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 작업 32
25.06.28
이번엔 확실히 무의식 주기가 지나간 거 같다. 현재 꿈 주기는 일주일에 1번 꼴로 보다 선명한 꿈을 꾼다. 6월 1일 무의식 주기가 끝나고 이제 의식의 계절이 온 줄 알았지만, 뭔가 미진한 작업이 있다는 듯 내 정신은 좀 더 진행을 했다. 6월 14일을 마지막으로 이제 매일 꿈이 기억나거나 하지는 않는다. 분명 뭔가 꾸기는 하는 거 같은데 깨고 나면 홀연히 사라지고 만다. 6월 20일 꿈 기록이 하나 있고, 오늘인 6월 28일 꿈 기록이 그간의 꿈 전부다.
6월 20일께였나. 한 꿈을 꿨다. 그 꿈에서 난 보물지도를 얻어 그걸 갖고 도망치다 어떤 정부? 같은 곳에 대가를 받고 그 보물지도를 넘기게 된다. 꿈 속에서 난 스스로 그 보물을 직접 가지러 갈 수 없다는 판단 하에 그런 결정을 내린다. 그날 별다른 일 없이 하루를 보내다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러 나간 길에 한 사건을 맞닥뜨린다. 별 시덥잖은 일이라 상세히 적지는 않지만, 감정이 불쑥 자극되는 일이었다. 분노와 더불어 간만에 감정이 막 요동쳤다. 그때 그 감정 상태를 관찰하며 뭔가 알아차린 게 있었다. 감정이란 무엇인가, 하는 직관의 힘을 더한 어떤 이해도의 발달이었다. 그때 난 감정의 분리에 대해, 그러니까 감정이라는 '현실 분리의 힘'에 대해 글을 쓰고 싶었으나 실패를 한다. 감정의 정체를 좀 더 선명하게 느꼈지만 뭔가 적절히 기술할 용어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말로 설명하거나 할 때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감정을 다룬다는 것, 감정을 느낀 다는 것, 감정을 감정으로 대한다는 것. 즉 이성으로 감정을 대하지 않고, 직관으로 감정을 대하지 않고, 비의식으로 감정을 대하는 게 아닌, 감정을 감정으로 대한다는 걸 알아차리게 됐다.
동시에 직관과 이성이 감정을 향해 어떤 정신 활동을 야기하는지도 명확해진다. 난 여태 감정을 감정 그대로로 다루는 걸 버거워한 나머지 이성과 직관으로 감정에 대처해왔다. 감정의 힘이 매우 강하고 이질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감정에 사로잡혀 별별 짓을 다한다는 걸 어릴 때부터 수도없이 봐왔던 게 나의 윤리와 궁합이 잘 맞았다. 융의 진언도 내게 배움의 이정표가 되었다. 융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보지 않기 위해 어떠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감정에 사로잡힌 사람들 태반이 그런 면모를 내보이기도 한다. 이성은 이때 그 사람이 어떤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지, 뭐가 괴로워서 저러는지를 살피게 만든다. 또 그 사람이 감정의 휘몰아침이 지나간 뒤 거짓 자책을 하는 모습을 보면, 이성과 직관은 합세해 나로 하여금 '인간은 왜 이런가'를 이해하게 도왔다. 감정에 쉽게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인간들은 셀프 처벌도 밥 먹듯이 한다. 심지어 그걸 전시도 해 놓는다. 남들에게 말하거나 오늘날 발달된 SNS나 블로그 같은 글에다 자신이 얼마나 못됐었는지, 마치 이제는 반성하고 자기 자신을 직면하고 있다는 식의 언어를 써놓는다. 이런 일련의 진자 운동은 어릴 때부터 사람이 싫어지게 만드는 나의 결정적 증거였다.
왜 나는 이런 사람의 모습이 보이고, 저 사람들은 스스로를 보지 못하는 걸까, 의아해했지만 뭔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나의 이성과 직관으로 대처하기 급급했다. 즉 발달되는 이성과 직관에 힘입어 감정의 구조라는 걸 포착하기에 이른다. 인간에 있어 감정은 왜 늘 '사건'으로 발발하는가. 감정은 어떻게 굴러 촉발되고 유도 되는가. 또 이를 무의식적으로 알아차린 교활한 인간들이 이걸 이용해 사람에게 감정적 공격을 하는가. 이런 문제의식에 대한 이해도만 높아졌을 뿐이다. 이건 감정을 감정으로 다루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난 감정을 다룬다고 착각하기에 이른다. 즉 내 감정을 의식적으로 감정으로 다루는 걸 몰라하게 된 것이다.
