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인의 정신세계]를 읽고

내면 작업 23

by 사과와 돌멩이


25. 03. 22



꿈 근황


#1

반복적인 꿈 중 하나는 아니마가 두 명으로 나와 각각 혹은 같이 관계를 맺는 상황이다. 나의 아니마들은 대체로 무언가를 알려주거나 동행하거나 같이 해주는 역할로 자주 나온다. 엊그제 저녁에 잠깐 졸았을 때는 아니마가 '널 도와주기로 했으니'라는 뉘앙스로 10시 방향에 있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곧 깨어났을 때 시간이 밤 10시가 되어 있을 거라는 강한 확신으로 시간을 확인해 보니 9시 45분이었다.


아니마가 둘로 늘어난 상황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원래 한 명이 나오거나 간혹 둘이 나오지만 그중 한 명과만 관계를 맺었는데 말이다. 아니마가 왜 둘로 늘어났을까? 거칠게 시점을 나눈다면, 작년 인신공양의 여신 제의 꿈을 꾼 이후라 할 수 있다.


#2

다른 하나의 반복적 꿈은 나의 아비에게 감정적 호소를 하는 장면이다. 꿈에서 나의 아비는 간혹 나오는데, 매번 무너진 사람으로 나온다. 그렇지 않을 때는 평범한 가족 분위기로 삽입되어 나온다. 꿈 속에서 나는 종종 나의 아비를 붙들고 처절하다시피 감정적 호소를 하곤 한다. 그 절박함을 전달하려는 어떤 감정의 발현이라는 듯, 매번 나의 마음은 한결같이 '난 아빠를 도와줄 수 있어'다. 그 감정적 절박함이 늘 눈물과 함께 쏟아지는 꿈이 자주는 아니어도 꽤 반복된다. 가장 최근에는 아비가 둘이었다. 그 두 명의 아비는 내게 도와줘야 하는 상태였다. 한 명은 내 현실 아비의 얼굴이었고, 다른 한 명은 나의 오랜 친구의 아비였다. 친구의 아버지는 나의 아비와 닮았다, 하필이면. 알콜중독에 빠져 살았고 어릴 때 친구 집에 놀러가면 어머니는 일을 하러 나가셨고 아버지는 안방에서 술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래서 내 친구도 나와 같게 술을 안 마신다. 친구는 지금 어머니와 둘이서 살고 있다. (여담이지만 올해 초 친구를 몇 년만에 만나 꿈 얘기를 해보니 친구의 아니마는 몹시 망가져 있었다.)


아니마와 함께 아비가 둘로 늘어난 것도 뭔가 연결점이 있는 걸까?









뤼시앙 레비브륄의 [원시인의 정신세계]는 융의 책을 통해 알게 된 저서다. 1921년에 출간된 이 책은 당시 유럽 사람들의 원시인-원주민 부족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바로 잡기 위함과 동시에 그들의 정신에 대한 스티그마를 최소화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학 시절부터 인류학과 생태학 저서, 인간 이성의 중심적 관점에 대한 비판 및 메타 리딩을 탐구해온 바탕이 나에게는 있었기에 소위 백인들의 오만함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당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그들의 반응 또한 어쩔 수 없다는 게 간단한 소감이다. 나 또한 시대적 혜택을 받았기에 이런 관점을 균형이란 이름으로 갖고 있는 것임을 감안하면 더욱 더 그렇다.


언젠가 한 번은 살펴야겠다는 마음으로 이 책을 리스트 우선순위 위로 놔둔 건 문자 그대로 '원시인의 정신'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인류 정신이 어떤 면모를 보이며 지금에 당도해 있는지 그 흐름을 파악하려는 건 내게 대단히 흥미로운 주제였다. 이는 오늘날 도시 사회 속 인간 정신세계를 살피는 데에도 분명 힌트가 될 것이라는 직관도 한몫했다. 특히 이성이라는 거울로 인한 가치 판단들이 그렇다. 따라서 이 책을 보며 느낀 소감을 다소 정제하지 않은 상태지만 일단 적어 둔다.


