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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Jan 16. 2022

리뷰 - 튀는 신세대 숨는 신세대


튀는 신세대 숨는 신세대 - X-세대 심층분석, 와다 히데키, 이시형 옮김, 글이랑, 1995년


해당 책을 소개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1. 일본 정신의학자가 7~80년대 일본 젊은이를 분석한 저서가 90년대에 한국에 번역 출간되었고, 이를 다시 90년대생이 2022년에 읽는다는 것.

2. 약 2~30년의 세대 간격을 거치며 어떤 세대 면모가 공유되고 틀어지는지 확인하는 것.

(3. 일본 정신병리학계에서 주로 관통되는 개념들이 어떻게 사회 현상의 분석 도구로 활용되는지 살펴보는 것.)


절판된 책이기도 하고 중고 매물이 몇 권 없는 관계로 최대한 저서 위주로 내용을 소개해 본다. 브런치에 이 책을 소개하는 강력한 동기는 세대 간 갈등, 특히 오늘날 제 삶을 견인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또래 동료들의 '사회 이해'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해당 저서는 소위 '신세대'라 불리는 젊은이-젊은 것-요즘 것들이라는 기성의 눈에 포착된 세대를 이해해 보려는 시도다. 그는 일본의 7~80년대 젊은이들의 행태로부터 강렬한 인상을 받는데, 그 인상들의 나열은 다음과 같다.


1. 패션의 변화, 특히 남성의 '정숙 패션'으로 복귀. 말끔히 차려 입고 튀지 않으며 머리도 단정하게.

2. 이지메(왕따 학폭), 오다꾸(오타쿠), 폭발적인 문화 소비.

3. 신흥 종교 및 TV를 통해 드러난 이미지 수요의 변화. 신적인 존재의 갈망, 카리스마-권위적 인물에 대한 맹목적 찬양, 평범과 일상, 엿보기의 애호 증가.

4. 직장 내 문화 변동. 간단히 퇴사하기, 상사와의 어울림 회피, 회사와의 일체감 결여 등

5. 피상적인 인간관계. 이혼률 급증, 결혼 중매에 대한 수요 증가, 즉물적인 육체 관계의 변형 등.


 나열된 항목들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특히나 '최근 2010년대 이후' 두드러지게 표면화 된 현상과 동일한 면모가 압도적으로 많다. '학폭 논란'의 부상, 오타쿠를 대신한 '아싸' 문화, 관찰 예능의 주류와 더불어 이전부터 과잉되고 있던 '관음 문화-몰카 문화', 퇴사-직장 관련 폭발적으로 쏟아지는 에세이들, 비혼주의와 더불어 이성 관계에 대한 급격한 지각 변동.


 일견 평행선이라도 그리고 있는 듯 이상하리만치 중복되는 현상이 많다. 하지만 저 현상들은 약 4~50년 전 일본임을 감안하자. 저자는 당시의 현상들을 나름 이해하기 위해 분열병형 인간-울병형 인간 모델을 갖고 온다. 여기서 크게 의존하고 있는 인물은 세 명이다. 한 명은 볼프강 블랑켄부르크인 독일 정신병리학자, 다른 한 명은 오코노기 게이코, 마지막으로 텔렌바흐다. 블랑켄부르크에게서는 '자명성의 상실'을, 오코노기에게서는 시조이드(분열병형) 인간론을, 텔렌바흐에게서는 '울병형 인간'의 개념 틀을 채택한다. 그 외에 참조하는 심리학자, 정신분석학자, 정신의학자 등은 울증, 조울증, 편집증 등 증례들의 구조를 연결하는 데 활용한다. 


 먼저 볼프강 블랑켄부르크에 대한 간략한 정보는 다음과 같다. 일본 정신의학자 1세대로 분류되는 '기무라 빈'이 독일 유학을 통해 '인간학적 정신의학'에 영향을 받고, 이를 본토로 가져와 왕성한 번역과 저술 활동으로 그 토대를 마련해 두었다. 블랑켄부르크의 핵심 저서는 [자명성의 상실]이다. 영역본도 없는 책을 기무라 빈이 번역하여 일본에 알렸고, 이 책이 많은 이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소개되어 있다. 실제로 대표적인 일본 정신의학자들의 개념들을 구글링하다 보면 심심찮게 곁다리로 붙어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히데키가 요약해 정리한 '자명성의 상실'은 다음과 같다.


 블랑켄부르크는 자신이 담당했던 정신분열증 환자 '안네'를 치료하며 정신분열증의 본질로 '자연스러운 자명성의 상실'을 제시한다. 이 형태는 4가지로 나타난다. 