인간이 셀프 처벌이라는 스스로의 자책을 할 수 있다는 건, 거칠게 말해 자신의 이기심을 비겁하게 지키려는 숨은 욕망이라는 분석이 있다. 처벌하는 자기 자신은 진짜가 아닌 가짜를 대상으로다. 그래서 변화하지 못하고 또 그때뿐인 것이다. 당장의 그 순간을 넘겨버리는 술책에 가까운 것이다. 여기서 난 말과 행동이 일치되지 않는 인간의 윤리적 불완전성을 읽었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정작 좀만 상황이 변하거나 하면 결국 달라진 게 없는 걸 알아본다. 직관의 기능이란 이런 것이다. 직관은 기본적으로 '시간성'이자 옛 말로 '초월성'의 힘이다. 오늘날의 용어에 가까운 말은 '구조'다. 직관이 발달된 나라는 사람에게 있어 말뿐인 인간과 같이 산다는 건 막대한 고통이었다. 그런 사람과 같이 관계를 형성하는 것도 버거웠다. 자기 자신을 얼굴이라는 표면으로 나타내보이지 못하는 사람은 나의 약점이자 유해한 동물이었다.
세상엔 아무리 좋게 봐도 그런 인간이 수두룩하다. 그 절대치를 무시한 채 낙관적 일반화의 오류를 할 수가 없다. 또 그렇다고 비관적으로 일반화를 하는 건 내 정신에 좋지 않다. 인간은 이렇다는둥 단정짓는 건 별 이득이 없는 것이다. 이건 직관의 기능이기도 하다. 직관은 기본적으로 구체성과 실체를 우선순위에 두지 않는다. 그걸 작동시키는 장치에 관심이 크다. 그렇게 난 오래 방황할 수밖에 없었고, 어떻게 해야 감정을 감정으로 다룰 수 있는지를 의식적으로 파악하지 못했다. 이 문제는 마치 내 정신 뿌리 깊숙한 곳과 연결된 문제였으므로 쉽게 다뤄지지 않았고, 그저 책 몇 권 읽는다고 뭔가 탁 트이듯 깨우쳐질 리 만무했다.
6월 20일에 알아차린 감정이라는 감정은 말로 표현하기에 아직 뭔가가 부족한 느낌이다. 이제 시작인 느낌인가, 초보자 상태같다. 감정은 나 자신을 뭔가 분리? 분열? 괴리?... 뭔가 이질적인 상태로 확 만드는데, 이 상태는 감정 안에 있기 때문에 그걸 알아차리거나 뭔가 직관적 관점을 갖는게 도무지 무용해지는 그 힘이다. 당시 나는 불의 비유를 들어 일단 포착해 뒀었다. 불난 곳에 있으면 사람은 불난 곳으로부터 도망치는 '화급함'에 당장의 정신이 쏠리기 마련이다. 그걸 안전하게 멀찌감치 지켜보는 건 이성과 직관의 상태다. 뭐부터 처음부터 불을 내지 말았어야 했다는 둥, 불을 어떻게 꺼야지 저러고 있으면 고통스러울 뿐이라는 둥 불난 집 구경만 하는 태도가 이성과 직관에 잘 맞는다. 불을 효율적으로 끄려는 소방의 역할은 발달된 이성과 직관일 뿐이다. 그러나 감정을 감정으로 다룬다는 건 마치 불을 다루는 것과 같다. 불을 잘 다루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있는 곳에 불을 낸다. 불을 잘 다루는 사람은 그 불을 적절히 지핀다. 그 힘을 조절할 수 있어지는 것이다. 이 비유를 통해 알 수 있는 '감정'이란, 우리가 '불멍'에서 느끼는 매혹적인 어떤 응시처럼 뭔가 일개 사람으로는 도무지 어떻게 할 수 없는 그 힘의 정체다. 사로잡는 힘, 지배하는 힘, 이끄는 힘, 강력한 힘, 휘몰아치다가도 종잡을 수 없는 힘. 그럼에도 안과 밖이 구별되지 않는, 직관과 다른 초월의 힘. 직관이 내부로, 가운데로 파고드는 힘이라면 감정은 그 자신으로 마치 전염시키는 힘에 가깝다.
난 늘 감정을 이성과 직관으로 소화하려 했다. 하지만, 과연 그랬을까. 내 감정을 내가 아예 다루지 못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일이다. 난 감당하기 힘든 타인의 감정 기능, 그러니까 자신의 감정을 잘 다루지 못하는 미성숙한 타자의 감정에 대해 이성과 직관으로 나 자신을 지키는 데 썼다. 거기에 상처를 받고, 타인의 감정 받이가 되는 건 전적으로 나의 미성숙함이다. 내 감정을 날 위해 쓰지 못했던 것이다. 난 여전히 자신의 감정을 잘 다루지 못해 타인에게 감정적 공격을 하는 인간들을 기피하고 거리두고 싶어 하지만, 예전만큼 부정하지는 않는다. 즉 내 감정을 다루기 시작했다.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분명 무의식 주기가 지나가고 평상시 하루하루에 있어 기억나지 않는 희미한 꿈은, 대체로 내가 나에게 뭔가 해주는 흐름이었다. 마치 내 무의식은 내가 알아서 작업하는데 이건 너가 굳이 알 필요는 없다는 건지 잘 기억나지 않다가 뭔가 이건 너가 알아야 해 하는 꿈은 기억을 할 수 있게 하는 거 같다. 그게 오늘 꾼 꿈이다.
