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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적 소진 - [포스트휴먼 지식]을 읽고

작업 노트 32

by 사과와 돌멩이


25.09.27


로지 브라이도티는 2019년 [유목적 주체]로 처음 접하게 된 학자였다. 당시엔 읽지 않고 다른 책과 켜켜이 묵혀두고 있던 차, 이번에 [포스트휴먼 주체]를 읽었고 감회가 새로워 뭐라도 남겨야겠다는 마음에 끌려 끄적인다. 정리를 하자니 너무 노동이 될 거라 하기 싫고, 그렇다고 그냥 넘겨버리자니 아까운 마음이다. 말하고 싶은 마음이 건드려졌던 게 크다.


나는 2015년부터 비인간에 대한 시대적 유행에 탑승해 독학을 이어왔다. 다만 서둘러 '포스트휴먼'을 말하거나 '비인간'을 언급하는 책들에 피로감이 상당했던지라 이상하게도 국내 책은 거의 읽지 않았다. 집에 있는 포스트휴먼 관련 책은 30권 정도다. 이 이상은 너무 피로하고 또 내가 흥미로워 하는 지평에 대해 연구하거나 집필한 책은 발견하지 못한 것도 크다. 국내 연구들의 동향도 당연히 수시로 확인했지만, 뭔가 아쉬웠다. 난 연구자가 아니기에 나의 관심사 혹은 내 작업에 보탬이 되는 책을 골라 읽어야 했다. 세상 모든 책을 두루 살펴야 하는 건 내 책임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대로 작업을 이어가고 있지만, 내가 아닌 누군가가 나와 유사한 눈으로 무언가 쓰는 걸 보는 일은 무척 즐겁고 기다려지는 사건이다. 그런 독자의 마음으로 항상 책을 기다린다. 이번에 처음으로 만난 브라이도티는 내게 믿을 만한 연구자이자 이성 사용자라는 확신을 주었다. 난 철학책이나 이성 사용이 물씬 풍기는 책을 접하면 늘 이 저자가 '올바른 이성 사용자'인가 확인하는 버릇이 있다. 그렇지 않은 책은 내게 십중팔구 재미가 없다. 삶을 말하는 힘이 약하고, 그래서 이성이 자꾸 공중부양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개념으로 땅이나 발 붙히기를 말해야만 이성이 삶과 한몸이 되는 건 아니다. 사유와 삶이 분리된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와닿지 않는 기준일 순 있지만, 윤리로서 삶을 사는 사람에겐 반드시 요청되는 호흡과도 같은 것이다. 도덕이 정동과 맞물려 과잉되고 있는 동시대에서는 더욱 더 그렇게 느껴진다. 윤리는 자신의 세계를 짊어지지 않고서 나타나지 않는다. 외부에서 출현하는 게 아니다.


그런 측면에서 브라이도티가 '소진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내게 무척 위안과 용기를 주었다. 난 그가 말하는 소진이 통념으로 이해되는 개념은 아니라고 읽는다. 소진은 사실 들뢰즈가 베케트론에서 건져올린 개념이 보다 '동시대의 소진'을 말하는 데 적확하다. 이 소진은 겪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구석이 있다.


… 소진된 인간은 피로한 인간을 훨씬 넘어선다. “단순한 피로가 아니다. 나는 단순히 지친 게 아니다. 높이 올라오긴 했지만.” 피로한 인간에게는 더 이상 어떤 (주관적인) 가능성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는 최소한의 (객관적인) 가능성도 실현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가능한 것 모두를 실현하지는 않기 때문에 최소한의 가능성은 남는다. 가능한 것을 실현하면서 또 다른 가능한 것이 생겨나게 할 수도 있다. 피로한 인간은 단지 실현을 소진했을 뿐이다. 반면 소진된 인간은 모든 가능한 것을 소진하는 자이다. 피로한 인간은 더 이상 실현할 수 없다. 그러나 소진된 인간은 더 이상 가능하게 할 수 없다.