   

    1. 세계와의 관계 변화. '평상시에 예사로이 하는 일을 이해할 수 없게 되고, 다른 사람들과의 동일성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이에 기무라 빈은 자명성 대신 '상식'이라 부른다. 즉, 상식의 결여가 분열병의 주요 특징인 셈이다. 블랑켄부르크가 '자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에 대해 - 건강한 사람과는 전혀 다르게 - 항상 그와 맞상대할 수 있기 위한 전제를 만들어 두어야만 한다. 이것은 막대한 힘의 소비를 의미한다'라고 기재했다고 한다. 이러한 소모에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결과로 나타난 것이 틀어박히는 행동. 즉, 분열병자에게 누차 보여지는 '무력 상태'를 히데키는 주요하게 봤다.

    (이를 보다 쉽게 이해하려면 '히키코모리'나 사회 부적응자, 은둔형 외톨이 등의 인상人相을 떠올리면 된다. 그리고 스펙트럼을 넓히면 집콕, 집순이-집돌이, 아싸, 집에 있어야만 충전되는 IN-성격 유형이 외연으로 포괄된다. 나아가 네트워크적으로 이런 현상을 관찰하려는 독자는 코로나19 팬데믹 시대로 인해 불가피한 '재택', '격리'가 종용되는 오늘날 시국에 맞춰 이러한 '무력감'이 코로나 블루라는 이름에 가려지고 있음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2. 시숙(시간을 통한 성숙)의 파괴. 과거와의 연속성이 없어져 버려 어떤 경험을 해도 '경험 완료'가 되지 않는다. 보통 사람이라면 '예사로이' 대처할 수 있는 쉬운 일에도 그렇게 하지를 못하게 된다. '자명성-상식'이 없으면 그때마다 늘상 주위에 맞춰 살아가야 하므로 달리 어쩔 수 없이 점점 자신을 잃게 된다.


    3. 자아 구성의 변화, 자립을 하지 못하는 것. 시간에 따른 성숙이 안 되기 때문에 '자립 불가'라는 문제에 봉착하고 다른 사람의 흉내를 내지 않으면 살아 나가지 못하는 수준에까지 이르고 만다. 블랑켄부르크의 환자인 안네의 진술에 따르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가 없다', '나에게는 나를 주장하기에 필요한 성숙이 결여되어 있다'고 표현된다. 


    4. 주관적인 체험 세계의 변화로 인한 대인 관계의 문제. 안네는 '사람들의 눈이 늘 무서웠다. 정말 무서웠다'라고 말한다. 이를 블랑켄부르크가 보기에 안네는 다른 사람들이 있으면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다, 그녀의 마음을 진정으로 어지럽히는 건 '타인과의 자연스러움'이다. 안네는 타인이 갖추고 있는 자명성을 발견해 내고는 절망적인 패배감을 느낄 뿐이다. 그래서 과도하게 정상적인 것에 구애되는 때조차 있다.


 이상 '자명성의 상실' 4가지 측면을 히데키는 미국 유학 생활의 체험을 토대로 이해하고 있음을 서술한다. 여기서는 좀 더 비판적인 독해를 해야 하는데, '이방인으로서의 타 문화권 체험'과 분열병이 상당히 진전되어 괴로운 안네의 체험이 동일한 '자명성의 상실'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건 후술되는 히데키의 분열병형 인간-울병형 인간 스펙트럼에서도 요구되는 독해법이기도 하다. 


