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계절

내면 작업 30

by 사과와 돌멩이


25.06.01



4월 21일부터 시작된 무의식 활성화 주기가 얼추 끝난 거 같다. 약 한 달간 진행되었던 이 활성화 시기가 점차 끝났다는 걸, 난 '꿈이 기억나지 않는다'로 판단한다. 그나마 기록할 수 있을 정도로 선명했던 마지막 꿈은 5월 22일이다.




꿈 (25.05.22)


앞 장면이 있었던 거 같은데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난 어디 지방 도시에서 엄마에게 가려는 상황 같다. 이른 아침이다. 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정지 신호를 받아 딱 내 앞에서 멈추게 되었다. 내가 가야 할 길은 전방에서 우회전이었고, 난 앞으로 그곳을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충돌사고가 났다. 뒤의 차가 앞의 차를 치고 뒤에서 오던 차도 박는 식의 교통사고였다. 난 그 장면을 보고 속으로 ‘에휴 사고 났네’하며 뒤의 차에게 뭔가 상황이 있다는 걸 알려주려는 마음으로 비상등을 키려 한다. 그리고는 전방에서 우회전으로 빠져야 하는데 하필 그 앞에서 사고가 났기에 빗겨갈 의향으로 왼쪽 차선으로 들어가려 했다. 신호가 바뀌고, 좀 빡빡하기는 한데 간신히 옆 차선으로 들어갔다. 근데 내 왼쪽에서 갑자기 택시에서 사람이 내리더니 내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난 왜 계속 앞으로 가고 있지, 싶은 생각을 가지며 뭔가 다급함을 느꼈다. 여기는 도로 위고 사람이 걷는 속도는 뭔가 불안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난 서둘러 가야 하는데 뭔가 지체되는 느낌을 받으며 내 앞으로 걷는 사람 뒤를 바짝 쫓으며 빨리 이 사람이 인도로 넘어가길 기다렸다. 그러다 뭔가 퉁 치듯 앞 사람이 내 차에 부딪힌 거 같았다. 난 순간적으로 ‘사고를 낸 건가?’하는 뭔가 죄를 짓는 것처럼 사건이 벌어진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마치 길을 걷다 행인끼리 몸이 부딪힌 것처럼 어이구 하면서 그냥 가버렸다. 난 다시 앞으로 나아갔고, 아까 사고가 났던 곧 근처로 왔는데 사고 차량들이 벌써 정리된 것인지 치워져 있었고 난 그걸 보자 굳이 차선을 옆으로 옮길 필요가 없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근데 내가 왼쪽 차선으로 바꿨었기 때문에 우회전 하기 위해 오른쪽 차선 끝으로 붙는 게 뭔가 여유가 없어보였다. 차량이 계속 들어왔기 때문이다. 결국 난 끼어들지 못하고 직진을 해버렸고, 네비게이션을 보며 어디로 가야 할지를 찾았다. 계속 직진하며 보자 이 곳이 뭔가 밑으로 쭉 가면 결국 빙 돌아 건너편으로 이어지는 것 같이 보였다. 그렇게 앞으로 가던 중 오른쪽으로 난 길이 가로지르는 길로 보여 고민 없이 곧장 그곳으로 들어갔다. 난 이곳이 연결되어 있어 시간을 아낄 수 있을 거란 판단을 했다. 그렇게 우회전 길로 들어가니 곧장 오르막길이 나오고 그곳은 어떤 상가 건물로 연결되는 길이라는 걸 알게 됐다. 난 반대편으로 나가는 길이 있지 않을까 해서 계속 들어 갔는데 왜인지는 모르게 차로 운전을 하면서 3층 내부 공간을 가로질렀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개업을 하지 않아 텅텅 빈 상업 시설처럼 보였는데 이곳은 스타벅스 카페(내가 현실에서 일했던 곳이고 꿈에 은근히 반복해서 나온다. 다만 현실의 그 느낌은 아니고 그저 ‘아 여기는 스타벅스’라는 느낌만 반복되는 공간이다)였다. 결국 차로 운전해서 끝까지 가다 '아 길이 없구나' 해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걸 느꼈는데 왜인지 이때는 운전을 하고 있지 않고 걷고 있었다. 그래서 난 다시 차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스타벅스 직원 남자 두 명이 오픈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난 노트북이 든 가방을 들고 있었다. 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 차가 있는 곳으로 가려고 기다렸는데 그때 한 남자 직원과 같이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 직원이 갑자기 나에게 ‘여기서 전원 장치 사용하실 수 없어요’라고 말했다. 난 그 말을 듣고는 속으로 나도 예전에 일했었기 때문에 뭔가 알고 있는 느낌을 받아 남자 직원에게 ‘언제부터 사용할 수 없었어요?’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남자 직원이 ‘좀 됐어요’라고 말했는데 내가 ‘뭔가 스타벅스 브랜드 정책이랑 결이 맞는 건가요’라고 은근히 말하고는 남자 직원도 이런 나의 의중을 느꼈는지 뭔가 그러려니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후 난 내 차로 돌아와 엄마와 누나와 통화를 하게 됐다. 누나는 이미 엄마 집에 도착했고 우리는 어디로 가기로 했던 거 같았다. 난 누나가 엄마 집에 있다는 걸 듣고 ‘아 뭐야 나도 그럼 그냥 엄마 집으로 바로 갈걸’이라고 말했고 엄마 집에서 같이 기다렸다 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는 내가 먹고 싶어 하는 걸 준비해줬고 또 누나에게 탕수육 칠리 소스로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킨 상황이었다. 그래서 누나는 어떤 중식 프랜차이즈인 공일육? 뭔가에 들렀던 것이고 난 이 상호를 듣고 이해했다. 통화를 하며 엄마 집이 생각보다 가까운 걸 알고는 위치를 받아 그쪽으로 가려는 상황에서 꿈에서 깼다.




