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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May 25. 2022

반성이라는 함정 1

17.01.01

 나는 이 글을 쓰기에 앞서, 그간의 기록들을 면밀히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읽기를 하며 떠오르는 단상부터 지난 행동을 향한 후회와 변화시키려는 몸부림, 그리고 어떤 술회들까지. 왜 나는 이토록 기록하려 했을까? 무엇을 기록하고, 기억하려고 했던 것일까? 또 그런 나의 행보를 다시 봐야만 한다며 읽는 나는 또 무엇을 읽기 위해서? 이런 물음들은 애초에 어떤 함정에 빠져있다. '자기언급적'이라는 함정에. 나는...이라고 주어를 서술하는 주체의 함정에. 그리고 내가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건 지금으로부터 2년 전, 그러니까 2015년 1월에 우연히 페소아를 읽게 됐을 때였다. 당시 페소아는 국내로의 수입이 활발하지 않았던 시기였고, 아마도 여름이었을까, 파주 출판단지 헌책방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사놓았던 『불안의 책』이 당시 페소아였다. 페소아에게는 이명들이 있다. 그래서 그의 저서, 라고 부르기가 몹시 난감하다. 그때 시를 한 번 써보자는 상태에 앞서 페소아 = 『불안의 책』을 읽었던 건 우연이었을까? 페소아가 누군지도 모르고, 시를 쓰는 내가 뭘 써야 하는지도 모르는 그런 상태에서, 페소아를 읽게 된 건 우연이었을까?


 당시 그 책을 읽으며 그간의 내가 늪인지도 모르고 빠져있던 상태로의 강한 자각이 있었다. 희미한 예감들이 한데 모여 분명한 직관이 되었다. 페소아는, 어쩐 일인지 내가 함정이라고 부르는 상태를 함정이라고 여기지 않는 듯했다. 늪이라고 느끼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그는 과감했다. 단단하고, 힘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서 용기를 얻었지만 이해를 얻지는 못했다. 알랭 바디우는 그의 저서 『비미학』에서 페르난두 페소아를 지금으로써 설명할 이론이 없다고 단언했다. 지금으로써의 설명. 표현이 이상하지만 이해 못할 표현은 아니다. 문제는 페소아를 이해할 수 없다는 데에 있질 않고, 페소아를 읽을 수 없다는 데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지금 이 차이를 확연히 느낀다. 하지만 페소아 얘기는 여기서 그만두기로 하자. 나는 지금 나를 읽을 수 없다는 데에 지나친 절망의 문턱 앞에 서 있다.




반성이라는 아스라한 함정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나를 나라고 불러왔다. 그리고 이 나를 둘러싼 얘기들이 있다. 나의 성격대로 조급하고 조심성 없게 넘나든다면 분명 또 함정에 빠지고 말리라. 세밀하고 조심스럽게 한 문장씩 떼어내야 한다. 가급적이면 직선적인 시간 순서를 채택하기보다, 아니면 권위 있는 이들의 인용과 비판들을 따라가기보다, 되도록 이 나를 지우는 각도에서 수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기대고 의존하는 건 지금 필요한 게 아니다. 나와의 거리두기가 어디까지, 어느 각도에서 진전이 되지 않는지, 나 스스로 확인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자 의도니까. 


 따라서 언제, 이 언제라는 도래할 시간의 요청에 먼저 응답해야 한다. 나는, 언제부터 나를 나라고 불렀을까? 나는 나를 언제, 나라고 불렀을까? 나는 나를 나라고, 언제 불렀을까? 이렇게 나는 네 가지의 각도가 있다. 그것도 상이한 각도가. 이 각도들은 교차점을 만들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좌표지을 수 없는, 언표할 수 없는 시공 또한 만들어낸다. 우리는 보통 그런 시공을 '비밀'이라고 부른다. 기만과 위장, 은폐는 아니다. 비밀에 대해서는 파스칼 키냐르와 막스 피카르트, 쟝 그르니에가 술회한 바 있다. 하지만 그들의 서술은 지금 필요하지 않다. 우리의 비밀은 우리 자신을 지켜준다는 데, 스스로에게 자기 자신일 수 있게끔 보호-제한한다는 것만 상기하면 충분하다. 따라서 이 '비밀'이 있기에 이 나가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고 거꾸로 말해, '비밀'과 이 나가 한 장소에서 요청될 때 비로소 이 두 가지가 동시에 호출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표 중 하나는 바로 일기장이다. 그것도 누군가에게 쓰게끔 요청 받은 일기장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권위 있는 타자에게 쓰라고 명령 받은 반성문이다.

 반성문은 애초에 교육 제도권에서 체벌의 일종으로 자리잡은 하나의 규율 권력이다. 푸코의 논의를 여기서 호출할 필요는 없지만, 이에 대한 식견의 도움을 받는 건 필요한 일이므로 체벌로써의 쓰기에 대한 부분을 인용한다.


