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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Jan 17. 2022

리뷰 - 튀는 신세대 숨는 신세대 (2)

(1편 - 분열병형-울병형 인간 모델)




 히데키는 자신의 미국 유학 생활을 최대한 많이 참조하며 분열병형 인간을 설명하고 있으므로 이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지 않을 수는 없으나, 시대의 변화와 함께 이방인의 타 문화권 체험이라는 특정 포지션을 고려하면 주의깊게 살펴볼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다. 다만 그가 강하게 주장하는 바, 미국은 분열병형 인간의 나라다, 일본이 미국 문화를 표면적으로 흉내내는 수준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심리적인 상태까지 미국화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등이 언급된다.


 이는 참 재밌게도 책 뒤에 실린 인터뷰에서 일본의 '미국에 대한 편집증적 심리 상태'가 히데키 자신에게도 적나라하게 노출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옆나라 한국에서도 뻔히 보이듯 일본이라는 나라는 미국에 매달리는 모양새를 자주 내보인다. 다만 그런 심리의 구조를 설명하는 건 목적이 아니므로 여기까지 언급하기로 하고, 히데키가 일본 7~80년대 사회 현상을 분석하기에 앞서 추가로 언급하는 모델이 있다. 분열병형 인간과 울병형 인간 사이에 위치하는 나르시형 인간인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나르시시즘'이다. 자기애가 강하다고 보통 독해되는 이 어휘는 어원이 되는 실제 신화에서의 면모와는 다르게 오늘날 자기를 무척 사랑하여 오직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그 중심으로 삼는 성격 유형으로 자주 활용된다.


 히데키는 분열병형-나르시형-울병형, 이렇게 세 가지 모델 군을 연속적인 것으로 보며 미국 정신의학을 언급하며 이 모델이 나름 일치하는 것으로 가정한다. 이 나르시 인간이 일본 젊은층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모양새는 바로 '고급 브랜드'를 온몸에 칭칭 감고 자신을 뽐내는 데 열을 내는 인간들이다. 우리나라도 이와 사정이 크게 다르진 않아 구찌, 샤넬, 롤렉스, 에르메스 매장 관련 보도가 쏟아질 때마다 거기에 달리는 댓글의 시기, 질투, 비난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당시 일본에서도 이 자기애형 인간이 세간의 주목을 많이 받고, 또 그런 인간들이 스타가 되는 걸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대가 점차 변해 젊은이들이 분열병형으로 주류가 흘러가자 이 나르시 인간들이 점점 사라진다. 나르시 인간들은 고급 브랜드를 온몸에 감는 동력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봐 주는 사람들의 시선을 필요로 하는데, 분열병형 인간들은 평범한 걸 추구하기 때문에 더 이상 나르시 인간들을 뒤쫓아주지 않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턱없이 비싼 돈을 주고 열심히 최상급 브랜드를 손에 넣은 사람 입장에서는 좀 난처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시기하고 질투해줘야 하는데, 혹은 시선이 꽂혀야 하는데 도통 무관심하거나 소위 '쪽팔리지만' 직접 자랑하더라도 어떤 욕망이 묻어난다기보다 '응 그래'라는 식의 무관심을 받게 된 것이다. 반면 울병형 인간의 경우 나르시 인간을 바라보는 태도는 모두가 알다시피 단순하다. '그런 데다 돈 쓰고 다니는 XX... 쯧쯧'이다. 울병형 인간들은 소비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도 과거에 좋은 것은 지금도 좋은 것, 같은 태도를 지니는데 여기에 더해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의 중시'가 아닌 성능과 기능, 즉 '쓸모'에 대해 방점을 찍는다. 이런 사람이 보기에 나르시 인간들의 과소비와 명품 두르기는 참으로 한심한 짓거리로밖에 비춰질 수밖에 없다.


 히데키도 인정하듯 일본의 경제 거품과 함께 이런 과잉 소비가 끝나게 된 건 아닐까, 생각하지만 본인이 보기에는 '정신병리의 변화가 자기애 인간 시대를 끝내게 했다'고 말한다. 분열병형 인간이 주류가 된 시대에는 주변 사람들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거기에 동조되는 현상이 빈번하다. 그들은 '자기가 없기' 때문에 주변 흐름에 편승하려고 하면서 동시에 그 안에서의 '자기'도 확인되지 않기에 그 편승이 곧 빈번한 환승이 된다. 히데키는 이를 노래방 문화로도 설명하는데, '요즘 젊은이'들은 실컷 들떠서 놀면서도 그 시간이 끝나면 아무렇지 않게 집으로 돌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과거였으면 2차 3차든 끝까지 자리를 함께해 결국 서로의 진솔한 면모를 확인하는 시간을 갖었다는 게 바로 울병형 인간의 특징이다. 그런데 분열병형 인간은 그런 '진솔한 면모'를 관계로 나눌 '자기'가 없기 때문에 그런 필요도 느끼지 않을 뿐더러 상대방에게서 그런 제스쳐가 다가올 때 큰 부담으로 느껴 자리를 피하고 만다. 히데키는 분열병형 인간은 '보통', '모두와 동일'을 추구한다고 본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코인 노래방'이니 '1인 노래방' 등 혼자만의 놀이 문화가 급부상한 맥락도 떠올려 볼 수 있다.)