25.06.28 꿈
앞 장면은 잘 기억나지 않고 난 고등학생인 거 같다. 하교길 버스에서 뒷자석에 한 여자가 있었고, 난 버스 정거장에 있는 한 친구에게 인사를 하는 장면도 있었다. 뭔가 무척 친한 기분. 전후로 이런 저런 장면이 분명 있었던 거 같다. 여자친구와 같이 걷는 장면이나… 그러다 내가 한 남자 친구와 같이 하교를 하는 장면이 있었다. 이 친구와 난 내가 현실에서 중학교를 다닐 당시 걷던 하교길 근처를 걷고 있었는데 친구가 나에게 주먹으로 장난치는 걸 보고 내가 혹시 너 스파링하고 싶어?라고 물었고, 친구는 무척 좋아하면서도 약간 조심스러운 듯 수줍게 감췄다. 난 친구를 이끌고 근처 체육관에 가자고 주도적으로 데리고 갔고, 한 체육관에 도착했다. 이 체육관은 정찬성이라는 현실에서 유명한 UFC선수가 운영하는 체육관이었다. 이 친구는 내가 운동을 같이 하자고 했을 때 망설였던 이유 중 하나로 발에 뭔 유리가 박혀 있다는 걸 내게 말해줬었다. 난 체육관을 막상 보니 좀 머뭇거리게 됐다. 마치 자신이 없는 느낌이랄까,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사람이 좀 적은 곳에서 눈치 안 보고 하고 싶달까, 하는 그런 기분을 느꼈다. 그렇게 친구와 난 정작 들어가지 않고 좀 서성거리다 결국 체육관에 들어갔다. 아이들이 많았다. 어른도 있었고 코치들도 있었다. 뭔가 본격적인 분위기였다. 정찬성이 어떤 자세 3가지를 알려줬다. 그리고는 뭔가 한 자세를 취할 때 눈꺼풀에 힘이 어떻게 되니 이걸 풀어야 한다는 식의 말을 하며 옆의 코치가 내 눈커풀을 만지며 위치를 알려주는 장면도 있었다. 그러다 같이 왔던 내 친구를 보니 이 친구의 발에 박힌 유리가 뭔가 너무 아픈건지 문제가 생긴 거 같았다. 그때 한 낯선 남자가 나타나더니, 이 남자는 마치 이 체육관에 상주하는 치료사 같은 거 같았는데, 친구를 눕혀 발을 들어 보더니 무슨 길고 얇은 막대기를 갖고서 발을 가장자리로 빙 돌며 쿡쿡쿡 쑤셔댔다. 쿡 쑤실 때마다 친구 발에 아주 긴 침이 박히고 있었다. 뭔가 관통하듯 아주 깊숙히 박혔다. 친구 발은 마치 동상걸린 발처럼 검었다. 그렇게 발 가장자리를 전부 침으로 꼽더니 갑자기 발 가운데에 뭔가를 갖다댔는데 그 끝에서부터 유리가 서서히 뽑히기 시작했다. 근데 이 유리가 마치 동상처럼, 그러니까 어떤 인물의 형상을 조각한 유리 조각처럼 뭔가 컸다. 그 동상이 깨끗하게 뽑히는 걸 보고 난, ‘아니 도대체 저걸 어떻게 저렇게 쉽게 뽑은 거지?’라는 신기함과 동시에 ‘아니 저런 유리 동상이 어떻게 저 발에 박혀있던 거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 장면이 몹시 신기해서 감탄하다 꿈에서 깼다. 분명 그 유리 동상은 꿈에서 뭔가 2번? 3번? 정도 나타났던 유리 동상이었다. 친구의 발이 치료되고 꿈이 끝났다.
