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 작업 29
25.05.12
꿈 요약
자기 실현 만다라를 겪고 난 이후 내 꿈은 양상이 조금 변했다. 이전에 반복되던 어디론가 향하지만 도착하지 못하는 미로같은 여정의 장면, 무의식의 상징들이던 지하, 어둠, 물, 벌레 등등을 받아들이지 못하던 장면들이 이제는 진행된 다음 국면으로 펼쳐진다.
현재 내 꿈들은 2갈래를 보여주는 거 같다. 하나는 두 번째 아니마와 어떻게 통합할 수 있을 것인가? 다른 하나는 보다 분명하게 나타나는 나의 열등을 실현된 자기로 다시금 어떻게 통합할 것인가?
꿈에서 나라는 자아의 윤리는 보다 정교하게 잘 작동 중이다. 또 꿈에서 나타난 공격성(남자)와 열등함(여자)를 감응하는 장면도 나타난다. 즉 치유자로서의 면모가 나타나기도 한다. 또 자꾸 여자친구든, 사촌동생이든, 막내 이모든 내가 요리를 해주고 싶어하거나 뭔가 먹는 걸 주고 싶어 한다. 내가 현실에서 이런 '주는 마음'에 대한 실천을 잘 순환시킨 지는 꽤 오래 되어 꿈에서도 그런 나의 면모가 매우 매끄럽게 활용되는 거 같다.
자기 실현 이후 개인이 된 나는 어떤 정신 여정을 펼쳐갈까, 이전에 궁금해 했던 적이 있다. 직감으로는 이런 여정의 나선성을 알기에 뭔가 '이성'적인 시간성을 구조로 갖고 있는 게 아니란 건 분명히 알고 있었다. 난 21세기 사람으로서 도시에 사는 시민이기도 하지만, 정신 작업의 용어를 융의 개념들로 의식하고 언어화하고는 있지만 전체적인 흐름은 표현이 다르더라도 어떤 유사성 위에서 펼쳐지는 다양성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다. 따라서 자기 실현을 통과한 지금의 내 앞에 당도한 것들은 나의 시 태도이기도 한 '같지만 다른' 국면들의 '시작'이다.
오늘 꿈에서 '렙틸사-13%'라고 적힌 어떤 약병을 사촌동생이 먹으려 고르는 장면이 나왔다. 이 렙틸사라는 건, 마치 추락사, 안락사와 같은 한 죽음의 방법이자 원인-이유의 표현이다. 즉, Reptile = 파충류 → 원초적 본능, 생존, 감각 신경계, 뇌간(파충류 뇌) + 사(死)다. 이는 나의 자기 실현 만다라에서 나타났던 내 오른쪽 어깨 위에서 둥둥 떠다니던 '뇌마뱀'을 연상시킨다. 돌멩이와 대화하면서 풀어낸 '렙틸사-13%'라는 상징 문구는 다음과 같다. '살아 있는 자로서 죽음의 회로를 걷는 일'.
무의식이 내게 준 일종의 '다음 자격-기준'은 '한 번 죽었던 자만이 할 수 있는' 자격이자 기준이다. 즉, 난 준비가 되어 있으나 이제 그 실천을 하기 전 단계에 와 있다. 실천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걸 할 수 있게끔 날 훈련시키고 예행시키는 게 내 무의식의 노고다. 어릴 때에는 혼란스러웠던 그런 인식 태도이기도 하다. 일반 사람들, 특히나 정신 작업이나 자기 작업에 어떠한 관심이나 노력을 하지 않은 일반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노라면 이런 인식 태도를 유지하기란 몹시 위태롭게 느껴졌었다. 난 이걸 충돌로 느꼈었고, 결국 균형을 잃고 한 번 도망치는 선택을 했었다. 사람들은 왜 자기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가? 왜 자기 정신을, 자기 말을, 자기 행동을 인식하지 못하는가? 그런 '눈'의 부재가 내게는 세상살이를 괴롭게, 고통스럽게 만드는 결정적 실존 결함이었다.
