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6.12
나아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조금씩 느껴지는 떨림이 미세한 근육 경련으로 알려오기도 한다. 나에게 긴장을 풀어야 한다고 말하는 듯 하다. 자율은 내게 머나먼 이국같다. 알아서 움직이는 것들이 내 정신을 강타하기라도 하면, 그날 나는 꼼짝없이 휩쓸리고 만다. 이국에서 나의 습관과 방식은 먹히지 않는다. 아무도 나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난 던져지고,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걸 느끼는 자동성에 놓인다. 하지만 하지 못한다. 무언가가 진행되다 만다. 걱정과 의구심은 이상하게 지각하는 버릇이 있다. 이상한 지각. 늦기도 하고 잘 알아보지도 못한다. 자꾸만 어긋나니 시간이라도 맞추려 한다. 시간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안전한 의식이다. 그곳에서 난 숨기도 하고 현실로 도망칠 수도 있다. 운동을 갔다 와 저녁을 먹으면, 거리로 산책을 떠난다. 18시다. 도심 속 거리에서 난 나를 자꾸 호명하지 않아도 된다.
돌아오는 길에 삼겹살 장작 구이집을 지나치는 걸 좋아한다. 거기서 풍겨오는 장작 타는 냄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걸음을 멈추지는 않는다. 지나가다 운이 좋으면 춤추는 불꽃을 볼 수도 있다. 이 순간을 느끼기 위해 걸음 속도를 조금 늦춘다. 냄새라는 색인. 이 냄새는 어릴 때 갔던 순천 두메산골 시골집을 소환한다. 6.25 피란 때도 세상과 무관했던 이 산골 동네는 내게 묘한 안정감을 느끼게 했다. 지금은 아빠의 무덤이 아니면 갈 일이 없는, 그래서 머물 명분이 사라진, 머물 수 있는 집도 누군가의 집이 되어버린 곳이지만 말이다. 잃어버린 세상이 그곳에서 쫓겨나 내 기억으로 피난해 있다. 난 이 기억이 우연적으로 현실이 되는 걸 사랑한다. 우연이 반복되면 그건 자율이 된다. 답십리역 너머 골목에 자리한 이 장소는 내가 정당한 간식 서리(?)하러 자주 가는 이마트 에브리데이 맞은 편이라 더 안전하게 내면으로 스며든다. 1~2초에 불과한 순간이지만, 이때를 위해 굳이굳이 동선을 짜기도 한다. 이 저녁 시간이 아니면 장작의 희생을 느낄 수 없다.
희생. 난 감정을 윤리로 착각한 채 거진 평생을 살았다. 내게 윤리로 포장한다는 몹쓸 말을 듣기도 했다. 세상과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날 비겁하게 만든다. 세상과 사람을 해치는 타인이 날 분노하게 만든다. 비겁한 마음은 신비로움을 동시에 품고 있고, 분노는 윤리를 동시에 품고 있다. 이 둘은 희생이라는 위태로운 자세를 취하게 도왔다. 세상에 있어 하얀 것이 신비로운 감정을 느끼게 하는 건 그것이 더럽혀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남아있는 게 없는 걸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도시는 기술색으로 칠해져 있는, 인공 환경이다. 인공물에게 있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을 상태는,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용도 없음으로 나타난다. 그 안에서 아주 아주 희미한 희생을 느끼는 난, 사용되는 무자율, 쓰다 버려지는 무자율이 곧 우리를 지금 여기에서 추방시킨다는 걸 느낀다. 그렇게 추방된 상태로 추방되기를 무수히 노리는 마음과 함께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살고 있다. 희생은 여기서 다시 한 번 만난다.
겁이 나면 난 도망을 가려 한다. 안전한 세계로 몸을 피신시키려 한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장소, 아무도 욕망을 품지 않는 장소, 결국 사람만 없어도 완성인 장소. 사람은 사람을 무섭게 한다. 사람은 사람을 무서워 한다. 이 무서움이 나의 직관을 길렀다. 이 직관이 날 더 이상 감정적이지 않을 수 있게 길렀다. 감정을 꺼내려 내딛는 순간, 발이 미끄러져 뒤로 이끌린다. 방향은 중력이다. 안전하고도 세상의 지탱이다. 이 힘을 딛는 법을 자꾸 잊어먹는다. 마치 혼자서는 풀 수 없는 족쇄라도 있는 것처럼 잠금이 풀리지 않는다. 마음껏 감정을 꺼낼 수 있는 대상이란 게 세상에 과연 있는 걸까. 걸려있는 빗장을 밖에서 누군가 풀어주지 않으면, 우연히 빗장이 풀리는 게 아니면 난 스스로 나가는 걸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않은 그 세계로 숨어들었다. 이 우리가 나의 우리를 만들고. 난 이 우리를, 너와 나의 우리로 말하고. 우리를 둘러싼 우리들에서 우리는 우리를 돕고, 망치고, 때로 몹쓸 짓을 저지르고. 내가 갇혀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너는 말했지. 그렇지 않았다면 분명 난 널 상처입혔을 거야, 그래서 난 그건 상처가 아니라 책임이라고. 너는 너의 마음에서 책임을 지는 거고, 나는 우리에게 책임을 지는 거고. 그렇게 감정은 윤리가 잡아먹었다. 그 입 속에서 어찌나 잠잠한지 마치 자기 요람이라도 되는 듯 퇴행을 했다. 세상 모든 게 거대해지고, 힘이 쎄졌으며, 무엇보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졌다. 막대해진 이 세상의 생명력은 너무나 큰 위협으로 다가오는 걸 스스로도 멈출 수 없었다. 이건 직관이 준 선물이야. 저주야. 이 안에서 어때? 잘 살아져?라고 꿈은 내게 말을 거는 거 같았지. 말을 거는 거 같았지.