해당 책은 원시인의 정신이 도대체 무엇인지 파헤치지는 않는다. 장 별로는 사례 나열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대개 중첩되는 내용이지만 서로 접점이 없는-지리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부족 간 문화 속에서 개연성 있는 현상이 나타나는 걸 흥미롭게 살필 수 있다. 그 전에 용어의 주의가 필요하다. 먼저 원시인이란 누구인가? 국어사전 정의를 보면 두 번째 정의에 해당되는 '미개한 사회의 사람'에 가깝다. 여기서 미개하다는 건 그 기준이 산업문명의 도시 사회로부터 수준이 낮다는 걸 의미하고, 돌려 말해 사회가 나아간다는 걸 고려하는 앞으로의 방향성을 가진 가치관 위에서 말해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일반인들이 심심찮게 야만, 원시, 미개 등을 열등이란 이름으로 사용하는 게 기본 통념으로 자리해 있다. 열등은 당연하게도 우월의 거울이다. 인간에게 있어 우월감, 특히 자아의 우월 의식은 고질병처럼 전염병처럼 맴도는 참으로 씻을 수 없는 특유의 면모이기도 하다. 일단 이 이야기는 이후에 다시 다루기로 한다. 여하간 원시인은 그래서 문명인의 눈으로 포착된 대상인 게 가려진 진실이다. 즉, 문명인이기 때문에 원시인을 포착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얼 의미할까? 인류학 저서들이 유행하는(지금도?) 분위기 속에서 부족민의 문화나 관찰 연구 등의 이야기를 문명사회에 보급하려는 의미심장한 의도가 무얼 감추고 있는지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다수의 인류학 저서들은 자성의 목소리를 촉구하는 듯 어떤 비판을 앞세워 책을 출간했다. 문명인들의 오만함, 생태적 무관심, 진보와 발전이라는 폭력성을 견제하고 주의하기 위한 건강한 목적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건 불행 포르노와 같은 접근과 크게 다르지 않아 다소 세련된 화법이 아니다. 자성과 반성을 목적으로 자신과 무관한 현실을 보게 해 무언가를 촉구시키고 자극시키는 걸 으레 해도 된다고 의심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이 오늘날 무수히 많다. 그것이 아무리 저급한 도덕-윤리 소비이든, 참여를 내세우는 강제적 감정 유발이든 자신과 무관한 현실을 난데없이 자신과 유관한 일로 여기도록 부추기는 건 정도가 낮더라도 공격과 마찬가지다.


그래서인지 나는 16~17년도 즈음해서 인류학 책들을 더 이상 읽지 않게 되었다. 하나같이 건강한 이성 사용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그런 책을 찾을 명분도 없었다. 이는 자연-동물, 식물 등 분류된 생명 대상들을 다루는 영상, 글 등의 온갖 콘텐츠들에도 해당된다. 인간의 시선이란 참으로 뿌리깊은 것으로, 만약 이것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한다면 갈 수 있는 곳은 꿈 뿐이라는 게 지금 나의 생각이다. 다만 이에 대해 누군가는 보다 도움되는 사용법을 알려줘야 한다. 나 또한 이를 개발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일단 도움을 주는 학자들의 말을 잘 검토하는 게 수순이리라. 이에 따라 레비브륄의 책은 무척 조심스런 책으로 보인다. 그는 섣불리 원시인의 정신세계를 규명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또 '말할 수 없는 것'과 '말할 수 있는 것'의 시소 타기를 조심스레 하는 섬세함을 갖추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느끼고 건져올린 정신탐구 기록을 남겨둔다. 이하 원주민-부족민들은 해당 책에서 소개된 기록들 속 주인공들이다.





내가 느끼기로 근대 인간의 정신세계는 기틀부터 변모한 인상을 갖게 한다. 그 기틀이란 소위 세계관이라 부를 수 있다. 한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고 느끼고 판단할 때 그 작동 기제가 되는 표상들은 마치 생명활동의 기관과 같아서 그 자체만을 따로 떼어내 사유하기란 쉽지 않다. 인류학의 진정성 있는 모티브가 있다면 아마 '다른 정신세계'에 대한 보다 근거있는 '나타남'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즉, 다른 세계관을 억지로 연결짓는 오류나 기존의 세계관으로'만' 보는 다른 세계관 따위의 언어는 결국 아무리 포장해도 거기서 거기일 수밖에 없다. 다름에 대한 분명한 감각이 결여되면 '인간의 시선'을 답습하는 것이고, 이 자체를 비난하거나 비판하는 건 개인의 몫이지만 그걸 문제의식으로 내세우면서 실상 자신의 자성 능력이 부족한 채로 남들에게만 촉구하는 건 충분히 경계해야 할 일이다.