꿈에서 나온 유리 동상은 뭔가... 잘 모르겠다. 현실에서 본 기억이 없고 희미하게 기억나는 건 어떤 한 인간의 형상을 동상으로 제작한 거 같은데 그 인간의 풍채랄까? 그게 좀 푸짐한 느낌이었다. 즉 살집이 좀 있는? 난 살면서 살이 막 쪄본 적이 없어서 내 몸은 아니었다. 또 살이 많은, 뚱뚱한 사람에게 별다른 인상보다는 뭔가 묘한 편안함을 느끼곤 한다. 다이어트 따위의 스트레스도 살면서 크게 겪어 본 적이 없어서 이와 관련된 뭔가 힌트가 전무하게 느껴졌다. 그 인물의 뭔가 푸짐한? 인상 좋은? 그런 느낌만 희미하게 느껴진다. 이 유리 동상에 대해 돌멩이는 나에게 '과거 날 발목잡던 고정된 자아상'이라고 했다. 즉 내가 전진할 수 없게 날 붙들고 있는 유리 동상. 깨지기 쉬운, 그러나 고정된. 또 흥미로운 건 발에 유리가 박혔다는 걸 치료하는 방식이 실제 동상 걸린 발의 치료 이미지를 갖고와 전개한 걸로 보인다. 동상-동상은 꽤나 흥미로운 상징 치료다. 괴사되어 절단해야 하는 증상이 마치 재생되는 '침'의 정교한 치료가, 굳어 있던 자아상을 뽑아내는 걸로 이어지는 건 깨어있는 나의 의식이 창조하라고 해도 할 수 없는 이야기다. 몇 예술가들이 꿈을 왜 창조의 부모라고 떠받드는지 당당히 증명하는 무의식의 탁월함이랄까.
여튼... 근래 나의 정신은 뭔가 자기 알아서 날 치료하며 내가 다음으로 당도해야 할 '통합'으로 날 이끌고 있다. 내가 실제로 뭔가 하는 거 같지 않은 인상을 자주 받는데 분명 나의 객관화 능력이 좀 고장나서 그런 거 아닐까 싶다. 자기 안에 있으면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는 것과 같이 난 나를 잘 못 알아본다. 내가 날 알아볼 수 있는 건 제한적이다. 직관 덕에 꽤나 많은 걸 스스로 알 수 있지만, 그게 전부는 결코 아니다. 나의 오래된 자아상을 뽑는 치료를 나의 무의식이 해줬는데, 솔직히 난 이게 뭔지 아직 잘 모르겠다. 이제 난 준비가 된 걸까? 싶다가도 그냥 주제넘지 말자는 생각이 불쑥 든다. 나의 자의식 과잉 브레이크는 잘 작동 중이다. 이걸 믿는 한 큰 사고 날 일은 없다. 어디서 어떻게 멈춰야 하는지를 먼저 배운 건 내 삶의 지혜다. 동상 걸린 발이 치료된 건 내게 마치 불이라는 화기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상징으로 보여주는 것만 같다. 추위라는 열의 결핍으로 나타난 증상을 열의 증가가 아닌 과도한 열기로 만들어진 굳은 동상으로 형상화돼 뽑는 건, 내가 한때 어떤 열망을 품고서 스스로를 고정시켰는지로 이끈다. 그곳에 남아있는 건 내가 아닌 어떤 겸허함의 돈오다. 점수는 내게 밥먹듯이 하는 일이라 크게 두렵지도, 그렇다고 나태해지지도 않는다. 밥먹듯이는 생명유지의 다른 이름이다. 살기 위해 몸과 정신의 부림을 부리는 건 내게 당연한 생명 활동이니.
유리 동상에 대한 기도의 자세는 이만 끝내기로 한다.
난 이제 일반 사람들이 감정을 빌미로 겁박하고 도덕적 죄책감을 유발시키고 인식을 노예로 삼는 별별 열등한 짓거리로부터 좀 더 자유로워진 걸 느낀다. 고통을 보증삼아 생명 활동에 도덕을 가담시키는 일에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왜 그런 '유발 장치'에 쉽게 휘말려 '집단'의 가면 뒤에 가담하는지는 감정의 힘에 뭔가 있어서지 별 거창한 이념적 이름이 힘을 발휘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걸 이용해 '운동'이라는, '캠페인'이라는 이름으로 종용하고 유발하는 장치 나팔꾼들이 난 더 해로워 보인다. 그럼에도 그런 사람들과 같이 사는 게 공동체고 세상이고 문명이고 현실이다. 하루하루에 지구 어디선가 피가 터지고 생명이 죽어 나가는 그 '얼마'를 특정 삼아 빌미로 삼는 일은 사실 셀프 처벌의 다른 양상과 구조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세상에 인간 실격자인 요조가 얼마나 많이 더불어 사는가를 함께 알고 있어야 21세기 대도시의 젊은 세대도 같이 알 수 있다. 풍요의 이면은 결핍과 희소가 아닌 부족의 과잉이다. 이 힘을 감정으로 알아차릴 수 있어서, 내 정신은 날 데리고 작업하는 거 같다. 내가 이런 시대 응시를 시라는 형식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건 내 역량의 문제지 내 정신의 문제는 아니다. 난 이 구분을 좀 더 해내야 한다. 안 그러면 사이에 끼여 이번엔 유리 동상이 아닌 보다 더한 굳음으로 갈비뼈에서 추출해야 할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