엊그제는 꿈에서 에메랄드 토끼를 잡았다. 오늘은 내 안에 고대 여우와 호랑이의 힘이 있어, 그 힘으로 뭔가를 막거나 해야 하는데 내가 그 힘을 제대로 쓰지를 못했다. 토끼는 나의 직관이다. 여우는 나의 이성異性이고, 호랑이는 윤리다. 난 이 여우의 힘을 써야 하지만 잘 쓰지 못한다. 내 감정이 다시 깨어나고 있다는 걸 나도 알아... 내 무의식이 나더러 준비 됐다고 말하는 걸 나도 알아, 근데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비밀을 풀기 전까지, 내 무의식은 나에게 계속 이와 같은 상징을 보여주겠지. 머리로 알아서 문제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방법을 몰라서 문제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못해서가 문제다. 그동안 내가 열등하게 여겼던 바로 그 길에 답이 있다. 머리로는 안다. 길이 막혔을 때는 늘 되돌아가는 게 유리한 법이다. 답답한 마음. 이 마음으로 난 다시 거리로 나간다. 뭔가 할 수 있겠다는 작은 의지를 데리고.
작디 작은 의지는 내게 세상을 보여준다. 봐, 참 생생하지?라고. 난 말한다, 그래, 참 생생해서 곧 죽을 거 같다라고. 그 마지막같은 숨결을 피부로 느낀다. 이 생생함이 지금 이 순간에 있다는 걸 피부에 새긴다. 분명 이 '세상'은 지금에만 있는 거겠지, 건물의 5층 높이에서 공중에 줄줄이 걸려있는 무수한 전깃줄, 공사 중인 가림막 사이로 지나다니는 행인들, 매일 봐도 늘 조금씩 다른 집과 골목의 표면. 바람, 공기, 냄새, 빛, 사람들의 이기심, 자신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좆도 관심이 없는 듯한 그 알뜰살뜰한 이기심. 그 사이에서 다리를 옮기며 표정과 행동과 물건과 버려진 쓰레기와 잡상인, 자전거, 참새, 합리화된 조경 식물들. 개를 끌고 산책하는 인간들. 자유를 위해 자유를 포장하는 공원들. 아무나 드나들 수 없게 길을 막는 아파트 단지의 철창 울타리. 외부인을 극도로 혐오하는 여자들 남자들. 용도가 분명한 건물에 사는 인간의 단일한 용도. 이 사이 사이에서 버려진 무수한 잡것들과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 티끌 먼지와 그와중에 질서를 잘 지키는 시민들의 안전모들. 안전이 머리에 깊숙히 박혀 그 자체가 모자가 된 우리 도시 시민들. 난 이 도심 속 거리에서 만나는 모든 게 좋다. 사람들이 대가리를 쳐박고 핸드폰만 보며 걷는 이 거리가 좋다. 차량이 오는지 안오는지 좆도 관심이 없는 보행자의 무관심이 좋다. 사람이 있든 없든 질주하려는 오토바이 개조한 개새끼들은 아직 좋아할 수 없다. 주기적으로 길가의 나무 가지를 전정하고, 맨홀 구멍을 드러내 보수 공사를 하고, 아스팔트를 다시 깔고. 시에서 추진하는 도시 공공 유지보수 공사들이 난 좋다. 방역을 하고 정화조 청소를 하고, 매일매일 입이 떡 벌어지게 내뱉어지는 막대한 쓰레기를 수거하는 환경미화원과 또 그 쓰레기가 어디로 가는지 좆도 관심이 없는 시민들이 사는 이 도시. 이 모든 게 도시에 사는 법이자 도시를 사용하는 우리 인간의 약속이라는 걸 난 좋아한다. 좆도 관심이 없어야 살아남을 수 있고, 살아갈 수 있고 자신을 지킬 수 있다는 걸 도시는 양육 방식으로 채택했다. 익명와 무관심이 와해되는 순간, 이 막대한 밀도를 과연 감당키나 하겠는가, 라고 현실이 되면 정신은 물어올 것이다. 직관은 내게 이보다 더한 생생함이 또 어디 있겠어, 라고 말한다. 그래. 정말이지 생생해서 아무도 죽고 싶지 않겠다, 그렇지?