 오코노기의 시조이드 인간론과 함께 틀이 형성되는 '분열병형 인간 모델'과 함께 저 도구적 개념을 어떻게 독해할지를 좀 더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스펙트럼이란 ph농도 변화나 프리즘 도구를 통한 색의 분해처럼 임시로 시작과 끝을 기준 삼은 뒤 그 과정을 연속적으로 펼쳐 보인다는 뜻이다. 물리 현상에서는 이 연속성이 자명한 것으로 드러나지만, 정신병-정상 현상에서의 연속성은 이론 모델일 뿐이다. 즉, 심리 현상에서는 아직 자명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앙받는 수많은 심리학자, 정신의학자, 정신분석자들의 이론 모델이 치료에 활용되는 건 효과를 보기 때문인데, 엄밀히 말해 '가설'일 뿐이라는 건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스펙트럼이라는 용어를 정신 현상에 쓰는 건 불완전한 것이지 않느냐? 의심해야 한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현대 사상가나 정신의학자들의 연구에서 '스펙트럼'이 차용될 때는 앞서 언급된 '인간학적 정신의학'의 영향 때문이다. 이를 간략히 설명하면, 기존에 거칠고 이분법적으로 정신병이 다뤄져 환자의 인권과 인격적 권리(감정과 정서, 인생사)가 무시되고 사물처럼 여겨져 많은 정신병 환자가 고통을 받았는데 이를 비판하고 극복하기 위해 하이데거의 존재론, 후설의 현상학이 버무려져 주장된 것이 '인간학적 정신의학'이다. 이 관점의 주요한 지점은 정신병 환자를 바라볼 때 그의 존재론적 인격을 같이 고려해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정신병'을 이물질인 것으로만 여기는 게 아니라 좀 더 인간학적으로 해석하고 접근함을 요구한다. 이 접근이 현재 주류를 이루고 국내에서도 적극 수용되어 상담을 필요로 하는 내담자나 일반 시민의 정신 건강에의 접근으로 확장된 실정이다. 그렇지 않고 발전 없이 현 상황에 이르렀다면 아직도 수많은 시민이 걱정하고 불안해 하는 '정신병 낙인'과 '격리-추방', 정신병동에의 강제 입원 등이 횡행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사자는 아무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이 봉인된 채 그의 삶은 송두리째 약물과 정신과 의사의 오만과 자만에 휘둘린다. 현재 한국은 이렇게 사람이 다뤄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 많은 의사가 일종의 방어를 하고 노력을 하는 것인데, 각종 언론 기자들의 무지성이 아직까지는 선입견 종용에 앞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여하간 이런 맥락 속에서 '스펙트럼'은 정신병 증상을 너무 부담스럽게 다루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면 일상 생활 속에서 그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며 증상을 완화할 수 있을까의 고민 속에서 파생된 접근법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정신분열병'은 마치 외계인의 정신 상태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정상인에게도 어느 정도는 '정신분열병'의 면모가 나타나고 있음을, ph농도로 이해하면 특정 증상의 '농도'가 옅게 나타나고 있음을 이해시키기 위해 동원되는 개념이다. 이는 어느 정도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이에게 당혹스러운 자신의 정신 상태를 안정시키는 통로이자, 정신분열병으로 진단 받은 당사자를 너무 악마화하지 않으려는 완충 장치다.


 히데키는 앞으로 분열병형 인간-울병형 인간의 모델을 활용해 신세대를 분석하는데, 이때 특정 모델의 특징이 두드러진다고 해서 '완전한 분열병형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항상 변증법적으로 이해해야 함을 권고한다. 나의 정신 상태로 적용해 보면, 나는 분열병형 인간의 경향이 무척 짙으면서도 울병형 인간의 특징을 강력히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근데 제정신이 너무나 강해서 그런 나를 오히려 '내려다 본다'. 즉 분열이 일어나는데, 이게 히데키가 주요 본질로 삼듯이 '자기 없음'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라 '양립한다'. 예를 들면, 정말 슬픈 일이 가정에 일어나 방에 쳐박혀 하염없이 울고 있는데, 난데없이 그렇게 감정에 겨워 울고 있는 내가 외따로 내려다 보이는 관찰자 시점이 작동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감정이 안느껴지냐? 그것도 아니다. 나는 이상하게도 감정과 이성이 동시에 작동한다. (CPU로 비유하면 듀얼 코어가 된다)심지어 통제가 되서 아직까지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즉, 사회화나 소통의 측면에서 장점이나 특기로 활용할 뿐, 주체할 수 없는 단점이 되지는 않는다. 그저 몹시 피곤할 뿐.


 '~~형型 인간'이란 대체로 이렇게 읽으면 된다. 한 사람의 정신에는 다양한 면모가 해석되는데, 히데키는 그 주요한 특정 맥락을 '분열병형 인간, 울병형 인간'으로 보고 있다. 이제 오코노기의 시조이드(분열병형) 인간론을 히데키가 어떻게 참조하는지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다른 사람과의 깊은 연대를 피한다.

    2. 겉으로는 동조하지만 실상은 자기 안에 틀어박혀 있다.

    3. 자신을 잃을지도 모르는 불안감이 강하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 자신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가정하에 처음부터 그러한 관계를 피한다.

    4. 상대방을 자신의 생각대로 하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하는 전능감과 탐욕이 있다.

    5. 타인과 1차적, 부분적인 관계밖에 갖지 못한다(인격을 인정하지 못하고 수단으로써만 사귄다)

    6. 호저 딜레마가 있다(다른 사람과 관계하면 탐욕 때문에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혀 헤어지게 되지만 쓸쓸함에 겨워 또다시 접근을 시도하는 대인 관계 패턴. 여기서 호저란 고슴도치, 쇼펜하우어의 우화를 차용한 것이다. 겨울날 추워서 몸을 뎁히려고 서로 가까이 다가가는 고슴도치가 일정 가까워지면 각자의 가시에 찔려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지는 반복 패턴)

 