- 소진된 인간, 질 들뢰즈, P. 23


브라이도티가 '2020년대에 와서는 그 밖의 모든 것에 대한 과도한 피로가 엄청나게 덮쳐 오는 것 같다... 다양한 이슈들에 대해 소진되고 있다고 느끼는 것 같다'라고 적은 대목은 일반적인 매스미디어 환경에서 접하게 되는 디지털 사용자의 정보 과잉으로 인한-혹은 정동의 정언명령으로 인한- 피로감을 겨냥해 말하는 것으로 보이기 쉽다. 대도시화가 진행된 환경에서 사는 시민-국민들은 그 환경적 적응과 더불어 막대한 정보처리 요구를 정신적 압박으로 느끼며 사는데, 이미지 범람, 익명 범람, 상품 범람, 기술색 범람, 무엇보다 인간 범람이 간과할 수 없는 21세기의 막대한 인간 조건임에도 이는 쉬이 암묵으로 빠져있곤 하다. 이런 환경적 제 조건들은 분명 우리 인간에게 피로도와 신경 쇠약을 불러 일으키지만, 자고 일어나면 회복되는 듯, 배터리 충전하듯 우리 뇌-정신이 알아서 괜찮아진다는 느낌적 느낌으로 말미암아 그다지 문제시되는 건 아직인 듯하다. 내가 보기에 이 문제는 스스로 괜찮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별다른 정동적 반응을 불러 일으키지 않아 '남의 일'로 여겨지는 문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피로-소진이 아니다. 소진된 인간으로 산 지 벌써 8년째인 내게 이 구분은 하늘과 땅처럼 분명한 구획으로 여겨진다. 막대한 대상, 그것이 인간이든 인간이 아니든 우리가 이전처럼 무시하거나 폭력으로 처리하거나 무신경하게 처리해서는 안 되는 바로 그 대상의 범람이 과연 무얼 의미하는지, 바로 이 뇌-정신의 측면에서 다뤄야 하는 게 필요하다고 늘 생각해왔다. 막무가내로 지난 사람들의 정신을 비판하고 욕하고 가치절하하는 게 얼마나 쉬운 일인가, 자신의 정신을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고 말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해석이자 경험적 판단에 불과할 순 있지만, 소진은 그저 체력 소진의 그런 의미가 아니다. 구분지어 말해 '베케트적 소진'은 반드시 막대한 바깥 대상들에 의해서만 나타나는 정동의 마른 우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브라이도티가 말하는 소진은 내가 보기에 분명 베케트적 소진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즉 그저 소진이라면 사람들은 어느새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희망적인 것으로 봐야 하기에 차라리 나은 것이다.


... 들뢰즈는 베케트에 대한 해설에서 "우리는 무언가로 인해 피로하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인해 소진된다"고 썼다. 나는 감히 여기에 창조적 퍼텐셜이 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소진은 치료해야 할 병적 상태나 실제 질환이 아니라 힘들이 변환되는 문턱, 다시 말해서 창조적 생성의 잠재적 상태인 것이다. 물론 고통을 무시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보다는 불편함의 강도를 변화의 동력으로, 즉 인간-아닌 것과 비-인간과 인간 이외의 힘들에 개방하는 역량의 표현으로 보자는 것이다. 이렇게 잠재적인 것을 감지하고 파악하며 작동시키는 능력은 무엇보다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분명한 성질들 중 하나이다. - 36쪽


라고 그는 말한다. 창조적 퍼텐셜의 존재는 분명히 있다고, 나도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무척이나 작디작은 기적의 좁은 문이라 난 감히 그걸 있다고 말하는 용기를 낼 수 없다. 내 윤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삶이 아닌 이성으로 보면 그 작은 것도 건져 올려 개념화해 당당히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소진으로 인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상상되는 무수한 사람들이 내게 그려진다. 고통을 넘어서는 건, 브라이도티도 무척 지혜롭게 다뤄주고 있지만, 내게는 뭔가 섣부른 측면이 도사리고 있다. 이건 살의다. 생명 위협적이기에 윤리적으로 어긋난다.