이렇게 하나둘 직관의 빗장을 풀어낸다. 여우와 호랑이와 토끼가 보다 마음껏 날 뛸 수 있게 공간을 넓혀준다. 며칠 전 어김없이 새벽 3시에 깨어나 갑자기 뼈해장국이 먹고 싶어서 장한평 쪽으로 간 적이 있었다. 시간은 한 새벽 5시 언저리였고, 가는 길에 봤던 중년 커플과 또 식당에서 일하는 중년 여자의 어떤 수줍은 언행을 보고 나의 직관이 어떻게 '감정화'하는지의 구조를 깨달았다. 추상과 직관이 왜 자기 소외를 기반으로 해서 작동하는지. 세상 속 고독과 외로움, 소외감이 어떤 구조로 인해 자본주의든 개인주의든 이데올로기라는 옷을 입을 수 있게 되는지, 알게 되었다. 그 후 다음 날 난 꿈에서 에메랄드 토끼를 붙잡고, 또 다른 남자가 그 토끼를 잡을 수 있게 도와주는 꿈을 꾼다. 이 토끼는 나의 창조성이 상징으로 드러난 것인데, 난 확실히 직관이 너무나 강렬한 나머지 이 직관의 함정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대가로 감정을 매마르게 했다는 게 분명해졌다.
이제 여우 차례다. 여우는 도시를 싫어한다. 도시에 사는 시민들을 싫어한다. 여기와 여기 사람들은 너무 겁이 없는 짐승같다고 한다. 그들이 감추고 있는 겁이 자신을 만나면 드러나지 않아 공명할 수 없다고 한다. 무서워할 일이 점점 사라지다 못해 즐기는 콘텐츠로만 나타나는 걸 이성異性은 달갑게 느끼지 않는다. 왜 생생하지 않은 것이야. 왜 자꾸만 현실로부터 도망만 치는 것이야. 실외기가 한숨을 푹푹 쉬는 위에 도시의 비둘기가 똥을 오질라게 퍼지른다. 자영업자와 주거민들은 비둘기에게 제발 먹이를 주지 말라고 글을 써 붙이고, 유해 야생동물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무의식과 가까워진 이후로 도시 속 새들이 내게 가까워졌다. 새들이 생생해졌다. 비둘기의 눈은 차량의 헤드라이트와 닮았지만 그 응시는 다른 걸 반향시킨다. 안전에 해가 되는 모든 걸 비위생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정신 태도가 도시를 위생적인 공간으로 이끌지만, 정작 정신의 위생에는 하등 도움이 되질 않아 슬프다. 건물의 표면에 달아붙어 있는 가스관, 통신선, 전깃줄, 담쟁이, 빗물 자국, 햇빛에 타 뜯어지는 페인트는 표면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친구들이다. 회색은 도시의 위생을 보여준다. 대신 더러워지는 휴지와 물티슈가 아무렇게나 버려질 때, 그 뭉치는 눈물대신 감정을 닦아낸 것만 같아 너무 손쉽게 처리된 어처구니없음이다. 자리를 잘 봐줘야 한다. 있는 그대로가 멋대로 있기를. 나는 먼지 대신 부직포에 쌓이라고 기계 장치 위에 면사포처럼 덮어준다. 창문을 자주 열기 때문에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돌멩이 하나를 얹혀놓는다. 돌멩이가 붙들고 있는 하얀, 점점 회색이 되는 부직포는 내게 시간을 준다. 먼지를 닦지 않을 수 있는 시간과 먼지를 알아볼 수 있는 시간을. 이 시간을 난 무의식의 시간이라고 부른다. 우편함에 뭔가 쌓이는 걸 그대로 본다. 분리배출 쓰레기가 쌓이는 걸 그대로 본다. 그래서 여우는 내게 말을 건다. 난 도시가 싫어. 나도 말을 건다. 세상에 도시 아닌 곳이 없다는 걸 너도 모르진 않겠지만...
달리기를 시작했더니 발 꿈치들에 굳은 살이 배기고 있다.
나는 이 굳은 살을 손톱으로 긁고 떼어내는 시간이 왠지 좋다. 내 몸같지 않은 이물감을 떼어내는 즐거움은 내가 알기로 신체절단증후군을 겪는 사람의 정신조차도 느끼는, 매우 깊은 충족감 중 하나다. 세상엔 무수한 이물감들이 떨어져 나오고, 그걸 갉어먹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체가 또 무수히 많다. 산 것들에서 떨어지는 것만이 산 것들을 불러들인다. 난 어제 더 이상 못 참고 참외를 샀다. 오늘 다른 꿈에서는 누나가 내 유부초밥 재료를 갖고 뭔 떡볶이 같은 요리를 했다.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야겠다. 나도 런지 총 하나를 갖고 싶다. 갚아야 할 감정이 있다. 이 감정은 통통 튀는 벼룩 같아서 도무지 평소에는 이걸 갖고 뭘 할 수가 없다. 마구 쏘고 싶다. 던지고 싶다. 징징거리는 심보가 구경하네. 여름도 아닌데 마치 눈이 덮은 듯한 산의 풍경이 꿈에서 나왔다. 아마 8년 전에 썼던 시 '팔월의 고드름'이 여우였겠지. 오늘은 이 정도로 마친다. 아무 생각없이 쓰는 시간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