그만큼 '다른 정신세계'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수준의 정신활동이다. 한 인간이 살면서 다른 정신세계를 가질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을 꽤 오래 갖고 있지만 아직 그런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다. 가치관이 변하는 귀여운 수준이 아니라 진정한 정신세계의 변모는 정말이지 찾아보기 힘들고, 거기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여하간 당시의 백인들-선교사나 인류학자 혹은 일반 선원들 등-이 난생 만나보기 힘든 원주민-부족민을 어떻게 묘사하고 봤는지는 이 글에서 다루지 않지만, 정신세계가 어떻게 다른지를 추출하는 데에는 재밌는 에피소드가 많다.


일단 근대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소위 문명인의 정신세계 기틀은 시공간의 단일화다. 시공간 관념을 '하나'로 바로 잡고 세우기 위해 요구되는 인과론, 논리, 추상, 개념, 개인 등은 주어졌다고 보기 보다는 학습의 결과라는 게 일반 상식이다. 어째서 이것이 학습 가능한가?는 대단히 중요한 힌트를 준다. 대다수 인간들은 교육이라는 명목 하에 수많은 순간들 속에서 알려주고 전달하고 부족민처럼 말하면 '넘겨주기' 때문이다. 가시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아도 한 인간이 무언가를 이해하고 학습해 자신의 생각으로 가질려면 그 바탕에 기틀이 있어야 하고 바로 그로부터 세계관이 형성된다. 만약 이 세계관 기틀 자체가 다르다면 결코 서로(의 정신)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원주민-부족민들의 정신세계에 대한 기록들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정신세계 기틀은, 내가 느끼기로 시공간 관념의 '전체'다. 근대인들이 '하나 위에' 있다면 원주민-부족민들은 '전체에 속해' 있다. 이 차이가 얼마나 막대한 표상 차이를 불러일으키는지 감각하지 못한다면 대체로 다름을 대하는 열등함으로 맞서게 되는 게 일반적인 인간의 관성으로 보인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나는 사람을 볼 때 바로 이 다름을 어떻게 대하는지에서 인격의 성숙함을 포착한다. 애인이나 연인처럼 사적 관계를 맺는 사람에 대해서는 더욱 더 그렇다. 이는 융이 말하는 자신의 무의식과 어떤 관계인지에 대한 나 나름의 바로미터다. 자신과 다름을 자신의 열등함으로 즉각 대하는 인간과의 관계는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으로 참 쉽지 않은 수행을 요구당한다. 그걸 묵묵히 수행하는 나라는 성향 때문에 아무에게나 했다가는 금방 지쳐 나가떨어져버리고 만다. 달리 말하면 '길을 찾아야 한다'. 원주민-부족민들도 이와 별 차이가 없다. 그들 안에서도 인격적으로 성숙한 자들이 무리를 책임진다. 다름을 열등하게 대하는 자는 쉬이 '주술'에 '넘겨진다'. 전체의 시선에서 그런 윤회적 흐름에 넘겨지는 것이다.


원주민-부족민들의 정신세계는 참여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문명인의 눈에 포착된다. 이를 좀 더 다듬으면 '연결'이라는 개념이 그나마 징검다리가 된다. 근대 인간의 정신세계는 개인으로 쪼그라들었다. 즉, 자기 자신 밖으로 나가는 순간 자신과의 연결이 없어진다. 반대로 원주민-부족민에게 자기 자신이란 없다. 오히려 전체 속 '개입(된)'으로 늘 수동적인 행위의 성격이 짙은, 요구되고 주어지고 넘겨지는 등의 코드로 실행한다. 판단 근거, 문명인이 말하는 소위 '동기'라는 것이 어디서 솟는 것인가 하면 원주민-부족민에게 그 우물은 바로 영혼의 세계다. 거기서 모든 것이 샘솟고 영향을 미치고 단단히 묶여 있다. 문명인에게 그것은 생명의 활력이 완전 '죽은' 세계다.