나는 18년도에 소진의 바닥에 떨어졌을 때 들뢰즈의 투신을 감히 감응할 수 있게 됐다. 이 지평은 과거 '실존'이라는 이름으로 20세기 중후반까지 건드려지긴 했지만, 대도시의 환경에 맞춰 번역된 건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이 정신 상태는 몹시 위험하다. 브라이도티가 '윤리적 힘(236쪽)'이라고 말하는, '고통스러운 비실존의 경험을 생성적인 관계적 만남과 지식 생산으로 전환하는 윤리적 작업과도 연관(245쪽)'된다고 말하는, 가장 근원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신과-다른 것-되기를 통해서 지속하고 존속하려는 욕망인 생명의 힘(248쪽)'은 내게 워쵸프를 통해 배운 바로 그 생명임을 알아볼 수는 있지만, 그것은 그저 언어 기술로 말해진다고 인식되는 게 아니라는 걸 너무나 잘 알기에 위험하다. 이 힘은 그 배면에 스스로의 정신 작업에 막대한 부과, 그동안 자신이 몸 담고 살았던, 특히 도시의 풍요를 마음껏 누렸던 만큼의 빚을 다시 되돌려야 하는 작업이 수반되지 않고는 결코 말해질 수 없는 힘이다. 난 융을 차세대로 받아들였기에 더욱 힘주어 말한다. 만약 이 생명적 힘이 포스트휴먼 주체의 윤리 기반이라면, 이건 공동체와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가 아는 역사적 문명 사회에서 그러한 윤리적 공동체가 있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던 걸로 안다. 오히려 이 힘은 각 시대의 구석에서 마치 시대적 요청이라도 있는 듯 자연스레 발생하는 돌연변이에 가까웠다. 이 힘을 말하는 이들 중 섣불리 공동체를 주장하는 사람은 없었다, 당당히 말하는 정신을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그만큼 완전히 다른 과업이기 때문이라고, 난 알아보고 있다. 브라이도티는 내게 많은 위안을 줬다. 그동안 느꼈던 동시대 사람들의 유행 분위기에 탑승한 포스트휴먼에 대해 더 그랬다. 또 이 생명적 힘을 윤리로 말하는 정신은 당연히 반갑고도 희망적이었다. 그래서 더욱 조심스럽다. '고통을 피하려 하기보다는 고통을 재가공하는 다른 방식'은 자신의 정신으로도 벅차다. 당대에 이런 정신 작업을 자발적으로 하는 도시 시민을 어디에서 만나는 건 매우 매우 희귀한 사건이다. 유행하는 분위기 덕분에 포스트휴먼 담론에서 이런 입장이 나타나는 건 내게 반쪽짜리로, 아직은 여겨진다. 뭔가 건너 뛴 걸 못 본척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난 학자들의 연구나 책 집필에 일단 존중심을 갖기 때문에 이들의 언어를 폄훼할 마음은 없다. 슬로터다이크의 '면역'도 내겐 사실 이 생명적 힘을 위한 철학적 통로 중 하나다. 정신적 구루라고 해야 할까, 동시대의 철학자들은 각기 다른 언어로 어떤 지도를 그리고 있고 난 그걸 감사한 마음으로 읽었다. 하지만 현실이란. 실제 사람이란. 무수한 사람들의,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막대한 인구의 각각의 정신보다 지구-행성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마음으로 무언가를 행동한다는 게 뭔가 이상하다. 나의 눈에는 여전히 상상할 수 있는 사람보다 상상하는 데 허들이 낮은 대상들이 먼저 다뤄지는 이상함이 느껴진다. 이 단순한 표현, '상상'이 얼마나 중차대한 동시대의 사건인지를 알아차리는 게 공동체로서는 시급하다고 느껴진다. 사람의 정신을 '빙하의 시간(존 어리)'로 보는 건 도시에서 거의 불가능한 요구다. 그렇다고 익명적 순간주의로 보는 건 다른 이유보다도 가장 먼저 자신에게 안 좋다는 정신의 호소력 때문에 징후화되고 있다. 시간성을 달리하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브라이도티의 제안도 마찬가지다. 시간 연구를 다루는 책들 속에서, 나의 관심사는 우리 인간의 정신에 어떻게 시간 인식이 틀지워지는지에 대한 연구였으나 이를 잘 다뤄주는 책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카를로 선생처럼 물리학자의 눈으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나 삶이 되기엔 엉뚱한 소리가 되고 만다.


