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 작업 11
24.01.29
꿈 #1
나는 어떤 무리 중 하나로, 밖에서 동물을 포획해야 하는 임무를 맡는다. 들판의 나무에서 작고 귀여운, 검은 뱀 한 마리(노란 무늬가 있었다)를 발견하고 나는 그 뱀을 잡아 가져간다. 그 뱀은 처음 발견된 뱀이었다. 이후 나는 사슴? 같은 동물을 잡기 위해 다시 야생으로 나간다.
꿈 #2
나는 파란 보석이 담긴 상자를 들고 무엇인가 하려고 한다.
꿈 #3
나는 어떤 공동체에 있다. 여기서 나는 노예? 같이 직급이 무척 낮은 사람이다. 어떤 일이 있고 난 뒤, 여기 사람들이 하나둘 괴물로 변한다는 걸 알아차린다. 그들의 뒤통수에는 이상한 문양같은 흉터나 자국이 있었고, 그걸 알아보고 그들 또한 곧 변할 거라는 걸 직감한다. 나는 한 여자 집행관에게 나를 내보내달라고 애원한다. 그녀는 처음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내보내줄 수 없다고 했으나, 나의 간절한-감정적인 부탁을 듣고는 나의 말을 한 책에서 봤었다며, 감동을 받은 느낌으로 나를 내보내주게 된다. 이때 나는 말을 할 때 숨이 가빠지며, 헐떡이듯 울었던 기억이 난다. 이후 나는 동행인 2명의 남자와 함께 어딘가로 가고 있다. 한 명은 황정민으로 나오고, 다른 한 명은 배우 이종석으로 나온다. 산 어귀, 거대한 암석 언저리에서 황정민이 이종석의 새우탕을 뺏어 먹는데, 그 모습이 너무 웃겨 깔깔대다 꿈에서 깼다.
꿈 #4
나는 소대장인 거 같다. 여기는 한 차례 전쟁을 겪은 곳이고, 왠지 모르게 이곳에 엄청난 시체가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어쩐지 나는 이 시체를 발굴해 묻어줘야 한다는 걸 느낀다. 하지만 이 수많은 해골을 언제 다? 하는 부담을 느끼면서도 꿈에서는 무수한 해골을 꺼내 무덤을 만들어준다.
꿈 #5
(기록하지 않아 많이 휘발됐지만) 꿈에서 인도 혹은 미국으로 여행을 가 있는 상황이 나왔다. 엄마에게 연락이 왔는데, 어떤 여자와 함께 있고 그 여자와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고 핸드폰으로 연락이 왔다. 나는 엄마에게 '수상한 사람 아니지?'라는 문자를 보내려고 하는데 타자가 계속 안 되서 무척이나 애를 먹는다. 이 간단한 문장이 뜻대로 써지지 않았고, 정말 간신히, 그 메시지를 엄마에게 보낸다.
이제는 보다 마음을 다잡고 내면 작업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꿈 기록도 성실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나의 꿈은 분명 무언가를 자꾸 보여주고 있는데, 내가 불성실해서 그런지 계속 외면하는 기분이 든다. 융의 책 중에 읽지 않고 빼두었던 책들을 마저 샀다. '황금 꽃의 비밀'은 읽을지 말지 아직 모르겠다. 지금 읽고 있는 건 융의 세미나를 담은 [꿈 분석, 해석 / 환상 해석, 분석, 강의]다. 환상 이미지도 자주 나타나고는 하는데, 아직 적극적이지는 않다. 어제인가 봤던 환상 이미지는 환공포를 불러일으킬 만한 무수한 구멍들이 벌겋게 나타나며 또 다시 용암 화산?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어떤 공간에 대한 것이었다. 나의 환상 이미지는 너무 휙휙 지나가는 느낌이라, 하나하나 기록하기가 쉽진 않다.