나는 시를 쓸 때도 언어에 대한 일반 감수성에 수동과 피동 같은 코드보다 능동과 자발적인, 자유로운 등이 우선권을 갖고 있다는 걸 매번 느껴왔다. 오늘날 인간들은 왜 그런 가치 판단을 자신의 감정이나 정서의 틀로서 굳게 믿을까? 그게 아니면 왜 낮게 느끼고 판단할까? 하는 문제의식이 나의 시 세계관에 개입되어 있다. 즉 나에게는 일반적인 시-시인들은 '죽은' 상태임에도 나의 판단은 긍정되기 불가능한 시대에 속해 살고 있다고 느껴진다. 원주민들이 '죽었다는' 말을 어떻게 쓰는지 한 사례가 있다.


어느 날 백인들이 섬에 도착했을 때 한 부족민의 이야기를 기록한 내용으로 이는 언어의 장벽과 함께 몹시 귀한 기록 중 하나다.


… 브리티시컬럼비아의 어떤 늙은 원주민의 이야기를 예로… “한 척의 인디언 카누가 할리부트 잡이에 몰두하고 있었다. 짙은 안개가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갑자기 그들은 커다란 동물이 물길을 가를 때 나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즉시 물 깊은 곳에서 괴물이 나타나 자신들을 쫓아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서둘러 낚싯줄을 걷어 올리고 전속력으로 기슭을 향해 노를 저었다. 물속에서 나는 소리는 계속해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순간순간 그들은 거대한 짐승의 아가리 속으로 삼켜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서둘러 기슭에 도달해서 육지로 뛰어올랐다. 그런 다음, 그들은 공포로 목구멍이 거의 막힐 지경에 이르러 괴물이 다가오는 것을 보기 위해 뒤돌아보았다. 갑자기 안개 속에서 이상하게 생긴 사람들은 태운 배가 나타났다. 공포심이 약간 누그러지기는 했지만, 인디언들은 여전히 놀라움에 몸이 굳어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버렸다.

이방인들은 배를 대고 나서 인디언들에게 물고기를 가져오라는 신호를 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은 어깨에 막대기처럼 생긴 것을 메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그는 막대기처럼 생긴 것을 날아가는 새 쪽으로 돌렸다. 엄청난 폭음이 들리더니 새가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인디언들은 ‘죽었다.’ 다시 살아났을 때, 그들은 서로에게 죽은 사람들이 있는지, 그리고 각자 어떤 느낌이었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때 백인들은 불을 피우라는 시늉을 했다. 인디언들은 곧바로 일상적 방식대로 2개의 나무 막대기를 문질렀다. 이방인들이 웃기 시작하더니,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마른 풀 한 줌을 쥐고 그 아래에 무슨 가루 같은 것을 놓더니 불씨를 지폈다. 곧 다시 폭음이 나더니 일순간에 불이 피어올랐다. 인디언들은 ‘죽었다.’ 그런 다음 새로 도착한 사람들은 생선을 굽게 했다. 그래서 인디언들은 나무로 된 사각 바구니 하나에 생선을 넣고, 불 위에 얹어 데운 돌을 용기에 넣어 생선을 익혔다. 백인들은 이 방법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배 안으로 가서 백철로 된 냄비를 찾아와서 거기에 물과 생선을 넣더니, 이상하게도 그것을 직접 불 위에 얹었다. 인디언들은 놀라운 눈으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냄비가 타지도 않았고 물이 불 위로 끓어 넘치지도 않았다. 그때 인디언들은 다시 한 번 더 ‘죽었다.’ 이방인들은 생선을 먹고 나서 냄비에 쌀을 담아 불 위에 얹었다. 인디언들은 ‘악샤혼, 악샤혼(벌레다! 벌레다!)이라고 낮게 소리 지르면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쌀이 익은 다음 백인들은 약간의 당밀을 쌀에 섞었다. 인디언들은 눈이 휘둥그렇게 되더니, 죽은 사람의 기름이야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백인들이 그들에게 당밀을 넣은 쌀을 나누어 주었다. 하지만, 인디언들은 혐오감에 가득차서 뒷걸음질을 칠 따름이었다. 이를 본 백인들은 자신들의 선의를 증명하기 위해 앉아서 그것을 직접 먹었다. 이 광경은 인디언들을 대경실색하게 했으며 모두들 다시 ‘죽었다.’ 백인들은 다시 여러 가지 기적과도 같은 일을 했으며, 매번 인디언들은 스스로 ‘죽음’이라고 불렀던 엄청난 경악에 사로잡혔다.