 특히 TV, 헤드셋,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분열병형 인간이 명실공히 주류로 나타난다. 모두 '혼자' 시간을 보내는데 특화된 생활을 제공하며, 이에 기반한 문화 소비 또한 그런 특징으로만 형성된다. 이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분열병형 인간들은 교제 관계 또한 가볍고 일방적으로만 맺고 끊는다.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장단점을 두루 살피고 진득하니 교제하는 울병형 인간과는 달리 분열병형 인간은 다소 유아적인 특징을 보인다. 오다쿠는 대체로 남자이며 자신에게 거역하지 않는 대상으로서 로리콘, 환상 세계(요즘에는 이세계물)로 숨어드는 현상이 나타난다. 반면 분열병형 여자의 경우는 자신에게 사랑을 바치라는 확고한 태도를 고집한다. 사람의 애정을 믿지 못하고 계속 남자의 사랑을 시험하며 증거를 요구한다. 그쪽에서 먼저 그러한 걸 내보이지 않으면 사랑을 말할 수 없다. 남에게 주지 못하고 받는 것만을 바라는 사랑을 보이는 것이다. 


 이는 TV 프로그램에서도 인기몰이를 하는 스타일에 반영되어 있다는 게 히데키의 관찰이다. 울병형 시대의 로맨스물이라고 하는 건 대체로 남자가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는 '노력'을 보여 사랑을 얻어내는 방식의 스토리가 주를 이루지만, 분열병형 시대의 로맨스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나타나 평범하게 관계를 맺다가도, 적당히 하며 마음에 드는지 살피는 식의 '타인 우위형 행동 방식'을 보인다. 특히, 시청자들이 그런 연애 관계를 '훔쳐보는 취미'를 자극하는 방식이 먹히기 시작한다. (이건 2010년대 중후반부터 한국 예능이 '관찰 예능', 특히 우결-우리 결혼 했어요에서 '짝'으로 인기 몰이를 한 걸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이는 사회 관계에서도 상반된 양상을 보인다는 게 히데키의 분석이다. 울병형 인간은 '나는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 '이 일은 나밖에 못한다'는 형태의 아이덴티티를 찾거나 자신의 출세에 열을 올렸다. 특히 일본은 '일벌레'라는 모양새가 무척 지배적인 면모였다고 한다. 하지만 분열병형 인간 시대에는 이게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울병형 인간들은 일을 하지 않으면 마음이 홀가분해지지 않는다는 식의 노력 패턴이 주였는데, 분열병형 인간들은 자기도 노력하지 않고 주변도 노력하지 않는 식의 수평 지향이 강한 주위에의 구애를 보인다. (기업 조직 문화가 '수평'을 추구하고 위계를 타파하려는 소위 '젊은 기업' 문화는 한국의 경우 무척 최근 동향이다.) 


 울병형 인간은 깊은 관계를 바라고 자꾸만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지만, 우리 분열병형 젊은이들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 궁리를 한다. 태연하게 거절하기, 눈치보지 않기, 사회적 성공이나 출세에 목매지 않기 등은 자기 자신을 위한다거나 사랑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거기에 구애될 자기 자신이 없기 때문에 불편해져서 마음이 그렇게 움직이는 것이다. 하지만 주변에의 의식은 엄청나기 때문에 분위기에 동조하는 거나 표면적 반응, 소위 '가면 쓰기-감정 노동'은 또 능한 게 분열병형 인간의 특징이다. 다만 상대방에게 그저 장단을 맞출 뿐, 언제든지 자신의 주장도 생활 방식도 간단하게 바꿔 버리고, 직장을 옮기는 것에 별다른 저항을 느끼지 않는다. 울병형 어른이 보기에 이런 인간들은 도통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예측하기가 불가능해진다.


 



 이정도 구구절절 설명했으므로 이제는 챕터 제목만으로도 그 특징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히데키가 나누는 울병형-분열병형 특징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질서에 구애되는 울병형 인간과 매뉴얼에 구애되는 분열병형 인간

분열병형 시대에는 모난 돌이 되는 리더가 훨씬 도약하기 쉽다

정의감이 상당했던 울병형 학생과 이지메를 방관하는 분열병형 학생

질서(선악)를 분명히 하는 지도자를 뽑는 울병형 시대와 마술적-카리스마적 지도자를 뽑는 분열병형 시대

축제에도 남을 이겨야 하는 경쟁 심리 울병형 인간과 일상-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분열병형 인간