"교실, 복도, 운동장에서의 학생의 정렬, 숙제나 시험을 통해 모든 학생에게 부과되는 서열, 매주 매월 매년 학생 각자가 갖게 되는 서열, 연령순에 따른 학급의 배치, 난이도에 따른 교재와 과제의 순서"

"완전히 독해 가능한"

'시험은 가시성을 설정한다. 즉, 규율 권력은 개개인을 시험, 조사를 통해 본다. …… 시험은 개인성을 "문서 영역"을 통해 파악한다는 점이다. 시험, 조사, 회진, 고사를 통해 개인은 시간적·공간적으로 기록되고, 문서화되어 "정리된 세밀한 아카이브"가 형성된다. 개인은 보일 뿐만 아니라 기입된다.'




푸코의 논의에 따르면 주권 권력에서 규율 권력으로의 양립 불가능한 전환에는 포착되는 대상을 향한 기술과 장치에 '기호'가 도입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도, 달리 말해 정신의 대상화, 신체의 정신화가 가능하게끔 만드는 기술과 장치였다. 에크리튀르, 시니피앙이 여기서 거론되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푸코는 주체성의 확립이, 개인의 포착, 개인의 형성이 규율 권력의 세밀하고 지속적인 획정 효과에 다름 아니라고 말한다. 이는 분명히 맞는 말이다. 그가 규율 권력의 사례로 든 근대 세기에 한해서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있어서는, 일기장을 만나는 그 순간에 한해서 말이다. 어쨌든 우리는(어느 시점부터 주어가 '나'에서 '우리'로 전환되는지 또한 중요하다) 이 나를 부르는 '교육 과정'을 거치면서 사회에 소속되니 말이다.


 따라서 반성문이라는 일기장은, 혹은 일기장이라는 반성문은 타자에 의해 이 나를 불러들이는 일종의 에크리튀르적 의식이다. 서술 주체는 한 명일 수밖에 없다. 생명정치적으로 말하자면, 인구 1명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주체가 '나는...'이라고 쓰기 시작한다. 바로 이 순간, 이 나라고 하는 고유명이 발생한다. 어떤 심리 배경 하에? 그것은 '비밀'과 이 나가 한 장소에서 요청되는 배경, 그러니까 그 누구도 나를 건드릴 수 없고, 개입하지 않으며 알아볼 수 없다는 배경, 말하자면 데카르트가 네덜란드에 갔을 때의 배경, 말하자면 쟝 그르니에가 켈란군도에 갔을 때의 배경, 말하자면 독자가 책을 읽을 때의 배경, 말하자면 한 개인이 쓰기를 할 때의 배경. 끝도 없다. 말하자면, 정말 끝이 없다. 우리는 이런 배경들에 너무나 익숙하다. '내면'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런 상태를 '성찰'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혹은, '반성'이라고도.


 하지만 거꾸로 말한다면, 이 나라고 하는 건 그런 심리 배경하에서 나타나고, 기능한다고 할 수 있다. 아니, 그런 조건들 속에서만 작동하는 일종의 장치다. 누군가와 같이 있고 없고의 환경 문제가 아니다. 심리 배경이라고 하는 건 또 다른 컨텍스트context다. 우리가 보통 맥락이라고 말하는, 흐름이라고 말하는 매시각 살아있는 환경-사정. 그것을 컨텍스트라 부른다. 그리고 컨텍스트는 에크리튀르와 항상 결부된다. 따라서 이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그런 컨텍스트의 결여, 혹은 개입시키지 않음이 야기하는 상황들은 실로 방대하다. 하지만 그런 폭력이 개입되는 상황들의 열거는 여기서 피하기로 한다. 문제는 그런 컨텍스트의 개입, 그러니까 그런 심리 배경 하에 기능하는 이 나가 도대체 나와 무슨 관계인지, 그것이 중요하다.