이 꿈을 마지막으로 이후 꿈들은 깨고 나서 도저히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뭔가 꾸긴 꾸는데 기억나질 않는다. 융을 읽기 시작한 이후 3차례 무의식 활성화 주기를 겪어 보니, 이제 무의식이 비활성화되고 의식의 주기가 온 거라고 느껴진다. 내가 붙이는 임의의 이름표지만,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자기 실현 이후 두 번째 아니마와의 통합은 이뤄지지 않았다. 다만 그 준비를 충분히 하는 게 현재 나에게 주어진 '몫' 같았다. 무의식은 때로 의식이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게 적극적으로 준비시키기도 한다. 의식으로 이런 정신의 과업을 망치는 방향이 아니라면, 이런 시기를 통해 한 개별 인격은 분명 성숙해진다. 만약 모종의 현실적 이유로 주어진 정신의 과업에 제대로 임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반드시 언젠가 돌아올 수밖에 없다. 이 시간성은 정신 구조의 나선형이다. 회귀라고 불러도 이해에 큰 무리는 없지만, 나선이 보다 정확하다. 마지막 꿈 기록 이전까지 난 두 번째 아니마와 어떻게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는지의 준비 과정을 거쳤다. 상처를 받고, 걱정을 하고,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나의 감정들을 치유하고. 나의 첫 번째 아니마는 늘 나타나 두 번째 아니마를 도와주거나 이끌거나 한다. 관계를 통한 인격의 여정이 늘 그렇듯, 타자를 통해 겪고 만 정신 공간의 불완전함은 이후 자기 자신으로의 재정돈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나의 무의식이 두 번째 아니마와 '지금은 이 정도가 맞아'라고 말하듯 적당히 하고 물러간 것처럼 보이는 건, 그 이후 꿈에서 '남자'들이 주된 타자들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그 맥락을 읽을 수 있다. 이때부터 꿈이 선명하지 못하고 희미하게 기억나지 않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어제는 어떤 거대한 사자가 나왔다. 이 사자를 한 남자가 약올리듯 놀리며 이리저리 몸을 피하고 나도 어디 높은 데 올라가 사자를 피하려다 그 구조물이 무너져 다른 곳으로 피하는 등 뭔가 어린애들 놀듯 좀 흥미진진한 장면이 있었다. 그리고 뭔가 리듬, 박자 게임을 만드는 어떤 장면, 어떤 경쟁 등... 전반적으로 뭐가 진행되고 있긴 하지만 기억나질 않는다. 무의식이 활성화됐을 때 꿈이 기억나는 거랑 차원이 다르다. 마치 나의 의식이 알 필요가 없다는 걸까? 나도 꿈에서 깨고 나서 잔류하는 감정이나 감각도 '기록해야 겠다'는 어떤 의지가 건드려지지 않음에 별다른 감응이 없기도 하다. 무의식이 활성화됐을 때는 비몽사몽인 바로 그 상태에서조차도 '기록해야 돼'라는 그 이끌림을 느끼는 데 말이다.


본격적인 의식의 계절이 시작되고 있다. 이제 슬슬 머리를 쓸 때가 온 거 같다. 어릴 때부터 뭔가에 과하게 집중하거나 의식이 강렬해지면 마치 뜨겁게 달궈진 쇠붙이에 물방울이 튀어오르는 듯한 강렬한 긴장을 느끼곤 했다. 난 그 상태가 마치 끊어질듯한 탄성으로 느껴 괜시리 그런 '머리 쓰기'를 안 하려 했다. 머리를 쓰면 끝이 없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에 가까워진다. 어떤 '집중의 중력'에 과한 진동과 끌림으로부터 마치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튕겨져 나갈 것 같은 그런 불안정한 느낌이 있는 것이다. 이 아슬아슬한 조율 기술로 이 상태를 유지하는 게 나로서는 일종의 모험이라 때론 즐겁기도 하지만, 확실히 제대로 배워본 적 없는 기술 같아 많이 서툴다는 게 느껴진다. 내 정신을 다스릴 수 있는 이 상태에 도달하기까지 내가 갖다 바친 삶, 세월, 젊음은 이제 대가로 충분했다고 자부한다. 많이 갖다바쳤고, 더 갖다바칠 것도 이제 별로 남아 있지도 않다. 올해는 믿음의 해다. 나 자신을 믿는 법을 해보고 있다.