지금까지의 소회는 역시 하나의 책을 삶으로 읽는 나의 고질적인 버릇에서 비롯된다. 나도 이런 내가 낯설다. 하지만 역시... 삶이 될 필요가 없는 언어란 내게 없는 언어다. 우리 도시인은 먼저 막대하게 들어오고야마는 일종의 정보, 그러나 단순한 정보가 아닌 '팬텀화되는 정보'를 다룰 수 있어야 하는 게 우선으로 느껴진다. 난 이것이 버거워 내는 신호, 징후가 하루하루 도시에서 얼마나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대는지 보고는 눈을 감고야 만다. 사람들의 분노. 혐오. 부정성. 윤리라는 가면의 도덕 요구. 자신의 이념-정신에 맞춰 아무나 따르라는 막무가내. 브라이도티가 말하는 생명의 힘이 보다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그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난 감히 말할 수는 없지만, 그 힘의 실체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 힘으로부터 공동체는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다양성이 샘솟는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즉 인간 안에서도 그 힘은 같은 힘이 아니다. 같은 이름의 윤리가 아니다. 그런 윤리란 있을 수 없다. 같은 윤리가 아닌 윤리 공동체는 이상으로 가능하지만, 또 주장할 수는 있지만 삶이 되기엔 그 방향이 다르다. 우리를 우리로 만드는 걸 나는 이 생명적 힘의 비의식화라고 느낀다. 이것이 의식화되는 건 다른 얘기로 보인다. 쉽게 말해 그 생명적 힘을 느끼며 세상을 살아보면 보이는 게 있다. 우리가 말하는 현실이다.


난 오늘날 사람들이 이 힘을, 그래서 윤리적 의식이 없어서 전 지구적 문제들이 발생했다고 보지 않는다. 휴머니즘, 백인유럽남성이성을 탓하지 않는다. 이성은 좀 탓하고 싶긴 하지만 그 근원적 유발을 알기에 이미 우리는 돌아갈 수 없다. 미국-중국인의 인구 수로 말미암은 막대한 소비-탄소배출을 혐오의 제물로 쓰는 게 아니라면, 옆에 지나가는 사람의 소비 습관을 지적하고 가로막고 도덕적 질타를 쏟아붓는 게 그들이 무지해서 무의식적 폭력을 일깨우는 거라고 믿는 게 아니라면 더 이상 자신의 정신을 투사해선 안 된다. 배타성을 거부하는 '지도그리기'는, 난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것이 오히려 배타적이다. 당연히 비교하면 윤리적으로 옳게 느껴지지만 말이다. 난 이제 비인간이라는 용어를, 포스트휴먼이라는 용어를 내 시에서 비춰보지 말아야 한다는 걸 느낀다. 사람들의 운동이 내겐 되려 비윤리적이다. 이 미세한 차이에서 유발되는 어떤 위기감을 달리 표현하기엔 아직 시간이 부족하다고 해도, 일단 태도를 바로 잡는다. 인간 정신을 어디까지 탐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인간이 어째서 공감-동일시-동정을 할 수 있는지를 삶으로 알아내기 전까지 난 살아있는 존재에게 내 정신을 요구할 마음이 안 설 것이다. 이것이 내 윤리다. 21세기에 이르러 사람들이 각자의 정신을 무방비로 요구한다는 그 미세한 제안에 의식화가 진행되기를 바란다. 막대한 정신 범람을 알아차릴 수 있기를. 난 여기에 기후위기에 대응하고 적응할 희망이 있다고 느낀다. 앞으로도 다른 관점과 정신을 찾아 읽고 또 갈구할 것이지만, 동시대의 분위기라는 걸 느끼는 나의 정신도 같이 걸을 것이다.


내가 동의할 수 있는 윤리를 읽을 수 있어서 힘을 아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브라이도티 선생에게 안락이 지속되기를.


아, 몇 년 동안 기다렸던 헤일스의 '비의식'이 번역 출간 됐다. 안 그래도 읽으려고 했는데 번역된 게 있어 기쁜 마음으로 다음 독서에 몸을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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