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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May 25. 2022

반성이라는 함정 2

17.01.01



 좀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런 순간들은 프로이트가 '억압'이라고 부른, 아타루가 '선동'이라고 부른 바로 그 상황들에 있었다. 루소가 『인간불평등 기원론』에서 기호 발화에 관한 일종의 할례 의식을 물질적인 소유의 차원에서 다룰 때, 언어가 지닌 조문彫文성을 감지했던 것이 분명하다. 한 번 새겨진 비명은 예전의 돌이 아니다. 그것은 도구를 수반한 기술Technology이며 힘Power에 의한 의사擬似현실의 구현이다. 구현된 것은 이전의 그것이 아니다. 완전히 다른 것이 되었고, 그러니까 '새로워'졌으며 하나의 장치가 된다. 그 장치는 기능한다. 효과를 산출한다. 사용된다. 사용되고 또 사용된다. 그래서, 다른 장치를 가능하게 한다. 기술은 기술을 부르고, 힘에 의한 의사현실 구현은 또 다른 의사현실의 구현을 부른다. '수정'을 낳는다. 하지만 어떻게? 리처드 로티를 비롯한 사상가들에 의해 그것은 '우연성'의 영역에 할당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건드릴 수 없는 자연이 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미지를 이-미지의 세계로 인도해야 한다. 최초의 각인된 기억으로부터 도래할 순간으로 인도해야 한다. 그것의 기능 부전이 프로이트가 수행하려는 '분석'이 개입할 지점이고 제도가 교정해야 할 '사회비용'이 드는 지점이고 내가 결핍에 허덕였던 그 지점이기도 하다. 다채롭고 다양하다. 쉬이 특수성을 허용하지 않는 그 지점. 그러니까 고유명을 빼앗겨 호명되기도, 표현되기도, 파악되기도 어려운 그 지점. 최초의 각인된 기억이 자리 잡은 이상한 매력의 도래성과 분유성. 가까이 다가가면 안개로 변하고 멀리서 바라보면 하나의 추상화인 바로 그 기억. 온갖 목소리들이 맴돌고 각인을 더욱 선명하게 하면서 도무지 사라지지 않는 비명의 시공. 일종의 묘지. 죽었다고 여겼던 것들이 묻힌 곳에서 죽지 않았다는 흔적들이 떠도는 영원한 장례식. 바로 그런 기억의 장소.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은 것일 수 있다. 그런 최초의 각인이 감행되는 순간 나는 벗어난다. 그날을 살아가고, 내일을, 모레를, 글피를 살아간다. 그런데 이 나는 거기에 갇혀버리고 만다. 메두사의 얼굴을 보고 몸이 굳은 것처럼, 뒤를 돌아보면 돌부석이 된다는 스님의 말을 어긴 며느리처럼. 나는 계속 나아가야 하지만 이 나는 끊임없이 돌아보고, 굳고, 사로잡혀 있다. 이때부터 햄릿이 말한 시간의 엇나감이 발생하고. 데리다가 유령들을 소환하는 엇나감이 발생하고. 유령적인 주어. 아니, 환영에 사로잡힌 주어. 그 주어와 함께 가야하는 나. 내가 종이 위에 소환했던 이 나와 같이 살아야 하는 나는 결여를 느끼기 시작한다. 여기서 복잡하지 않았던 것만 같은 상황은 순식간에 미궁에 빠진다. '왜 이 나는 거기에 사로잡혀 있는가?' 도대체 '최초의 각인된 기억'은 왜 발생하는가? 조각가가 돌에 글자를 새기는 것처럼, 누군가 계획한 것일까? 의도한 것일까? 정말, 그런 상황이었나? 아닐 터이다. 분명, 그런 상황들은 언제나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었을 터이다. 그러지 않을 수 있었던 가능 세계가 무척이나 방대한, 그런 순간이었을 터이다. 그런데도 그 순간은 있고 말았다. 어쨌든 어제와 다른 그날이,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그날이, 멈춰버린 시간이 된 날짜가 된 것이다. 그 최초의 순간으로 인해 '안 그럴 수도 있었던 기회의 말소'가 각인 된 것이다. 꼼짝없음. 각인이 된 이유는 바로 영원성을 획득했기 때문이리라. 다른 모든 가능성들의 기회를 말소시켜 오직 유일한, 단일한 에크리튀르를 획득했기 때문이리라. 이 둘이 동시에 작용하는 걸 각인이라고 하리라. 그러니까, 어떻게? 왜, 하필?