나는 아직 꿈에게 '분석'이라는 말을 붙이고 싶지 않다. 그저 있는 그대로로 일단 받아들이고 싶은데, 그것마저도 쉽게 되는 느낌이 아니라서 그렇다. 이전에 읽었던 [심리학과 연금술]을 오늘 다시 봤다. 왜인지 정리를 한 번 해야 할 거 같은 마음이 있었는데, 혹시나 예전에 꿈에서 아니마가 나에게 '솔리지미르 2회차'를 요청했던 단서를 다시 발견할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컸다. 하지만 이렇다 할 소득은 없었다. 그나마 유사한 단어가 '솔리피카치오'인데, '성년식 참가자가 태양신 헬리오스로서 왕관을 쓰는 행사'라고 융이 알려줬다. 아마 유사하지 않을까 싶은데, 솔리지미르가 분명한 단어는 아니고, 깨고 나서 비몽사몽할 때 간신히 붙잡은 느낌이라 '솔리'까지만 확신을 느끼고 나머진 조금 의심쩍기 때문이다.
며칠 전부터 '혼돈'의 이미지가 계속 맴돌았다. 무의식에 대한 나의 첫 의식적 접근은 아마 도덕경과 장자를 통해서라고 여겨서 그런 거 같다. 20대 초반에 나는 일종의 깨달음을 느끼는 경험을 했었고, 그 후로 줄곧 '자기 자신'으로 생을 살아가는 데 거침이 없었다. 그때의 경험을 묘사한 나의 기록에 따르면, 마치 용암이 들끓어 무언가 폭발하듯 타들어가는, 그런 내적 경험을 아주 생생하게 체험했었다. 이제와서 여러 상징 이미지들이 연결되지만, 분명 내 안에는 '타오르는 불'이 있다. 22년도 3월 쯤 무작정 관악산에 올라 '자기 자신을 태우는 빛'에 대한 깨달음을 다시금 얻고 하산했던 것도, 적극적 명상을 할 때 느꼈던 내 안의 두려움도, 모두 '불'의 이미지였다. 나는 이 불을 창조의 원천으로 삼는 세월을 보내기도 했고, 파괴의 동력으로 삼는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나는 이걸 다시 생명의 원천으로 가져오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 전에, 내가 놓치고 있는 건 바로 '직관'에 대한 나의 태도다. 오늘 융의 책을 읽으면서 '직관'에 대한 접근을 다시금 알아볼 수 있었다. 비유컨데, 나는 무지개 다리를 건널 수 있을 거라고 정말로 믿었던 것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허락된 행위가 아니거늘, 직관 그 자체를 나와 무리하게 동일시했던 게, 현실로 끊임없이 돌아오지 못하는 작금의 상태가 분명해지는 열쇠가 아닐지. 직관은 나에게 너무 강력한 능력이다. 그리고 직관은 충동과 함께 나를 견딜 수 없는 상태로, 그래서 '타들어가는' 상태로 내몬다. 여기서 균형을 맞추지 못했던 건, 이성적 인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집단적 인식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을까 한다.
나는 아직도 인간들이 자신의 투사를 마치 객관적인 현실인양 다루려고 할 때 엄청난 거부감과 부정을 느낀다. 이런 순간일 때 어떤 결정과 태도를 가져야 할까? 상대의 무지를 진지함이라는 이성적 의견으로 내비추려고 할 때, 오히려 나만 과도해지는 덤탱이를 쓴다. 상대는 '장난'이었다고 에두르면 그만이다. 혹은 그냥 재밌자고 한 건데라고. 이런 애매모호한 소통의 문제를, 나는 어릴 때부터 무척 까다롭게 느꼈었다. 인간들은 '재미'나 '장난' '농담'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투사를 아무렇지 않게 써먹고는 무책임으로 일관하는 데 어떠한 죄의식도 갖질 않는다. 나는 그들의 사악함 앞에 너무 취약하다. 재미나 장난이나 농담을 그런 기만으로 써먹는 게 괜찮다고 믿을 수 있는 근거는 도대체 어디서 나타나는지. 솔직히 지금의 내면 작업도 궁극적으로 도달하게 될 '자기 실현' 상태가 이런 인간들로부터 아무렇지 않아질 수 있을지 감히 그려지지 않는다. 나는 그런 인간들과 최대한 '개인적인 관계'를 갖고 싶지 않다. 그들은 개인적인 관계를 갖을 자격이 없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를 한 편에서는 '포용할 수 없는 타인의 면모에 대한 자기 성찰의 부족'으로 가져가야 할지, 객관적인 현실로 '그런 인간들의 상태에 대한 냉정한 거리두기'로 가져가야 할지 혼동스러운 건 사실이다.