P. 486~487


문명인들에게 '죽음'은 우선 생명활동의 끝이다. 즉 자신이 죽었다고 말할 때는 논리적 오류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징의 의미로 스스로 죽었다고 말할 때는 그것이 어떤 맥락을 갖는지와 상관없이 개인-개성의 죽음을 가리키는 게 최선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의 사례에서 원주민들의 '죽었다.'는 도무지 와닿지 않는 표현일 것이다. 그나마 '엄청난 경악'이라고 말하는 게 최선이기도 하다. 경외의 진정한 감정을 문명인이 느끼기엔 다소 불리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나마 언어로 표현한다면 저기서 원주민의 '죽음'은 세계의 전복으로부터 끊긴 자신의 연결이다. 원주민들은 백인들을 자주 유령, 혼령, 신의 사람 등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피부가 하얀 것과 상관없이 그들이 신적 능력을 아무렇지 않게 행하기 때문이었다. 즉, 그들은 레비브륄의 표현대로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온 존재들이다. 그들의 정신세계는 문명인의 정신세계처럼 단일한 시공간이 아니다. 존재들도 마찬가지다. 만약 당신에게 혼령의 존재가 눈앞에 나타나 각종 힘을 행사한다면 당신은 그 존재를 어떻게 마주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이 존재는 꿈과 전조의 세계에서 자신들에게 말을 건넸던, 세계 너머의 세계에 있던 존재들이다. 문명인에게 그나마 가까운 존재는 외계인일 것이다.


세계의 붕괴란 곧 한 인간 정신세계의 붕괴다. 엄밀한 의미에서 세계의 붕괴는 존재하지 않는다. 늘 자기 정신의 붕괴다. 이때 코드는 '인식 밖에 있는 것의 현존'이다. 원주민-부족민들은 이 감각에 대해 우리 문명인보다 훨씬 월등해서 그 현존 앞에 스스로를 내놓을 수 있다. 반면 문명인은 이때 열등함이 건드려져 밖의 세계를 정복하거나 지배-통제하고 싶어 한다. 같은 인간으로 분류되지만 서로 이렇게 다른 이유는 무엇때문일까? 내가 느끼기로, 무엇보다 문명인의 화법으로 말한다면 자신이 한낱 피조물이라는 엄격함이 끊겼기 때문이다. 개인으로 내동댕이 쳐진 인간은 더 이상 자연으로부터 그 엄격함을 길어올릴 수 없기 때문에, 종교에 의탁하지 않는 이상 스스로 그 엄격함을 길어올릴 수 있는 능력을 다시 개발해야 했다. 그 더딘 여정의 유산이 오늘날 여러 종교, 수행 등의 면모로 남아 전달되고 있다. 이는 생명체의 감각세계가 갖는 지각의 기본이자 한계, 능력의 정체이기도 하다. 부족민들의 조상 숭배나 토템, 고대 종교와 현대 종교간 차이에 있어 코드는 별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인간에게 왜 '피조물' 따위의 감각이 정향될까? 하는 건 논리적으로 밝힐 수는 없겠으나 생명체의 관점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벡터 값이다.