과거를 생각하고 싶지 않은 울병형 인간과 과거에 매달리는 분열병형 인간

(이는 울병형 인간은 과거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되도록 못 본 척하려는 경향이 짙은 반면, 분열병형 인간은 복고풍이니 하는 식으로 '자신의 유년'에 해당되는 과거와의 연대를 찾아 몸부림치는 경향이 짙다는 맥락이다)

일체화 환상이 강해 끈질긴 근성을 보이는 울병형 인간과 감정이입 없이 노력하지 않으려는 분열병형 인간

블특정 다수의 시선을 의식하는 분열병형 인간과 윗사람 식의 질서 대상의 시선을 의식하는 울병형 인간


 이런 구분은 모두 일본의 7~80년대 사회 현상들의 부각들로부터 도출된 분석 내용이다. 대체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심심찮게 연상할 수 있는 내용이므로 이해에 무리는 없을 것이다. 히데키는 마지막 결론에 이르러 분열병형 인간 시대가 주류가 된 이 사회에 필요한 건 바로 울병형 인간의 '노력'임을 주장한다. 1편에서도 언급한 바, 한 시대에 특정 유형 인간의 정신이 주류가 되었다 하더라도 분명 소수가 되어 불리하게 살아가는 정신 유형의 사람들이 있으며, 개인 안에서도 경향성이니 정도이니 하는 식으로 복합적인 상태를 이루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 맥락 속에서 히데키의 결론은 '기성의 방식이 옳다'는 맥락이 아니라, '무엇인가 자신을 갖고서 좀 더 끈질기게 붙드는 태도가 필요하다'의 맥락이다. 결과적으로는 분열병형 인간들만의 어떠한 '지속성', '삶을 견인하려는 몸부림'이 필요하다는 의미인데 이 역시 어떤 면모로 돌출되는지는 히데키도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이 책이 90년대 중반 한국에 번역 출간되었을 때 어떻게 읽혔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미디어 철학이나 사회학, 기술 철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히데키가 추출한 '분열병형 인간 모델'이 귄터 안더스나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논의와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는 걸 포착하리라. 내가 보기에 우리네 삶과 정신에 영향을 끼친 사물들을 중점으로 이 현상들을 해석하려 한다면, 분명 컴퓨터와 인터넷, 모바일이 유도하는 정신 습관이 확장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고 본다. 반면 이처럼 이유와 원인을 해명할 수는 없어도 정신 유형의 특징이 도드라지는 일종의 '모델'로서 포착 가능할 때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물론 엄밀히 말해 '설명할 수 있다'가 아니라 '알아볼 수 있다'에 가깝겠지만.


 이 책이 시사하는 핵심은 바로 '급변, 가속도'다. 사회 구조가 너무나 빨리 변하는데 그 변화가 우리네 삶에 흡착되는 과정도 마치 '전자의 속도'로 이뤄졌다. 그래서인지 세대 간 대화라든지 서로의 이해라든지 하는 데에 구멍이 생기고 말았다. 이유를 눈치로는 알아도 자명하게 만들기는 어렵지만 말이다. 하지만 언어라는 게 꼭 논리적일 필요는 없다. 특히 일상에서는 말이다. '대충' 우리네 기성이 왜 저런 말을 하는지 그 패턴이나 유형을 얼추 그려볼 수 있다면 그 말의 소급이 인격적 모독이나 언어적 폭력, 공격으로 확장되지 않도록 예방할 여지가 생길 수 있다. 반대로 젊은 세대의 방식을 '라떼는...'으로만 해석해서는 도통 해석되는 게 없다는 걸 대충이라도 그려볼 수 있다. 물론 쌍방향에서 '동시에' 그런 노력이 이뤄지려면 사실 제도적 강압이나 캠페인, 선동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개체 단위로 '이렇게도 볼 수 있구나'가 누적되는 게 사회 입장에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다소 낡아 보이는 책을 리뷰한다는 건 '가속도로 찢어진 구멍'을 메우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다. 효과는 별로 없어 보이지만 말이다.


(사실 시간을 더 들여서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서술되는 '분열병형 인간'의 면모를 옮겨 적고 싶으나 리뷰치고는 너무 과한 듯 하여 여기서 이만 줄이기로 한다. 히데키는 그 핵심을 역시 '자기 없음'으로 두고 있을 뿐, 좀 더 독창적인 관점이 적용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없음'이란 인격의 부정이나 정체성의 부재가 아니다. 2010년을 통과한 젊은 사람들은 몸으로 체감했겠지만, 그 어떤 세대보다 '정체성'에 민감한 세대가 바로 히데키식 용어로 '분열병형 인간'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개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서술은 모두 '상대적'이다. 즉, 울병형 인간이 '보기에' '자기 없음'이지, 무슨 객관적인 자기 없음이니 본질적인 자기 없음이니 하는 따위의 주장은 아닌 것이다. 히데키가 그런 의도로 사용한 거면 그냥 히데키가 부족해서 그런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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