융도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세미나에서는 정말 이런 인간들을 극도로 싫어하고 또 이렇게 평가절하한다. 특히 결혼에 대해서도 그런 말을 한다. '결혼'에 대해서는 애초에 융을 읽기 전에도, 융이 말하는 '개인적인 관계'에 대한 상으로 이미 발달을 시켰었지만, 여전히 현실 앞에서는 참으로 까다롭고 쉬운 일이 아님을 새삼 느낀다. '개인'이 될 수 없는 자는 결혼할 자격이 없다고 느끼는 게 나의 본심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 식으로 살아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끊임없이 타협을 하고, 또 '개인'이 될 마음이 1도 없는 인간들을 너무 안좋게만 보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지만 이 문제를 모순없이 해결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나의 정신은 이미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도와주는 게 느껴진다. 나는 '나의 투사'를 거둬들이는 연습을 해야 한다. 어제도 대뜸 친구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고 느껴 사과를 했다. 내가 그 친구에게 나의 열등한 면모를 투사하고 있다는 걸, 이제는 못 본 척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 친구가 실제로 열등한 것과는 무관하다. 그런 면모를 보인 것과도 무관해야 한다. 내가 나의 투사를 거둬들인다는 건, 상대가 나의 투사가 작동되도록 내면의 무언가를 자극하는 면모를 내비추고 있음과 별개로 나의 투사를 독립시킨다는 것이다. 너무 섬세하고 아슬아슬한 느낌이지만, 삶의 이력을 반추했을 때 이걸 해냈던 순간들이 충분히 있기에 못할 것도 없는 느낌이다. 나는 그저, 진정하는 연습을 보다 꾸준히 하면 된다. 그러기 위해 나는 보다 분명한 '집단적 인식'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거 같다.
사람들은 무의식을 뭐라고 생각할까. 사실 융의 무의식을 읽으며 계속 장자의 '응제왕' 이야기가 생각났다. 이 이야기는 인기가 매우 많아 왠만한 사람들은 거진 다 아는 내용일 텐데, 내가 보기에 이건 의식과 무의식의 이야기임이 너무나 분명하다.
남해의 황제 숙儵과
북해의 황제 홀忽이
중앙의 황제 혼돈渾沌과
어느 날 중앙에서 만났다.
혼돈은 그들을 극진히 대접했다.
숙과 홀은 혼돈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상의한 끝에
그에게 구멍을 뚫어주기로 하였다.
사람은 모두 일곱 개의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을 쉬는데
혼돈은 유독 구멍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루에 하나씩 구멍을 뚫어갔다.
그러나 이레째 되던 날 혼돈은 그만 죽고 말았다.