자기 실현을 겪고나서 나의 눈은 다시금 선명해지기 시작한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걸 내 무의식이 날 준비시키는 거 같다. 가만 보면 난 20대 초반부터 나 스스로를 발달시키는 데 갖은 애를 썼다. 정신 발달을 위해 내가 가진 모든 자원을 다 끌어다 쓴 셈이다. 당연히 트레이드 오프로 돈 버는 능력이라든지 일반 사람들의 소비적 삶이라든지 가치관, 집단 정신에의 동화 상태 등을 모두 포기했다. 내가 나를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어떤 신념이나 믿음이 아니라 그저 '현실'에 대한 감수성, 그리고 정신과 생명에 대한 존중심 덕분이었다. 이걸로 세상을 믿을 수 있고, 사람을 믿을 수 있고, 다른 생명과 다른 대상-존재들을 믿을 수 있다. 그 위에 세속적인 가치관을 얹어도 위배되거나 충돌되지 않게 요구되었던 여러 철학, 사회학, 문화, 역사, 언어 등등의 '이성'을 퍼즐 맞추듯 꾸준히 메워나갔다. 지금 내 앞에 놓인 여정은 이걸 거꾸로 매달리듯 반대로 다시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감각'으로 자기 실현에 당도해야 했던 거 같다. 그 다음은 감정이다. 나의 열등들을 나로서 통합해야 하는 중심 이후의 안정화랄까. 재배치랄까. 나는 감각이 몹시 열등한 사람이다. 그래서 열등한 만큼 다채롭지 못하고, 다채롭지 못한 만큼 그 수준에 맞게만 하면 된다. 정신 기능의 열등과 우월은 굳이 융의 용어가 아니더라도 21세기 사람들에게 보급될 필요가 있는 자기 인식의 무게 중심 중 하나다. 나로 빗대 설명하면, 난 직관과 사고가 자주 쓰는 '주 손'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이 정신 기능을 잘 안 쓰는 사람에게 버겁게 느껴지거나 '충분'하다고 느껴지는 게 나에겐 부족하고 여력이 느껴진다. 반대로 나의 가장 열등 기능인 감각은, 만약 감각이 '주 손'인 정신에 비하면 무척이나 '금방 충족'된다. 열등하기 때문에 보다 더 다채롭고 세밀한 충족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고, 실제로도 그렇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상 경험을 통해 대충 눈치는 챌 수 있겠지만, 우리가 '오감'이라고 부르는 신체 감각 기능들은 대개 '이성화'되어 매우 미세한 차이를 감지할 수 있는 민감도 발달이 가능하다. 미각도 후각도 청각도 시각도 촉각도 의식화-언어화를 꾸준히 하면 어느 정도 발달이 가능해진다. 맛, 냄새, 색깔, 음악, 접촉 등등을 '정신'으로 발달 가능하다는 의미다.
나의 감각이 열등하다는 의미는 둔감하다는 의미가 아니란 뜻이다. 정신의 어떤 기능이 열등하다는 건, 그 기능을 잘 쓰지 않아도 될 만큼 보조적이라는 의미에 가깝다. 그러나 때로는 그렇기 때문에 심리적 열등함과 자주 연결된다. 예를 들어 나는 어릴 때 춤을 잘 추고 싶다는 어떤 낭만성을 품으면서도 실제로 춤을 출 기회가 있을 때 쭈뼛쭈뼛거렸다. 만약 그런 몸을 쓰는, 동시에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야 하는 순간이 오면 얼마나 위축되고 쪼그라들 수밖에 없는지는 아마 개개인마다 각기 다른 상황으로 겪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정신 기능의 열등함은 곧 심리적 열등함과 잘 연결되고,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은 그렇게 결합된 '현실 상황'에 자아의 반응 체험을 겪으며 보다 구체적인 장면으로 정신에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정신 발달이란 이런 기능을 다른 기능으로 혼합해 쓰는 게 아닌 오직 그 기능으로만 쓰는 연습을 하는 걸로, 난 이해한다. 어쨌든 '정신'이란 늘 총체적이고 전체적인 활동을 시시각각 펼쳐내므로 이런 발달을 의식적으로 하려면 자기 상태에 대한 관찰 능력이 필히 요구될 수밖에 없긴 하다. 워쵸프의 개념을 빌려 말하면 전체->부분을 하는 과정이다. 내가 20대 때 세상과의 충돌로 느꼈던 사람들의 '자기 인식 불능'이 정신에 내재된 기본 능력이 아니라는 걸, 사실은 인정할 수 없었던 나의 열등함과도 연결된 실존 체험이기도 하다. 즉 나도 처음부터 할 줄 알았던 게 아니고 삶이라는 우연성과 결합되어 꾸준히 발달시켜나간 여정의 결과다. 당연히 20대를 다 보내고 나서야 이런 과도함을 하나둘 알아보고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구체적 타자들을 예전보다는 더 확장된 다양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정신이 되었다. 다만 이 여정에서 내가 통과한 '자기 실현'으로의 어떤 '길'은, 나라는 고유성의 입장에서 봤을 때 '감각'이었던 것이다. 사고나 직관이 아닌 오직 감각으로만.
난 20대 때 직관이나 사고 발달은 말할 것도 없고 감정 발달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었다. 그래서 스스로 '자만'하기로, 난 감정이 열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일반 사람들의 표현으로라면 T가 F를 흉내내는 꼴이다. 엄밀히 말하면 난 사고 기반의 감정 발달을 수행해 남들보다 감정이 다채롭거나 공감 능력이 클 수는 있어도 '감정 기반'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래서인지, 자기 실현 이후의 내 정신 여정에 있어 나의 무의식은 이제 '오직 감정으로만' 하라고 제안하고 있다. 스스로를 알아보기로 '난 아닌 거 같은데?'같은 자승자박이 제일 어려운 난관이다.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는 상태를 어떻게 볼 수 있는가는, 마치 무에서 유를 이끌어내야 하는 극악의 창조 난도를 가리키기도 한다. 누군가는 평생 할 수 없고, 누군가는 그 '기술'을 알아 적당한 대가를 치르고서야 할 수 있다. '손쉽게'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여태 배운 '세계' 안에 자기 관찰이 '손쉽다'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건 악마의 속삭임이라는 게 거의 정답처럼 제출되고 있다.