내 정신에 있어 타자 혹은 이물성이 있는 존재-대상과 어떤 정신적 작업을 해야 할 때는 무의식과 함께 해야 하나 보다. 반면 나 자신과의 작업은 의식으로 해야 한다는 걸로 이해하고 있어서 그런지, 이와 같은 주기가 있는 거 같다. 20대 때부터 줄곧 나 자신에 대한 정신 작업을 의식으로 해왔기 때문에 이런 균형이 생긴 걸 수도 있다.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로 목록을 써 보면 산더미처럼 무수히 많다고 느껴지지만, 늘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게 초점으로 잡히긴 한다. 지금의 나는 이제야 처음으로 의식의 태도 중 하나인 없음에 대한 태도를 마주하려 하고 있다. 20대 때 철학으로 마주했던 이 지평은 내게 안식처이자 의미의 생성 공간이었지만, 그건 초심자의 무구함이었다. 이제는 질릴대로 질린, 지칠대로 지친 지겹고도 끈질긴, 막장의 막장과도 같은, 의미가 탈탈 털린 없음의 심연에서 느끼는 표정뿐이다. 벗어날 수 없어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의 표정 없는 얼굴이다. 의식의 일은, 의식의 일에 대한 일이다. 그래야만 하고, 그럴 수밖에 없다. 이걸 깨닫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독서에 대한 태도도 변화를 겪고 있다. 요즘 책을 아예 읽질 않고 있다. 여전히 내 마음엔 부채감 같은 독서 목록이 있지만, 이걸 완전히 해소하기 전까지는 아마 안 읽지 않을까 싶다. 무의미의 심연에서 의미를 발생시킬 수 있을까에 대한 이끌림은 여전히 모호하긴 하다. 일반적인, 일상적인 '자아'에 대한 관찰이나 반성은 쉽지만 시를 쓰는 '상태'에 대한 관찰이나 반성은 확실히 쉽지 않다. 내가 나로서 쓰는 게 아니기 때문에 더 까다롭고 난도가 높다. 그러나 엄연히 '의식의 일'이다. 이를 나는 무의식에 대한 의식의 일과 비의식에 대한 의식의 일로 구분해 판단한다. 비의식에 대한 의식의 일은 정말이지 세상에 너무 희소하고 희미해서 융에게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도움을 받기도 힘들다. 누가 알고 있으면 추천을 받고 싶다. 난 여태 단 한 명도 찾질 못했다. 비의식에 대한 '의식화'는 21세기 철학자들 중에 유행하는 분위기로 몇몇 주목받고는 있지만, 의식에 대한 반성 기반이 무의식이라는 걸 삶으로 깨우치고서 '비의식에 대한 의식'을 말하는 사람은 여태 발견할 수 없었다. 철학이라는 이름은 너무나 쉽게 의식의 병에 자주 노출되어 있어서 자꾸 엎지르고 넘치는 느낌이고, 예술이라는 이름은 아무렇지도 않게 투사의 병에 자주 노출되어 있어서 자꾸 단절되고 자아가 고양되어 있는 느낌이다. 내가 가야할 길을 다른 이에게서 발견할 필요는 없지만, 누군가 그런 '좁은 문'을 걷고 있는 걸 발견하면 분명 현실이 풍족해질 것이다. 앞으로도 난 이렇게 바깥에서 발견하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찾기'는 내게 숨쉬듯 당연한 호흡이다.


5월은 조바심을 좀 내려놓고 시 쓰기를 점차 활성화시킨 달이었다. 개성화 여정에 진전도 있었다. 요즘은 21세기 시간성과 파충류에 대한 시를 쓰고 있다. 난 때로 나의 직관이 버거울 때가 있다. 너무 앞서가서 내가 현실로 따라가려면 너무 버겁고 지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내가 의식의 일을 잘 못 다뤘기 때문이다. 내 삶의 훌륭한 친구이자 선생이자 위대함인 나의 직관을 내가 여태 못 배웠다는 걸 이제야 선명히 느끼고 있다. 직관을 감각으로, 감각을 직관으로, 이 코드 번역을 이제는 머리로 써먹을 때가 됐다. 의식의 계절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잘 모르겠다. 충분한 현실이 쌓이면 다시 시작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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