- [장자], 기세춘 옮김, p.193-194, 바이북스
6일 동안의 창조는 일곱 번째 날에 그 정점에 이른다. -St. Hildegarde of Bingen, "Scivias"(MS., 12th cent.) - [심리학과 연금술], 칼 구스타프 융, p.298
남해의 황제 숙은 '빠를 숙, 갑자기 숙'이며 '인간의 검은 면', 유상-상이 분명한 것, '형이하'적인 것들을 일컫는다. 여기서 말하는 '형이하'는 흥미롭게도 '형벌 형' 자를 쓰는 '형이하'이다. 북해의 황제 홀은 '갑자기 홀'이며 망각, 무상-상이 없는 것, '형이상'적인 것들을 일컫는다. 이 둘은 '남-북'으로 나뉘어 있다. 즉, 아래와 위에 위치해 있다. 이때 중앙에는 '혼돈'이 자리해 있다. 혼돈은 일종의 카오스 상태, '무질서'를 의미하는데 사실 일반적인 통념으로 이 혼돈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을 거 같다. 사람들은 대개 '혼돈'이나 '카오스', '무질서'를 무척 범박하게만 사용하는데, 무엇인가 과잉되어 혼란스러운 상황을 '카오스'로 자주 얘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애초에 '혼돈'의 진정한 의미는 의식으로 가닿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그런 우화가 바로 장자의 '응제왕' 편에 실린 내용이다.
숙과 홀이 '중앙'에서 만났다, 그들은 혼돈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 그러자 숙과 홀이 혼돈에게 보답한답시고 '구멍'을 뚫어주기로 (멋대로)결정한다. 사람은 모두 일곱 개의 구멍(칠규)이 있다고 하는데, 여기서 7개의 구멍이란 눈 2개, 코 2개, 입 1개, 귀 2개 다 해서 7개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기세춘의 해설에 따르면 그 구멍이란 얼굴 구멍(귀, 눈, 입, 코) 4개와 하체의 구멍(항문, 요도) 2개 그리고 바로 마음이다. 아마 여기서 일반 사람들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순간 의미 자체가 화학작용을 일으킬 것이다. 마음이 구멍이라고? 이걸 깨달음으로 얻으려면, 생각보다 자연친화적이어야 한다는 게 나의 경험담이다.
여하간 숙과 홀은 혼돈을 '사람'으로 만들고자 구멍을 뚫는다. 여기서 혼돈이 사람인지 아닌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사람이라면 먹고 보고 듣고 숨을 쉬는데' '유독 혼돈에게만 구멍이 없다'고 말하는 대목이 바로 적나라한 '투사'다. 사람에게 있으나 왜 혼돈에게만 없는가 = 혼돈에게도 사람에게 마땅히 있는 게 있어야 한다,는 게 숙과 홀의 투사다. 그렇게 그들은 하루에 하나씩 구멍을 뚫었고, 7일 째 되던 날 혼돈은 죽고 말았다. 우화에서 혼돈이 한 거라곤 그저 '극진히 대접한' 일 밖에 없었는데 말이다.
이 우화에서 이해라는 이름으로 '의식적 접근'을 하는 건 꽤나 쉽지 않다. 애초에 우화 자체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자연 그 자체를 그대로 둬야 한다는 걸 명백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야흐로 21세기는 명실공히 심리학의 시대가 아닌가. 우리는 더 이상 심리로부터 소외되어 있지 않으며, 더욱이 그러지 않도록 요청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서 한 개인은 문자 그대로 '개인'이 되기를 강요받게 되는데,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초인'이 아니라 돌려 말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숙과 홀'이다. 바로 무위의 개인이다. 숙과 홀이 멋대로 구멍을 뚫으려고 하지 않을 때에는 '이해'라는 이름의 의식적 투자가 불필요하다. 그것은 오히려 완전한 상태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혼돈을 죽이고 왜 죽었는지 몰라하는 상태라면, 이해는 더욱 필요하다. 이성의 요청, 계몽의 요청은 언제나 늘 그랬듯 인간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통제하지 못할 때에 비로소 여명의 빛으로 나타난다. 이는 거창한 얘기가 아니다. 자기 자신이 어떤 파멸로 달려가고 있음에도 그런 사실을 몰라 할 때, 아무리 모욕적이라 할지라도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결국 이성이고, 인류는 그런 능력을 발달시켰다.