즉 생명 정향으로 봤을 때 '죽음'은 자기 밖의 만남이다. 이 넘나듦이 가능해진 건 내가 유추하기로 인간뿐만이 아닌 생명들의 살고자 하는 본능으로부터다. 이를 근거로 삼게 도와주는 저자들이 많다. 워쵸프도 그 중 하나다. 원주민-부족민들의 각종 행태들은 이를 더욱 자명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들의 여러 풍습, 현대인들이 끔찍하게 여기는 영아 살해나 머리 사냥, 할례, 각종 인신공양 등은 문명의 시선으로 보면 악습이자 미개한 열등한 인간 관습이다. 그러나 그 행위의 표상이 다를 뿐 현대인들이라고 해서 다른가 하면 나는 별 차이가 없다고 느껴진다. 오늘날 인간들도 똑같다. 열등함을 대하는 알러지 반응이 거세진 건 문명인의 특징이지만, 자기 정신밖의 일을 대하는 반응은 별 차이가 없다. 원주민-부족민들의 풍습에 '살해'가 있는 건 생명의 죽임으로 인해 자신들의 생명연장을 도모한다는 게 백인들의 해석이었다. 즉, 죽이지 않으면 자신들이 죽는다. 이 논리는 현대 전쟁 논리와 다를 바가 없다. 실제로 그들이 죽는가? 하는 인과론적 관점으로 보면 원주민-부족민의 반응은 설득력을 얻을 수 없다. 꿈에서 자기를 죽이려 하는 마을 친구가 나타났다고 실제로 그 친구를 먼저 죽인다고? 하면 문명인들은 그 누가 '당연하지'라고 느낄까? 그 누구도 멍청한 짓, 말도 안되는 짓, 정신병 의심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세계관이란 그런 것이다. 세계관의 필수 자세는 바로 '믿어 의심치 않으리라'다. 문명인이든 원주민-부족민이든 모두가 그렇게 산다. 자신의 세계관을 의심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이지 손에 꼽을 정도로 몹시 위험한 사태다. 철학적 의심이나 반성도 진정한 세계관 의심 앞에 귀여운 호기심일 뿐이다. 인간에게 믿음이란 단순히 믿는다는 말이 아니라 정신의 전체가 개입되는 사건이다. 종교의 믿음도 그 안에서 진정한 믿음이 얼마나 희귀한지 종교인들은 날마다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왜 세계관을 필요로 하는가는 나 역시 가설만 붙들고 있을 따름이다. 정신으로 산다는 것, 이 정신으로 환경에 적응한다는 것.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현대인이든 원주민-부족민이든 자기 정신의 믿음은 동일하다. 핵심적인 차이는 내용에 있다기 보다 그런 내용을 유도하는 기본 자세랄까 하는 기틀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본래 시공간이 하나가 아니었던 인간들의 세계관에서는 영혼의 존재가 생명의 흔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 부족민의 안부 인사는 '자네 살아있나?'라고 한다. 한국인이 '밥 먹었어?' '잘 지냈어?'를 안부 인사로 갖고 있는 것과 같다. 살아 있음을 묻는 건 영혼의 호명으로 보인다. 여기서 영혼이란 전체와의 연결이 끊기지 않은 존재의 호명이다. 원주민-부족민들이 백인들의 관습과 교육을 받자 자기 부족에서 오염된 존재로 거부된 사례 또한 많다. 이는 생명 원천의 오염에 버금가는 일종의 '죄악(사과)'이다. 그 의미 역동은 단어에 있질 않고 일종의 파급력에 있다. 무엇에 대한 죄악인가? 어떤 금기를 어긴 것인가? 그 바탕에는 숨쉬듯 기존의 정신세계관을 지탱하기 위해 일상적으로 하던 행위들에 있을 것이다. 유리의 작은 금 하나가 점차 퍼져 순식간에 전체 금이 가버린다는 걸 직관적으로 알았던 것이다. 그만큼 정신세계의 기틀이란 유지보수가 어렵다. 이 특징이 학습의 근거이기도 하다.