 이 분열병형 인간 모델은 지극히 21세기 대한민국 젊은층에게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앞서 스펙트럼 개념을 설명한 바 있으니, 오해를 피하기 위해 다음을 알아두어야 한다. 어느 시대든 반드시 발견할 수 있는 인간의 면모지만, 이 면모가 부각되고 보다 '주류'가 되는 시기로 관찰되는 게 '21세기 대한민국'이라는 해석이다. 히데키는 이걸 80년대 일본 젊은이들에게서 봤다. 그리고 기성에게서는 잘 발견되지 않아서 서로를 나눈다. 젊은이들은 분열병형 인간, 기성은 울병형 인간으로 말이다. 이 둘은 '상대적' 관점으로 빚어진 면모이지만, 특정 유형에 강하게 결속된 정신이라면 그런 사실을 절대, 결코(!) 알아내지 못한 채 오직 상대방의 정신 면모를 자기 정신으로만 해석한다. 한국의 586세대나 소위 꼰대질을 일삼는 중년 남성 기득권층이나 MZ세대의 갈등, 남녀 갈등 등 대다수 구도에 적용 가능하다. 서로가 각자의 정신에만 기대 타겟층의 정신을 난도질하기 바쁘다. 히데키는 이런 갈등으로부터 좀 화해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책을 냈다고 밝힌다. 노령화를 걱정하면서 말이다.


 여기에 더해 텔렌바흐의 울병형 인간형을 참조한다. 앞서 분열병형 인간의 특징으로 핵심이 되는 건 '자명성 상실=자기 없음'이다. 이 자기 없음은 자신의 아이덴티티가 없다는 것인데,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그러하다. 하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라는 확실성, 다른 하나는 남이 바라보는 '나'에 대한 확실성. 이 두 가지가 결여된 채로 세상과 관계를 맺고 있는 상태가 바로 분열병형 인간이다. 이에 반해 텔렌바흐의 울병형 인간은 이 아이덴티티가 지나치게 강하여 자기 자신에게 얽매이는 상태다. 자명성이 상실된 게 아니라 지나치게 분명해 과거에 쉬이 얽매이게 되고, 아이덴티티 의식이 지나치게 강해 집단 결속 또한 질기다. 특히 이 울병 친화적 성격은 '질서'에 친근하다. 우리가 일상에서 소위 '저 인간 너무 고지식해'라고 말하는 바로 그 인간이다. 자기 일에 대한 과도한 높은 요구를 하거나 자기 만의 질서가 분명하게 박혀 있어 외부와의 소통에서 조율된다기보다 오히려 자기 질서에 맞추려는 경향이 강하다. (젊은 사람들이 느끼는 꼰대 화법이 여기서 기인한다, 히데키 또한 이를 염두에 두고서 직장 문화에 대해 후술한다)


 그러다 보니 울병형 인간의 경우 분열병형 인간과는 다르게 지나친 시숙(시간을 통한 성숙)을 거치고 그들이 자주 내뱉게 되는 말은 대체로 '마음에 안 찬다'는 것으로 대변된다. 자기 경험을 토대로 형성된 질서가 너무 강한 나머지 엄격한 기준을 두고 있기에 그렇다. 


 이렇게 분열병형-울병형 인간의 모델이 얼추 설명되고 히데키는 점차 사회 현상을 분석하며 이 모델들이 어떻게 해서 집단 현상으로 드러나는지 설명한다. 다만 독자에게 주의되어야 할 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분열병형 인간, 울병형 인간이라고 본다고 해서 해당 인격체가 그런 프레임에 갇히는 건 아니다.

    2. 단편적인 면모를 통해 전부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대체로 '포괄적인' 성격 유형으로의 진단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지 않을 섬세함이 요구된다.

    3. 한 명의 사람에게는 다양한 정신 상태가 구축되어 있고, 또 그 상태가 '언어화'가 된다고 확정시 된다거나 고정이 되어 '불변'으로 여겨지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주의점은 히데키가 모든 내용을 서술하고서 후에 역자와의 FAX 인터뷰를 통해 밝힌 문장으로 요약된다.

'인간의 체험을 만들어내는 변증법은 수없이 많이 존재합니다. 내가 젊은이들을 이야기하는 데 우연하게도 울병형과 분열병형의 변증법이 잘 적용되었을 뿐이지 이에 집착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하나의 축으로서 이러한 것도 있다는 점을 납득만 한다면 제 이론이 약간의 무리가 있었던 점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 정신의학의 2대 정신병이 분열병과 조울병이라는 사실은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물론 히데키는 막상 본문에서 그런 '약간의 무리'를 꽤나 즐기듯 마구잡이로 '분석'한다. 정신분석을 위시하는 오만한 사람들이 주로 갖는 '인간 정신을 분해한다'는 쾌감이, 어느 정도 냄새를 풍겨오는 건 분명 나만의 착각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그도 그럴 게 자신이 원하는 모델 적용을 위해 기꺼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논리를 꽤나 자주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거품들을 걷어내면 분명 도움이 될 만한 관점들이 있다. 이제 히데키가 두 모델을 통해 어떻게 기성과 젊은이의 면모를 풀어내는지 정리해 본다.




(2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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