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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움에 대한 과민반응

작업 노트 31

by 사과와 돌멩이


25.09.01



레크비츠의 국내 두 번째 번역본 [창조성의 발명]을 느리게 읽었다. 조만간 리뷰를 따로 남길 예정이다. 두 달 동안 게으르게 읽었던 지라 간단한 소회를 남겨두고자 글을 쓴다.


아마 동시대인 21세기 대도시에 사는 이들이라면 스스로로 하여금 '창조적이기를, 생산적이기를'이라는 명령을 받아 본 적 있을 것이다. 특히 중간계급이라고 부르는, 레크비츠에 따르면 대학(에 준하는) 교양을 이수했고 또 스스로로 하여금 '합리적 관찰'을 수행한다고 스스로 여기는, 20~30대들에게는 삶의 지남력으로 작동하는 걸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소위 예술계에 종사하는 이들은 더욱 그렇다. 대중 문화를 소비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나도 포함되지만, 내 또래 사람들이 주구장창 '내가 하고 싶은 것'이라는 진정성 주체화로부터 단 한번도 옭아매지지 않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다. 직장생활이라는 급여 노동을 하는 이들은 뇌 뒤편에 '진짜'라는 알 수 없는 정동을 늘 품고 있으며, 또 그런 진정성을 성취한 듯 보이는 스타, 아이돌, 배우, 예술가, 스포츠 선수, 작가, 유튜버 등등이 마치 진정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하며 산다는 낭만과 이상을 '현실 가능한 것'으로 느끼게 하는 듯하다. 돈이 많으면 그런 삶을 약속한다는 자본의 의도도 마찬가지다. 콘텐츠는 늘상 그런 정동을 자극하고 재생산해내 '새롭게' 보이도록 주목을 겨냥한다. 유튜브와 인스타 등 알고리즘에 의해 떠오르는 방대한 '나-정동'은 하루에 얼마나 만들어질까.


나의 경우, 전시나 소위 '신간'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한 건 언뜻 17년도부터였던 거 같다. 피로감이 막대했다. 작품들은 늘 이렇게 말했다. '난 새로워, 독창적이야, 진부하지 않아, 나는 이런 걸 사유해'라고. 전시 기획이나 출판사의 표지 디자인, 띠지 홍보글 등 나아가 매체 홍보에서 다뤄지는 얼마나 창조적인지의 부각. 작가라는 타이틀 뒤편에서 어떠한 새로움도 느낄 수 없어 그런 창작 행위가 피로해진 건 원인이 아닌 결과였다. 그런 포장지를 무시하는 듯 겉과 속이 다른, '이미지는 예시일 뿐'이라는 식품 같은 실망이나 배신감을 느끼는 것도 원인이 아닌 결과였다. 그들이 왜 그런 '새로움'을 내보여야만 했는지에 어떠한 정동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위 정동이라 부르는 유행 개념으로 말하면, 창작 행위는 반드시 '자신의 고유한 정동'으로부터의 표현이다. 그 결과라 할 수 있는 작품이 내보여지는 건 결국 자신을 봐달라는 마음과 별개로 짓지 않고선 방황하고 만다. 작품이 생산자와 별개의 사태라고 말하려면 누가 만든지 아무도 관심이 없는 '공공 시설물'에 가까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책임은 지지 않고, 해석의 자유라는 허상에 의탁하는 전략만이 궁색으로 남는다. 물론 가시화되어 있지만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주목경제'의 이득이 이를 지탱해준다. 진부한 얘기일 수 있지만, 작품의 의도란 현대 담론이 지겹도록 다뤄온 것만큼의 효과가 있어 보이진 않았다. 벽돌을 무작위로 아무리 무수히 던진다고 집 한 채가 세워지는 게 아니라는 말처럼, 작품은 모름지기 창작자의 의도로부터 출발하는 게 부정될 수 없는데 그게 왜 불특정 다수에게 보여져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그 의도가 참 맥아리없이 느껴지곤 했다. 실제 '자폐증'이라는 정신의학의 현장 용어가 아닌 '유아론'에서 말하는 자폐적 태도를 풍기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내가 전시장에서 마주할 수밖에 없던 무수한 예술인, 기획자 또 서점에서의 문학 작가, 베스트셀러 작가들은 오늘날 시대의 분위기와 유행에서 서핑을 하고 있는, 자신을 말하기 위해 그들의 (정신)세계가 얼마나 통제되고 제한되어야 했는지가 내게 있어 현실을 과도하게 만드는 피로감을 유발한 게 원인이었다.


