹은 식기 설거지하면서 생각했다. 할머니가 적게라도 밥을 꼭 먹어야 한다며 안 그럼 유장 망가진다고 말하셨다. 구두라서 뭔 단어인지 정확히 몰랐지만 '대장'인 거 같았다. 외할머니는 보릿고개를 거치신 분이다. 어릴 적 인기 드라마 '육남매'를 보면서 마지막에 엄청 충격을 먹었던 장면이 떠올랐다. 사람이 하도 굶다가 갑자기 허겁지겁 먹으면 장이 꼬여서 죽기도 한다. 외할머니는 유장 배리면 낫기 힘들다고 계속 말하셨다.
밥 먹고 비료 90kg을 날랐다. 처음에는 지게를 메게 하려고 하셨는데, 키가 커서 안 맞는다고 그냥 어깨에 짊어지고 날랐다. 예전에도 아빠가 메던 지게를 한번 메본 적이 있었는데, 옛날에는 체형들이 얼추 비슷해서 지게도 거기에 맞춰져 있었지만 우리 세대부터는 서구식 식단이 활성화되서 메려고 해도 잘 맞지가 않았다. 세대 간극이 이럴 때 느껴지곤 했다.
비료를 다 나르니 할머니가 대추나무 아래서 대추를 줍고 있었다. 나는 대추나무를 보며 흔들면 후두둑 떨어지겠다 싶어 '할미 머리 조심해 대추 떨어진다'하고 나무를 힘껏 흔들었다. 우수수 떨어지는 대추 비 아래서 할머니는 소녀처럼 즐거워했다. 자기는 생각도 못했다면서, 그냥 떨어진 것만 주우려고 했다고. 할머니는 다리가 불편하셔서 지팡이 없이는 걷지 못하신다. 뒷산에 오를 때도 내려갈 때도 흙바닥에 주저 앉아서 이동하신다.
한참 대추를 줍고 있었는데 할머니가 햇빛 뜨겁다고 이제 그만 가서 쉬라고 자꾸 말했다. 나는 떨어진 것만 다 줍고 가려고 '아유 할미 햇빛이 뜨거워야 햇빛이제'라고 너스레를 떨었더니 할머니가 '지랄하고 염병쌌네'라고 핀잔 줬다. 낄낄거리면서 대추알을 주웠다.
거진 다 주워갈 즘 엄마가 작업복을 입고 올라왔다. 호미를 하나 들고는 뭔 고들빼기가 이리도 크냐고 신나했다. 대추를 다 줍고 엄마따라 호미 들고 고들빼기를 캤다. 엄마랑 나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어릴 때 이를 느낀 적이 더러 있었다. 내 삶의 태도가 개같이 사는 건데 이건 당장의 눈앞에 있는 걸 쫓느라 정신을 못차리는 모양새 때문에 그렇다. 난 어릴 때 퍼즐 맞추기를 그렇게나 좋아했는데, 거실에다 1000 피스나 3000 피스 퍼즐을 펼쳐 놓고 맞추다 보면 어느새 엄마도 와서 같이 맞추기 시작했다. 둘이서 그렇게 몇 시간이고 퍼즐 맞추기를 더러 하곤 했는데, 기본 6~8시간이었으니 둘 다 한번 꽂히면 그것만 몰두하는 공통점이 있다. 특히 엄마는 밭에 오면 이 버릇이 드러나는데, 눈앞에 뭐가 보이면 그냥 지나치질 못한다. 헨젤과 그레텔처럼 고들빼기 하나 캐고 눈 앞에 있는 고들빼기 쫓아다니며 둘이 한참을 캤다.
이후로 엄마랑 홍시 따고 여주 따고 호박 줍고 작두콩에 물 주고 뒷산에서 내려왔다. 근데 '여주'를 난생 처음봤다. 여주가 자라는 곳은 예전에 외할아버지가 계실 때 버섯 재배를 한다고 지은 비닐하우스였는데, 이후 그 공간에서 여러 작물이 거쳤던 걸로 기억한다. 여주는 생김새가 뭐랄까, 예전에 연밥을 처음 봤을 때의 느낌과 좀 비슷한데 되게 적극적이랄까. 여튼 한참 구경하다 오전 일 끝나고 할머니랑 같이 낮잠 좀 잤다.
오후에 화엄사에 도착했는데, 서둘러 서울로 혼자 왔다. 이번 화엄문화제의 주제어는 '길'이었다. 이번에 지난 삶을 관통하는 나를 들여다보면서, 고통에 직면하면서 나는 길이라는 이미지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어떻게 길이 생길까, 그 시간의 형상에 대해서 나는 잡힐 듯 말 듯하는 느낌에 조금 간지러웠다. 화엄으로 가는 길. 현실은 나의 뒷덜미를 잡았다. 어딜 가냐고. 너가 지금 갈 수 있을 거 같냐고. 정말 서둘러 서울로 올라왔다.
보려고 했던 아빠도, 물려줄려고 샀던 담배도 결국 내 주머니에서 나오지 못했다. 나에게는 책임이 있고, 그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돌려보내려고 했던 걸까. 몇 년이나 기다린 화엄사에서의 시간을 그렇게 미루게 됐다. 어쩌면 영영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다. 아쉬움도 미련도 없다. 책임이란, 나를 현실에 붙들게 하는 힘이니까. 나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그 시간의 형상에 나를 맞춰야 한다고. 화엄사 문턱까지 갔음에도 다시 돌아온 이 우회에 어떠한 의심도 들지 않았다. 2주 동안 나는 잃어버린 많은 걸 되찾았다. 지킬 수 있는 힘이 자라날 수 있도록, 지켜볼 수 있는 힘이 자생할 수 있도록 주먹을 꽉 쥐고 폈다. 아무것도 새어나가지 않는 이 느낌을 나는 어릴 때부터 이렇게 불렀다. 확신이라고.
https://www.youtube.com/watch?v=JevnYFq3Ta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