따라서 해당 우화에서 알아야 할 건, 어째서 '혼돈이 숙과 홀에게 극진한 대접을 하는가'와, 어째서 '숙과 홀은 혼돈에게 보답이랍시고 구멍을 뚫어야만 했는가'라는 희-비극의 역설이다. 앞서 숙과 홀은 형이하-형이상을 의미한다고 언급했다. 이 둘은 정신의 이성 작용이며, 하나는 현실의 '사실들'을 보다 분명하게 느끼는 능력, 다른 하나는 현실의 '추상들'을 보다 형상적으로 느끼는 능력이다. 이 둘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필요한 능력이, 놀랍게도 아니다. 여러 학자들의 조사 및 증언에 따르면, 이 능력은 오히려 우리가 세상을 자연스럽게 살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능력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 능력을 왜 필요로 했을까, 그 돌연변이를 가능하게 만들 임계치-문제 상황은 무엇이었을까에 대한 상상을 21세기에 되살리는 건 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우리가 아무리 역사를 공부한다 하더라도 당대의 '현실'에 대한 추체험을 하지 않으면 그 역사란 그저 현실의 판타지로 전락하듯, 우리 정신의 어떤 능력이 어째서 아무렇지 않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는지를 모른다는 건 인간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구속복으로 둔갑하고 만다. 숙과 홀로 상징화된 인간 정신의 능력은 사실 우리 인간이 어째서 혼돈이라는 무의식으로부터 대접을 받으면서도 죽여버리고 마는지의 비밀을 담고 있다.
7일 째 혼돈이 죽는다는 건, '7일'이라는 상징적 숫자의 정반대되는 '신의 창조'설과 맞대어 볼 수 있다. 많은 이가 알고 있듯, 하나님으로 일컬어지는 천지창조 설은 1일- 밤과 아침을 가르고, 2일- 하늘과 바다를 가르고, 3일- 땅과 식물을, 4일- 태양과 달 그리고 별, 5일- 물고기와 새, 6일- 나머지 동물과 인류, 그리고 마지막 7일에는 창조의 완성을 축복하며 휴식하고 성스러운 날로 정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즉 숙과 홀이 인간 정신을 의미한다면, 인간의 창조 작업은 혼돈을 죽음으로 몰아간 반면, 신의 창조 작업은 혼돈으로부터 세상만사를 창조하는 과정으로 나아간다. 이 대조는 혼돈 그 자체를 '인간'이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보여줄 뿐, 신의 일에는 가닿을 수 없다는 걸 읽어야 한다. 인간은 신이 아니다. 신을 흉내내듯 무언가를 만들려고 한다는 건, 죽음으로 가닿을 뿐이다.
나는 혼돈이 명백히 '무의식'을 가리킨다는 걸 확신한다. 융 또한 무의식을 자주 '자연'으로 빗대는데, 우리 인간은 무의식 덕분에 '자연'과의 연결도, 덩달아 무의식-혼돈을 경유하여 놀랍게도 '신성한 체험'으로도 연결될 수 있다. 다만 인간 정신의 이성 능력인 형이하-형이상은 그런 연결을 상호적으로 가져가는 데 실패한다. 무의식은 이성에게 '극진한 대접'을 해줄지언정, 이성은 무의식에게 어떠한 것도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성은 그런 대접을 받음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겸양을 위해 그 능력을 '분리'시키는 일에 힘써야 한다. 이성의 기본 능력은 '구별'에 있다. 차이를 인식하는 데 있다. 이 차이가 잘못 쓰이는 게 바로 혼돈에게 '인간의 구멍이 없다'는 걸 식별하는 걸로 나타난다. 실제 현실에서 이런 오남용은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너에게 이런 능력이 없으니 개발해야 한다, 사람은 으레 '이래야 하기 때문에' 너 또한 해야 한다는 식의 이성 적용은 양날의 검을 넘어 손잡이조차 쉽게 베이는 '날'인 것이다. '가르는' 행위는 인간 정신에게 허용된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허락된 것처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왜냐하면, 사실 그 행위는 그 반대로 사용하기 위해 고안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숙은 숙의 나라에서 통치할 때라야 비로소 옳다. 홀은 홀의 나라에서 통치할 때라야 비로소 옳다. 그러나 이 둘이 중앙에서 작당을 하는 건 옳지 않다. 천지창조 설과 대조시킬 때 발휘해야 할 '이해'는 바로 이런 대목이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 능력을 적재적소에 맞게 사용해야 비로소 완전함을 이어갈 수 있지만, 그 용처를 분간하지 못하는 게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고 있다. 