따라서 인간은 유아에게 학습을 제공(강요)하고 자기 사회의 일원으로 거듭나도록 유도한다. 이는 부족과 현대사회 둘다 마찬가지다. 자신 또한 그렇게 유도되어 스스로 자신의 세계라고 믿기에 가능하다. 이 순환은 말그대로 자연스러운 일이기에 그 누구도 이를 '다르게' 여기지 않는다. 소위 반항이나 반문화 등은 진정한 다름 앞에 귀여운 수준이다. 나아가 원주민-부족민들 또한 자신이 원하는 게 거부당하거나 이뤄지지 않았을 때 감정적 반응을 당연히 내보인다. 이는 문명인들도 마찬가지다. 특히 투사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심리 욕구를 투영해 밖으로부터 이를 바랄 때 감정적으로 대응한다. 정치는 그 현장의 축제다. 문명인들이 인류학이라는 이름으로 원주민-부족민에게서 무언가 배운다고 한다면 그건 생태적 겸손함이나 이성의 오만함에 대한 자제력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정신세계에 대한 보다 문명인다운 자각일 것이다. 자기 환경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생명이란 애초에 주어지지 않았다. 어떤 인간도 자신과 무관한 무언가에 정신이 믿음으로 대응되어 움직이지 않는다. 사회의 발전 정도를 떠나 인간은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원주민-부족민들은 자신들의 생활과 무관한 일에 대해 어떠한 관심도 갖질 않는다. 그런 그들에게 생태적 관심을 배워야 한다는 건 문명인의 오만함 중 일부다. 도덕과 윤리라는 이름으로 감정적 실천을 유도한다는 건 애초에 잘못된 접근이다. 인간에게 감정적 실천이 생겨나는 건 자신이 주어진 환경에 그만한 믿음을 갖고 있다는 상징이다. 즉 그 밖으로 무리해서 이끌어내는 건 정신세계관의 유지보수 입장에서도 그렇고 생명체의 환경 적응에서도 그렇고 지속되기 힘들다. 어떤 인간도 자신과 무관한 걸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눈 앞의 인간에게 그러한 걸 요구하고 강요하는 게 자연스럽다. 따라서 오늘날 확장된 세계-이미지 앞에서 무수한 관심 요청은 단순히 '인간은 원래 그래'라고만 퉁치기보다 1. 인간은 자신과 무관한 일에 맞지 않다와 2. 인간은 자신과 관련된 걸 다른 인간에게 요구한다가 동시에 작동되어야 한다. 1, 2번은 원주민-부족민과 현대인 간 공통분모이고, 이 둘의 '동시 작동'은 오늘날 인류세에게 새로이 주어진 도덕 명령이다.


아마 당연히 인간 일반은 둘 다보다는 하나만을 취할 것이다. 이는 정신의 용량 한계로 실험을 통해 밝혀지기도 했는데, 과도한 자극이 결국 돌연변이를 낳듯이 시대는 우리에게 이런 변혁을 요구하고 있다.


원주민-부족민의 꿈에 대한 태도는 '믿어 의심치 않으리라'의 현장과도 같다. 그들은 꿈에서 무언가를 보면 꿈에서 깨어났을 때와 구분짓지 않고 즉각 실행하려 한다. 꿈에서 마을 사람이 자신에게 물고기를 줬다면, 꿈에서 깨어나 그 사람에게 물고기를 요청한다. 그러면 그 사람은 당연히 물고기를 준다. 꿈에서 한 여자와 성관계를 맺었다면 깨어나 추장에게 말해 실제로 결혼이 성사된다. 불륜이나 배신은 죽거나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는다. 문명인은 이를 보면 당연히 '구라치면 되지 않아?'라고 즉각 생각이 들 것인데, 바로 그 지점이 세계관 기틀인 '개인으로 내쫓겨진 증거'이다. 문명인들은 속이기에 어떠한 불편함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오늘날 거의 소실되다시피 한 '양심'이 '영혼'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는 아주 중요한 것이다. 자기 정신의 속이는 일, 자신의 욕구를 위해 다른 정신을 속이는 일이 '정신'에 얼마나 해로운지 문명인들은 벌을 받지 않아 모른다. 오히려 보상을 받는다고 착각한다. 그들은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들먹이기 좋아하는데, 그저 자신이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내보이는 감정적 반응일 뿐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원주민-부족민들은 이 '기만'으로 사라져갔다.


융이 자신의 책에서 이 책을 거론하며 풍긴 뉘앙스는 바로 이 꿈에 대한 원주민들의 태도에 있다. 그 진실성. 순수함. 올곧은 믿음. 그 힘이 바로 정신과의 관계력이다. 자신을 속이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정신과 나아가는 관계를 맺는다. 부족민들에게서도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젊은 청년들이 자신의 보호정령을 갖기를 원하지만 이는 100명 중 1명만이 가질 수 있을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단식을 감행하기도 고문을 자처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오늘날 도시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특히 한국에서는 '서울 사람들은 눈 뜨고 코 베어 간다'는 말이 기성 세대에게 있었을 정도로 사람간 신뢰나 믿음이 불가능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타인에 대한 불신은 둘째치더라도,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마저 무너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다. 정신은 자기 정신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원주민-부족민들은 한 사람의 꿈이 그 사람만의 꿈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이 태도 밑에는 '우리는 전체다'라는 기틀이 지탱되고 있다. 무엇보다 전체라는 말 속에 '속하다'는 태도가 있기에 잘못된 아트만 개념처럼 비대해지지도 않는다. 문명인에게 있어 '왼쪽과 오른쪽을 동시에 본다'는 말처럼 모순인 '전체이자 하나인' 격언은 원주민-부족민들에게 그다지 어려운 태도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저 세계관 기틀이 다르면 될 뿐이다. 현대인에게는 좀 어려운 숙제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인과와 합리, 이성을 없던 것으로 치부할 수도 없기에 다소 번역이 필요하다. 나는 스스로 이걸 '자신을 내려놓기와 자신으로 내놓기'로 실천하며 살고 있다. 어쨌든 문명인-도시인-현대인은 '개인'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시대적 환경에 순응해야 한다.