 나는 이 문제를 추적해왔다. 그 최초의 각인된 기억이 우연에 의해 발생한 할례라 할지라도, 선택의 영역이 아니기에 제 3자의 향락, 대타자의 향락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 또 그런 복수적인 우연 속에서 우리는 불가능의 가능성을 말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나는 추적해야만 했다. 왜 이 나는 하필 그 상황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는가? 우연이라면서 왜 필연이 되고 말았는가? 필연이 됐기 때문에 우연이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거 아닌가? 정말로 우연이었다면, '우연적인 상황' 속에서라면 우리는 절대로 우연과 필연을 요청하지 않았을 터이니. 어제와 오늘을 살아가듯 그렇게 흘려보냈을 터이니. 굳이 계획하고 예측하는 코기토를 요청하지 않더라도, 원래 모든 사람들이 살아온 것처럼 나에 맞춰서 살아갔을 터이니. 오늘을 살아가고, 내일을, 모레를, 글피를 꾸준히 살아갔을 터이니.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혹은 그런 추적을 포기하고 말았다. 문제는 이 나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수 있는 건 어디에도 없었다. 이 나는 도래하는 그 순간 이미 돌이킬 수 없음을 내포하고 있었으니까. 한 번 소환된 악마를 소환하지 않았던 일로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그렇기 때문에 이 나를 추적하는 문제는 까다로워진다.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하며, 무엇을 기대해야 하며,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번잡해지고 만다. 그러니까, 이건 함정일 뿐이라고, 단정 짓고 싶어진다.


 가라타니 고진이 『탐구 1·2』에서 행한 이 나에의 탐구는 돌연 우회되고 만다. 아즈마 히로키의 『존재론적, 우편적』에서도, 스스로 '이 나가 생략된 철학의 물음들 속에서 왜 나는 현대사상을 이토록 끈질기게 읽는가에 대한 자문의 응답에 실패'하고 만다. 그들의 이로理路가 어디서 막히고 어떤 태도로 전향했는지는 여기서 다루지 않지만, 그 제스쳐는 실로 값진 선배의 조언처럼 곱씹을 필요가 있다. 언제 우리가 고유명인 이 나를 얻게 되고, 또 여기에 갇혀 허덕이게 되는지의 경우들은 중요하지 않다. 나의 목표는 화해에 있지, 도주에 있는 것이 아니다. 아사다 아키라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도주론』에서 논했던 오늘날의 주체 명명과 전략에 있어서 사막에로의 분열적 도주는 너무 무책임한 주장으로 읽힌다. 사사키 아타루의 말처럼, 법과 제도를 같이 논해야만, 비로소 '주체'는 균형을 갖게 되니까 말이다. 따라서 선배들의 조언 속에서 빠져있던 것들, '언제' 이 나를 얻게 되고, 또 '언제' 여기에 갇혀 허덕이게 되는지의 경우들 속에서의 '언제들'과의 시간적 이음새. 즉 화해. 나는 그런 컨텍스트를 추적해왔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이 나에 갇혀 홀로 해결할 수 없는 일임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달리 말해, 탐구라는 자세로는 결코 불가능하다. 애초에 이 나가 나타나는 심리 배경 하에서라면, 전면에 나서는 건 이 나의 끈질긴 고민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반성이라는 함정을 낳는다.