감정은 불을 다룰 수 있는 능력같다. 내가 작동시킬 수 있는 현재 내 자기 관찰로 보면, 난 내 불이 너무 뜨거워 늘 조절하지 못하고 넘치거나 크게 번져 결국 아예 불을 키지 않으려는 어떤 '검열'을 게이트 키퍼로 세워둔 상태 같다. 내 안의 에너지가 얼마나 큰지 내가 감당하지 못할 것만 같은 어떤 휩쓸림을, 나의 직관이 미리 알려주는 경험은 내 삶에 수두룩하다. 20대 때는 감정 발달을 그래도 수월히 했지만, 문제는 역시 '실제 현실'과의 통합 문제, '나의 열등'과의 통합 문제 앞에 결국 도망을 쳤었다. 즉 나는 내 감정을 조절하고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는데 왜 다른 사람들은 감정에 스스로를 내어줄까, 잡아먹힐까, 지배당할까를 못 견뎌 했던 것이다. 감정에 휩쓸리는 인간들은 꼭 그 감정이 지나고 나서야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정신 상태가 변했다. 난 그런 양면성을 '하나의 인간'으로 바라보는 데 늘 실패했다. 그러니 그런 어두운 면모의 인간을 받아들이길 포기하고 나의 열등과 만나 부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린 나는 '난 되는데 저 사람은 왜 못하지?'라는 차이의 분별로 가치 설정과 연결되었던 것이다.
살아 있는 자로서 죽음 곁에 같이 살아간다는 것, 감정으로. 이제 나는 이 감정의 통합을 위해 힘을 기울일 차례다. 다룰 수 있고 감당할 수 있는 상태로 이제 자유롭게 꺼낼 수 있어야 한다. 윤리 발달을 너무 많이 해 버린 나라는 인간 정신에겐 꽤나 허들 높은 여정이지만 그래도 그 방향임에는 틀림없다. 나의 두 번째 아니마는 내게 '감정'을 시험시키려 하는 거 같다. 내가 꿈에서 감정이 격해지는 순간은 아직 아빠뿐이다. 아니마를 향해 감정이 전면에 나타나는 꿈 장면은 여태 한 번도 없었다. 20대 때 포기했던 이 좁은 문을, 다시 열고 통과할 수 있을까. 자기 실현을 통과한 이후이기에 나의 무의식은 지금의 내가 준비되었다는 건지 막 보여준다. 아마 그 전에 해야 할 걸 해야 했다면 이런 걸 보여줄 차례가 아니라는 걸, '주어진 세계'라는 그 태도에 대한 존중심을 느낀다. 며칠 전 내가 융을 읽기 전 우연히 기록했던 20대 초중반 꿈을 다시 봤었다. 아직 자아 발달도 진행 중에 있었기에 꿈 속에서 난 유약한 자아의 면모가 드러나고 나의 그림자-니그레도-나의 열등함을 받아들이는 건 둘째치고 알아보지도 못하고 있는 꿈의 내용이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의 내 정신은 참 많은 여정을 겪고 통과한 상태다. 지금 내가 정신을 기울여야 할 '감정'이란, 결국 내가 그동안 발달시킨 나의 총체로서 어떤 외줄타기와 같은 균형으로 행하는 감각이다. 오직 감정으로 하기 위한 준비로, 나의 감각은 이제 자유롭다. 내 정신에 있어 가장 열등한 건 감각이지만, 내가 시를 쓸 때 제일 힘을 기울이는 건 감각-리듬이기도 하다. 또 난 그걸 잘한다. 맛 좋은 리듬이 나오면 난 매우 만족감을 느낀다. 열등하다는 건 이런 거다. 잘 못하는 것도 아니고, 둔감한 것도 아니고, 마치 성적표처럼 등급이나 수준이 낮은 게 아니다. 정신이란 총체의 역동을 그런 '이성 언어'로만 판단하는 건 정신을 더 어렵게 만드는 꼴이다. 난 이성이 열등한 사람을 꽤나 버거워 하지만, 그래서 남자들이 열등한 이성을 갖고 논리나 사고를 발휘하는 면모를 받아들이는 게 꽤나 버겁고 막대한 에너지를 소모하게 되지만, 사고가 열등하다는 건 기본적으로 그런 '사고'로 뭔가의 정신 에너지를 순환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이런 흐름을 이해하면, 자신의 열등함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상대의 열등함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또 어떻게 이런 것들을 '순환'이라는 흐름의 수준 높은 교감을 이뤄낼지 감이 온다. 나의 열등한 감각이 시를 쓸 때 제일 뛰어난 기준이 되는 것을, 난 그렇게 알아본다. 이제 난 감정을 응시하고 있다. 같지만 다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