작게나마 소액이라도 편하게 벌 수 있다면, 또 기술이 없어도 편하게 만들 수 있다는 영상이나 쇼츠 제작 방법이 만들어진 계층 '신중년'에게도 진작에 당도해 있다. 심지어 우리 어머니도 그걸 배워 심심할 때 만들어 유튜브에 올리곤 한다. 어머니의 말에는 또래 인간들뿐 아니라 오늘날 창조에 대한 전반적 태도를 관통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즉 누가 왜 어떻게 볼 것인지는 크게 고려되지 않고 일단 미끼를 던지면 뭐라도 잡히겠지 하는 낚시꾼의 태도다. 물에는 무수한 어류가, '잡으면 이득이 되는 어류'가 있다고 가정된 채 말이다. 이건 주목경제라 불리는 문화 시장이 생산자인 사람에게 건네주는 달콤한 환상이자 계약서인데, 예측불가능한 대상을 포착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니 얻어걸리기 위해 노출 확률을 높이는 '합리화'로 귀결시키는 일종의 장치다.


예술도 마찬가지로 보는 관점이 먹힌다. 사실 오늘날의 민주 사회는 모두가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는 주체화 전략이 저변에 깔려 마치 도시 공공 인프라처럼 작동한 지 꽤 됐다. 이 문제의식을 17년도에 몸으로 느끼기 시작한 뒤로 소위 '현대예술'은 내게 낭비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비관이나 실망에 따른 무관심보다는 느린 변화가 진행되는 과도기의 시기라고 느껴졌다는 게 좀 더 맞는 체험이다. 책을 읽다보면 이와 맞아 떨어지는 관찰과 경고가 이미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보통 20세기 중후반이다. 그럼에도 사회가 굴러가는 양상을 봤을 때 사회의 활발한 행위 주체자라 부를 수 있는 소위 '청년'들이 어떤 주체화 전략을 흡수하고 또 자신의 삶을 걸고 있는지를 보면 과도기는 이미 진행중이고, 과연 적응에 성공할 수 있을까가 점차 다가오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아마 실패를 느꼈다면 단발성의 하루살이처럼 자연스레 사라질 것임은 분명했다. 그런 이벤트적이고 퍼포먼스적인 예술 행위들은 마치 그런 징후를 보여주겠다는 듯 자발적으로 징후들을 보여줬다. 지난간 각종 '( )세대'가 이를 보여준다. 시대를 비판하지만 정작 '순간'으로부터 두세 걸음 떨어져 보면 얼마나 세계를 현미경으로만 보고 싶었는지가 느껴져 견디기 힘들 지경으로 확산될 공산이 크다. 이는 자아가 연루된 작업일수록 그 고통에 노출될 영향이 크다.


새로움, 창조성은 자신을 드러내보이고픈 욕망과 궁합이 잘 맞기도 하지만 전시라는 참으로 이상한 공간 문화가 대도시에서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현상과도 궁합이 잘 맞았다. 당연히 서로는 서로를 의지하며 이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 몸이 돼 제도에게 구실을 준다. 주목과 관심이 돈이 되는 세상이 되고 나니 사람들은 여기에 맞춰 외압과 그에 따른 행동, 생각, 정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자신이 어떤 '분위기'에 기계적 작동을 하고 있는지 느끼는 건 충분히 부품으로 소진 된 후에 주어질 회고적 '속풀이'에게만 할당된 게 아니다. 예술이 경쟁 시스템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걸 누구나 알면서도 자발적으로 뛰어들어 주목과 인정을 받는 일의 달콤한 '자아실현'이 자기 자신을 작동시키고 있을 때도 느낄 수 있다. 이에 대한 징후적 반응 중 가장 빈번한 건 바로 낙오자, 패배자, 떨어진 자들의 다짐과 질투, 가치 박탈 등의 부정적 반응이다. 이들의 정동이 왜 생산됐는지는 결코 자연스럽지 않다. 주체화 프로그램이라 불리는 이런 현상을 사람들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걸까. '나로부터 시작됐으니, 그 생산물인 정동도 나의 것'이라는 자기 참조성이 폐쇄적이라는 걸 내버려두는 게 수상하지 않은 걸까.