 달리 말하면 나는 어떤 장치를 개발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이 나와 내가 화해할 수 있는 장치. 교차되는 시공. 하지만 이것이 일기장과 무엇이 다른지, 자신만의 독백으로부터 어떻게 거리를 둘 수 있는지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록과 기억으로부터 스스로가 어떻게 문장으로 '떨어질 수' 있는지. 소격을 발생시킬 수 있는지. 그리하여 그 간격만큼의 자유가 허용될 수 있는지.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문제는 수정되어야 한다. 나는 언제 이 나를 호출하지 않고 지내는가? 혹은 이 나를 요하지 않는 사람들의 삶과 어떻게 조우할 수 있는가? 최초의 이 나가 형성될 때 개입된 타자의 명령과 어휘가 점차 이 나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면, 리처드 로티의 말대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어휘 꾸러미를 슬그머니 수정해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를 건드렸던 타자의 어휘로부터, 내가 사로잡힌 타자의 어휘로부터 나 스스로를 향한 안전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이해'의 길로 돌아서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가 해당되는 컨텍스트가 있다면, 거꾸로 말해 '어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상황들은 이 나를 요하지 않고, 따라서 주체가 지워진 상황들, 그러니까 기계의 세계에서 이 나는 필요하지 않다. 기계에 에크리튀르적 주체란 없다. 찰리 채플린이 『모던 타임즈』에서 보여준 뛰어난 점은, '무성'이 가진 장치도 한몫 했겠지만, 주체가 필요 없기 때문에 피로도 필요 없고, 따라서 비극도 요청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비극의 주인공은 언제나 인격을 요한다. 그러나 희극은 인격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유머와 재치의 세계. 달리 말해 고민하고 머뭇거리고 사유하는 주어가 생략된 세계. 따라서 희극적인 세계. 같이 웃고, 떠들고, 장치에게 온 몸을 맡기는 세계. 산업사회에서 주체를 지닌 인격들은 괴로울 뿐이다. 시어도어 카진스키가 정부가 주도한 심리 실험의 피대상자였다는 알리바이를 지닌 채 연쇄 폭탄 테러를 자행하고 붙잡혔을 때, 그가 제출했던 선언문은 하나의 에크리튀르가 되어 '유나바머'를 낳았다. 기계 문명 속에서 괴로워하는 하나의 주체를. 완전히 파괴시켜야겠다고 극단으로 간 하나의 고유명을. 그에게 말소된 건 이 나의 유연한 처세가 아니라 이 나를 억지로 불러왔던 나 자신이었다. 그리고 이를 분열병의 일환으로 보는 시선들도 있다. 실제로 정부의 프로젝트로 감시당하는 어떤 기술의 희생자라는 고백, 어떤 조직으로부터 끊임없이 명령을 받고 이를 어길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는 고백, 수많은 목소리들이 자꾸만 들려오고 사물이 생명을 갖게 된다는 고백. 모두 목소리와 관련된 어떤 인격의 괴로움이고, 그 인격은 사회 생활이 가능하도록 형성된 주체이고, 그런 주체를 괴롭히는 목소리는 일종의 권위를 지닌 목소리였다. 우리가 처음 일기장을 쓰게 될 때 겪는 이 나의 컨텍스트와 동일한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소위 '미친'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산업사회에서 주체를 견딜 수 없을 그런 취약한 인격들이 분명 있다는 반증이리라. 나의 추적이 포기될 수 없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기도 하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읽기는 '말년에 그가 미쳤다'로 끝나선 안 되는 것과도 상통한다. 그가 왜 미칠 수밖에 없었는지를 추적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 나가 소실한 안전 장치의 부재이므로.




 따라서 이 나의 폭주는 무엇보다 막아야 한다. 그것은 의식을 굴종시키고, 사회를 이탈시키며 '인간'을 벗어난다. 근대의 기준이었던 코기토가 오히려 근대를 내파시키는 것이다. 인간성의 말소는 근대 구조 위에서 폭력을 유발한다. 야만 속에서 폭력은 폭력이 아니게 되지만, 근대 속에서 야만은 폭력이다. 더욱이, 이 나가 형성된 사회 속에서 어떻게 이 나를 제어할 수 있는지가 하나의 문제로 부상한다. 아주 아스라한 함정이다. 그것의 제어는 보통 권위 있는 타자가 수행하기도 한다. 제 3자. 얼굴 없는 이웃들이. 신이. 기술이. 때로는 사랑이. 그러나 이 나는 항상 혼자이길 자처한다. 그것의 심리 배경에 타자란 없기 때문이다. 그 시공은 전능한 신의 시공이다. 끊임없이 독백 되고, 제한이 없으며, 따라서 쾌락적이다. 일기장은 어느새 도취적인 연애편지가 된다. 자기가 자기에게 보내는 달콤한 어휘의 향연이 된다. 교묘한 주이상스의 암호가 된다. 힐난과 자책과 혐오를 가장한 사랑이. 때로는, 무수하게 작성된다. 결코 도착할 리 없는 편지들이 계속해서 근미래로 발송되는 것이다. 함정이다. 헤어나올 수 없는, 아주 매혹적인 함정. 함정인 줄 모르는 함정. 아스라한 함정. 반성이라는, 고독.