 애초에 반성문=일기장은 나를 향한, 나를 판단하는 쓰기다. 거기서 서술되는 이 나는 어쩌면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반성문의 실패, 라고 할 수 있는 체벌의 실패가 가능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기장을 쓰고도 기억이 안나고 다시 읽었을 때 '내가 그랬나?' 의아할 수 있는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다. 그것은 조건적인 주어, 달리 말해 만들어진 주어이다. 따라서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다. 이름이 사물-관념에 의해 만들어진 명사라는 점에서, 우리 자신은 개개인의 신체와 결부된 상태로 호명되는 이름들이 있다. 하지만 저런 심리 배경 하에 호출된 주어는 몹시 제한적이고, 따라서 희미하다. 그 주어는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자주 나타나지 않는다. 하루하루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그렇게 많지 않다. 우리 스스로를 대행하는 그 주어는, 아주 가끔, 혹은 밤과 새벽에 나타난다. 밤과 새벽이라는 배경 하에, 어둡고 음슴한, 그러니까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을 것 같은 개입하지 않을 것 같은 알아볼 수 없을 것 같은, 배경. 그 주어는 그런 배경 하에서만 나타난다. 그 주어, 이 나라고 불리는 고유명은 사실 아주 가끔 우리를 대표할 뿐이다. 대리할 뿐이다. 그것은 분명히 근대인의 주체이기도 하다. 데카르트의 코기토이기도 하다. 사유라는 배경, 비판하는 배경, 판단하는 배경, 기호가 넘실대는 바로 그 배경 하에 형성된 주체인 게 맞다. 그러나 그 주체가 우리 삶을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만들어진 주어이고, 조건적인 주어이며, 따라서 우연적인 주어이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나에게 몹시 중요했다. 가령, 무엇을 하고 싶니? 라는 질문에 이 나는 아무런 도움도 주질 못한다. 이 나는 사유의 주어답게 망설인다. 고민하고, 신중하고, 사유한다. 곱씹고, 반성하고, 성찰한다. 시간만 있다면 과거 총체를 장난감 늘어놓듯 앞에 쏟아내고서 하나하나 뜯어보며 어떤 '구상'을 한다. 시간만 있다면 지금 흘러가는 시간 쯤은 얼마든지 벗어나 무중력에 부유하는 상태에 빠진다. 상상의 귀재다. 혹은 계획에 착수한다. 과거의 짐들을 고려하면서 돌이키지 않으려는 어떤 몸부림. 피해의 각인, 아무도 건드릴 수 없었던 이 나에게 상처 입혔던 모든 순간들(흔히 트라우마-외상들), 그것들을 호출하여 뜯어보고 재서술해보고 다르게 편집한다. 다가오는 근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온갖 상황들을 예측하며 대처한다. 그것은 주어를 둘러싼 사유의 주어가 행하는 모든 작업 중 일부다. 차이를 발견하려는 주어이고, 간격을 벌리려는 주어이고, 가급적 시간을 발생시키려는 주어다. 머뭇거리는 주어이고, 망설이는 주어이며, 돌처럼 굳는 주어다. 따라서 무엇을 하고 싶니? 라는 물음 앞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철저히 '사회화된 주체'를 호명하는 물음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라는 간판을 내걸 수 있는 사람은 흔히 문학 작가다. 따라서 돌처럼 굳는 주어인 이 나는 행동하기보다 고민하기를 원한다. 아니 애초에 이런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나는 행동이 가능한 배경 하에서 기능하지 않는다. 어떤 심리 배경 하에 만들어진 이 주어는, 신체에 결부되어 있는 주어가 아니다. 혹은 신체에 각인된 주어가 아니다. 이 나는 종이 위에서 처음 나타났을 뿐이다. 지면地面이 아닌 지면紙面 위에서.


 지면紙面에서의 주어, 그러니까 에크리튀르적 주체. 이 주체는 규율 권력의 효과들처럼 우리 삶 전반을 아득한 축구장 위에서 굴러다니는 공처럼 배회한다. 나는 이를 돌멩이라고 부른다. 돌멩이, 누가 차지 않으면 구르지도 못하고 만져주지 않으면 언제나 식어 있는, 돌멩이. 그리고 우리는 이런 주체를 사랑할 수도, 의심할 수도, 거부할 수도 있다. 운이 좋다면,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반성이 미덕이 된 근대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주체들은 비난의 대상이 되지만 말이다. 하지만 만들어진 주어라고 해서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특정한 심리 배경 하에 호출된 이 주어는, 종이 위에 쓰이는 주어이지만 한 번 발생한 이 효과는 주체 전반에 씌인다. 불행히도 우리는 이걸 선택할 수 없다. 애초에 조건적인 상황 속에서 돌출된 것처럼 보이는 이 주어는 교육 제도가 이미 마련해 놓은 장치의 효과 중 하나였고, 한 번 적용된 이 기술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애초에 그런 기술을 수용하지 않은/못한 문화권으로 넘어가야 한다. 하지만 심지어 그마저도 쉽지 않다. 한 번 구성된 주체는 그 자신이 기능하는 한에서만 '선택'과 '판단'을 가능하게 했고, 따라서 애초에 그런 상상 자체가 이미 구성된 주체의 기능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미 갇힌 것이다. 언어에 주어가 갇힌 것처럼, 주어에 주체가 갇힌 것이다. 이 나를 둘러싼 모든 상상들은 이 나에 갇힌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나는 이를 알아차렸을 때부터 끊임없이 의심을 해왔다. 나는 분명 이 나에 갇혀 있다. 소속되어 있다. 너무 깊게 관여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정말? 한계의 단절은 불가능에서 가능성을 구하려는 기만적인 인식은 아니었을까? 은폐된 비약의 논리는 아니었을까? 계속해서 의심했다. 먼저, 어떻게 이 나가 나 전반에 씌였는지, 유령이 빙의하듯 나를 장악하기에 이르렀는지 알아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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