돌고 돌아, 해당 책을 읽으며 내 꿈을 다시 보게 됐다. 내 꿈에 아니마가 둘로 나타나기 시작한 건 무슨 일일까? 나는 꿈을 정신과의 관계로 여기고 있다. 다만 깨어있는 동안 이를 자주 연결시키지는 않고 있다. 왜냐하면 아직 그 의미를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 부족민처럼 내 꿈을 진실로 대해주는 사회 분위기도 아니다. 즉, 밖으로 연결시킬 수 없다. 다만 아니마는 늘 날 도와주거나 뭔갈 같이 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일이 틀어지지는 않았는데...라고 생각할 뿐이다.


오늘 꿈에서는 군대 꿈을 꿨다. 군대라는 특징상 남자들만 나오기에 나의 페르소나들로 보기 쉬운데, 내가 유일하게 먹지 않는 오이를 먹겠다고 챙겨달라는 선임이 나오는 꿈이었다. 왠지 나는 오이를 먹어야 하나 싶다. 이런 미신을 미신으로만 여기지는 않는다. 나는 현대인답게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라고 교육받았으며, 동시에 꿈은 현실이고 현실은 꿈이라고 학습받았다. 이 둘을 넘나드는 세계관을 '학습'한 나라는 개인이기에 어쨌든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생각해봤다. 아니마가 왜 두명으로 나올까. 퇴폐적이거나 지혜로운 식의 코드화는 전혀 나타나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나마 외할머니가 한 젊은 여자의 길을 알려주라는 식의 꿈이 구분된 아니마다. 그 아니마는 안양으로 가고 싶어 했다. 안양 평계 054-0124? 같은 지번이었다. 현실로 안양 평계라는 지역은 없었다. 안양도 살면서 별 연관이 없었다. 지금 최선은 거대한 존재의 아니마가 한 개인에 다 담기지 못해 둘로 나타나는 건 아닐까 하는 판단이다. 그렇게 보면 내 아니마라는 나의 여성성이 더 커진 것으로 보게 된다. 그리고 이 여성성을 보다 친숙한 존재로 다룰려는 내 정신의 시도라고 말이다.


또한 아비를 향한 나의 감정적 호소는 보다 분명하다. 나는 나의 일-시를 쓰는 일-에 보다 더 집중해야 한다. 그걸 내 정신은 말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실천을 잘 안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아비의 대상이 둘로 늘어난 걸까? 꿈에서 나는 버겁단 느낌은 아예 없었고 오히려 나의 말을 이해 못할 거 같다는 걱정과 동시에 어떻게 말해야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들 뿐이었다. 즉 어떻게 도움을 줘야 하나 고민하고 말하는 데 집중하고 있지 부담스럽거나 피하고 싶거나 하는 도망-비겁의 코드는 아예 없다. 즉 나의 무의식이 나에게 건넨 메시지를 내가 잘 받는다면 그건 바로 '용기를 가져'다.


원주민-부족민에게서 내가 본받을 만한 지점은 바로 꿈에 대한 믿음의 실천이다. 융은 이를 온갖 책에서 언급했는데, 다시금 환기가 됐다. 과연 나는 내 양심에 나를 잘 넘길 수 있을까? 할 땐 해도 항상은 아직 잘 안 하는 것 같다. 어떻게 될지.


(아래는 몇 년 전 듣던 곡인데 책 읽다 생각났다)



https://www.youtube.com/watch?v=A-bWhuIFZ3U&list=RDA-bWhuIFZ3U&index=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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