나는 오늘날 사람들이 무의식을 '의식으로 어찌해야만 하는' 무언가로 말할 때 이런 파멸을 느낀다. 의식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의식 그 자체에 대한 의식에의 작용에만 유효할 뿐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자신의 무의식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기에 그토록 투사를 일삼으며 무책임하게 굴까? 사람들은 자신의 무의식을 이미 혼돈의 구멍뚫기처럼 죽여놓고는 이제 눈앞에 보이는 대상을 향해 구멍뚫기를 해야 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듯 싶다. 내가 이런 우화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이유는, 이것이 문자 그대로 '우화'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놀랍게도 정신에 한해서 '은유'의 힘을 톡톡히 보고 있다. 우화, 그것은 또 하나의 '전이된 정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도 놀랍게도 기회가 있다. 당신이 실수로 죽었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돈만 넣으면, 클릭 한 번이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 구조가 아무렇지 않게 다가오는 건, 우리 정신이 실제로 그런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유희'로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죽음은 놀랍게도 유일한 죽음만이 죽음이 아니다. 혼돈이 구멍이 뚫려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 이야기의 끝은 혼돈의 죽음에 있질 않다. 당신은 보다 더한 대가를 치러야할 수 있지만, 사실 혼돈은 죽지 않았다.
나는 인간이 무의식을 얼마나 가소롭게, 또 함부로 대하는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반대로 무의식을 대상으로 의식적 왈가왈부를 한다는 게 얼마나 오만한 일임을 알아차리지 않을 수 없다. 집단적 인식에 있어 내가 배워야할 점은, 나의 의식적 영역으로 이들의 모든 면모를 '구멍 뚫기'로, '가르기'로 보지 말아야 한다는 데에 있다. 사실 나는 너무나 쉽게 타인의 '구멍'을 발견하고 만다. 그들의 구멍은 너무나 선명하고 분명한 것이어서, 당연히 뚫려야만 하는 것처럼 나 스스로를 얌전히 둘 수가 없을 지경이다. 그러나 그들의 구멍은 문자 그대로 그들의 구멍이다. 내가 그들의 구멍을 뚫는다 한들, 무엇이 달라질까. 당연히 내가 그들의 구멍을 보고 반응하는 순간, 상대방 또한 나로 하여금 당장이라도 구멍을 뚫을 기세로 공격 자세를 취할 것이다. 나는 이런 무의식적 소통에도 이제는 마음을 열어야 한다. 이런 인식들이 쌓이면 쌓일수록 내가 점점 돌부처가 되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걸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지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지금은 이게 맞다고 느껴진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가닿아야 한다. 내가 나의 무의식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이, 이게 최선이지 않을까. 긴가민가하지 말고 용기를 내야 한다. 모든 걸 걸어야 한다. 난 도박에 재능이 있다고 느끼진 않으면서도, 사실 누구보다 도박에 진심이다. 세속화된 도박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모든 걸 건다는 게 무엇인지 체험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상태는 아직 아니다. 사실, 기대하지도 않는다. 지금은 그저, 나의 꿈과 무의식이 나와 어떤 관계를 맺고 지내는지, 느끼는 게 많아졌으면 좋겠다. 나 또한 혼돈을 받아들일 자격이 없다. 혼돈에 대해 왈가왈부할 자격도 없다. 그렇지만 혼돈에게 어떤 걸 하지 말아야 하는지는 너무나 분명히 알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나는 기나긴 싸움을 하는 셈이다. 이 치열한 무력을, 21세기에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