아니란 걸 안다. 그럼에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는 난색이 먼저라, 그렇다고 세상을, 사회를 바꾸겠다는 오만함에 스스로를 밀어 붙이는 식의 실천과 참여가 정당하고 또 옳고 느껴지지 않는 이상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반대로 그런 행동에 자신을 가담시켜 삶을 쓰는 건 지극히 일반적이고 '인간다운' 행위다. 아무래도 주목경제라는 시장 안에서는 뭐든지 '자극적이냐, 새롭냐, 진부하지 않냐'가 절대 명령처럼 작동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빠져나오지 않는 이상 그런 기준의 가치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알면서도 하고 있는 게 소위 창조 노동을 하는 예술계 종사자들이다.


예술이, 창작이 언제부터 그리 대단하게 보이기 시작했는지는 처음 이쪽으로 이끌림을 느끼는 이에게 도착하지 않는다. 이쪽 세계는 먼저 '자신의 진정어린 감정'를 사로잡기에 포획된 채로 입장되는 어떤 격리된 세계다. 이 세계가 현실 세계와 만나 불화를 일으키며 각종 전략과 태도, 어떤 오명과 누명에 따른 응답 등을 제시한다고 해서 이 세계가 정당화되는 것도 아니요, 또 그런 걸로 이 세계가 성립되는 것도 아니다. 즉 예술은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식의 정식화나 창조가 왜 추구되어야 하는가라는 식의 가치 재정립 등의 접근으로 지탱되는 세계가 아닌 것이다. 또 그 반대로 일탈과 반문화적 움직임처럼 거부하고 때론 훼방놓으며 은근히 '이게 더 자연스러워'라는 식의 교활함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 두 태도는 예술의 역사에 있어 주요한 기둥을 담당해 왔다는 분석이 주류긴 하다. 아마 몇몇 사람들은 동의할 수도 있겠지만, 예술의 세계는 만들어진 세계지 마치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다르게 만들어진 세계에 대항하거나 결핍을 충족하기 위한 대안적 세계라고 보는 게 좀 더 그럴 듯 하다. 먼저 만들어진 세계에 의해 다르게 만들려는 세계 말이다. 당연히 전자는 우리가 쉽게 말하는 '현실'이다.


새로움과 독창성에 무구한 가치를 부여하는 예술 전반의 주목 경제는 경제가 되기 전부터 이미 무엇에 대한 호출이자 반응에 가까웠다. 이게 경제가 되자 주체화 프로그램이 잘 달라붙어 이제는 각각 개체에게 '나'의 특이성을 느끼게 했다. 쉽게 말해 예술로 먹고 살 수 있다는 현실적 상이 실현가능한 것으로 제시되고 난 이후부터다. 이때부터 예술은 다른 예술이 되었음에도 예술은 퉁 쳐서 예술로 불리운다. 부르주아 문화에 있던 예술도 그렇고, 현대인이 언어로만 느끼는 과거 문명의 예술 흔적도 그렇다. 난 오늘날 예술로 먹고 사는, 소위 경제활동이 유발되는 예술은 다르게 불려야 한다고 느껴진다. 굳이 호명을 같이 한다해도 다른 건 다른 거다. 뭐가 다를까.


레크비츠는 그걸 창조성-장치라고 개념화한다. 이 개념은 구분에 따른 혼란과 사로잡힘으로부터 거리를 좀 둘 수 있다는 데 도움이 되긴 한다. 쉽게 말해 괴롭다면 덜 괴로울 여지의 싹을 심을 수 있게 도와준다. 다만 현실은 현실이다. 오늘날 예술과 더불어 창조나 새로움에 대한 과도함은 매스 미디어와 만난 일찍이 인간으로 하여금 피로감과 신경 과민을 그에 따른 반작용으로 느끼게 만들고 있었는데, 이에 대한 개별 삶을 그렇다고 비판이라는 이름 아래 부정하거나 대안이 필요한 것으로 모양내는 건 역시 맥아리가 없다. 책 말미에 대안이랍시고 자극으로부터 멀어진,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슬로우 라이프'의 개선 버전의 미학이 제시되고 있는데, 역시 배따신 대안이다. 세속적 미학화로 번역된 '일상의 미학적 실천'은 돌려 말해 그저 주목경제 시장으로부터 상관이 없는 자들의 일상 속 예술이고 미학이다. 즉 그걸로 돈을 벌 의도와 마음이 없고, 주목과 관심을 받을 이유와 욕망이 없는 예술이자 미학이다. 그러니 전시를 할 필요도 없고, 출판을 할 필요도 없으며 무엇보다 불특정 다수에게 내보일 필요가 없다. 이건 대안이 아니라 원래 있던 예술 세계의 다른 이름일 뿐이고, 완전 별개의 다른 접근을 제시하는 게 아닌 그저 과도해진 주목경제 시장의 미학에 대한 태도를 좀 완화하자는 제안이라 해도 역시 핸디하지 않다. 생각하고 관점으로 가져갈 수는 있지만, 과도함을 부추기는 문화사회 속 개별들의 재생산 동력은 보다 뿌리 깊어서 시스템이든 구조든 이념이든 추상 개념으로 허수아비 세운다고 자신의 식량을 모두 지키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차라리 있는 그대로로 과도함을 완화하는 가치 문법을 구사하는 게 사적 차원에서 더 핸디하고 또 실용적이지 않을까 싶다. 이는 나도 일상에서 해 보고는 있는데 아직은 잘 모르겠다.


여튼 늘 창조적이어야 하고 또 늘 새로워야 하는 노동에 스스로가 너무 얽매여 있다면, 벗어나지 않고도 벗어날 수 있는 균형 잡기가 화급하다는 걸 메시지로 남겨두고 싶다. 말장난처럼 보이겠지만, 터득하면 무엇이 다른지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레크비츠는 정신병리 운운하며 결국 '심리학'에 근거한 내용을 토대로 기업가적 자아의 영향이 창조성-주체와 어떤 상관이 있는지를 말하는데, 결국 그가 마지막으로 제안하는 건 융적 정신 균형 기술과 별 다를 바 없었다. 물론 그는 이에 대한 식견을 섬세히 보여주는 건 아니고 그저 상을 보여줄 뿐이지만, 이에 대해 체험적 감각이 있는 자라면 이 상이 도시적으로 말해 얼마나 불필요한 시간 낭비인지를 알아볼 것이다. 그래서 아무에게나 권할 수가 없다. 해서도 안 된다. 이 길은 구하는 자에게 자발적으로 구해지는 길이 아니고서는 별 쓸모 없고 소용없어 보여야 맞는 길이다. 결국 그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고, 혹은 알면서도 표현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종교적 리츄얼, 즉 '의식'을 대안으로 제안하는 셈이다. 반복의 미학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여기에 담긴 수행적 반복의 가치는 당연히 인간 정신에 있어 권할 만하지만, 사회문화적으로 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애초에 다른 세계다. 이 문제는 과도해진 우리 사람들이 과연 집단적으로 어떤 가치를 수정할지에 따라 풀릴 매듭으로 보인다. 개인이 모여 사회가 되지만, 사회는 개인을 재생산한다. 이 재귀성에 대한 태도를 만드는 게 차라리 더 도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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