 겹겹이 쌓여 형성된 주체는 이처럼 '비밀'이라는 시공을 향해 어휘를 던져 그 무엇도 적중하지 못하도록 본인도 모르게 은폐할 수 있다. '비밀'의 시공을 가정하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 하등의 도움이 되질 않는다. 오히려 무엇에 의해 '못하도록' 하는지의 그 주체를 읽어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나는 일련의 장치 효과지만 동시에 매우 쾌락적인 심리 수단이기도 하다. 상처받는 자아를 위한다며 고민을 하고 어휘를 단련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교묘히 상처받는 자아를 겨냥하기도 한다. 타자의 자아를 향해. 가정된 타자의 자아를 향해. 그것은 본인의 심리 맥락 속에서 이미 마련된 것이면서도 돌출되는 순간에는 오히려 안다고 가정된 타자를 향해 전부를 뒤집어 씌운다. 여기서 마조히즘과 사디즘을 읽어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리라. 이 나는 심리 배경을 준거로 상이한 태도를 지닌다. '비밀'과 이 나가 한 장소에서 요청되는 바로 그 순간, 타자의 명령에 응하면서 동시에 '나는...'이라 자발적으로 쓰는 그 순간 마조와 사디가 상보적으로 발생한다. 애초에 그런 조건이었던 것이다. 그런 장치들의 효과 그 자체였던 것이다. '심리'라고 하는 무시무시한 조물 능력. 그것은 바로 '의도'를 낳는, 수동-능동이라는 운동 능력을 부여하는 거대한 장치인 것이다. 심리가 하나의 장치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 아주 복잡한 전제들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 나가 형성되는 순간의 포착으로 인해 그 자신도 일순 노출된 것과 같다. 심리는 이 나를 전면에 내세워 정치적 대리인으로 표상시킨다. 따라서 이 나를 감시하고 힐난하고 책임지우고 교정하고 화해하려는 시도 모두는 심리가 이 나를 통해 독재를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나는 지금 어떤 소설을 쓰는 게 아니다. 심리를 마치 비선실세처럼 뒤에서 조종하는 어떤 의지로 묘사하고 있지만, 그것은 심리를 묘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 나를 대하는 또 다른 나의 판단을 노출시키기 위함이다. 이것은 신중한 전략전이기도 하다. 무엇을 가시화시키고, 무엇이 맹점인지 그려내는 신중한 일인 것이다. 이는 또한 이 나에 기대어 수행할 수밖에 없는 작업이기도 하다. 아스라하다. 하지만 프란츠 카프카가 했던 고백처럼, '내가 장애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장애가 나를 이긴다'. 당신이 한 목소리를 내고서, 하나의 주체로서 기능하고 생활하고 있다고 여길 때는 그저 단일한 나에게 모든 걸 위임했기 때문이리라. 문제는 사실 복잡하다. 인간의 심리는 결코 단일한 주체로서만 기능하도록 되어 있질 않으며, 그렇게 작동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의식을 빌미로 '그렇게 보이게끔' 유도하는 교묘한 전술가로 여기는 것이 더 낫다. 이것은 심리의 실체화에 관한 내용이 아니다. 전략적 제스쳐에 관한 얘기다. 이 나를 향해 어떤 태도를 취했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 보이지 않았던 것이 가시화되는 순간을 노린 일종의 자세다. 


 따라서 이 나는 수없이 요청되고, 겨냥되고, 비판될 수 있다. 그리고 적중되지 않을 수 있다. 아니, 오히려 적중하기가 일생을 통틀어 손에 꼽을 정도인 것이다. 나의 외로움과 나의 결여, 나의 불안, 나의 의심 모두가 저 실패로부터 쌓인 습관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끊임없이 다르게 해야만 할까? 못 본 척 새로운 걸 해야만 할까? 여기서 다시 최초의 각인된 기억을 호출하기로 하자. 그것이 하필 왜 '각인'되어야만 했는지를 말할 때, 그것은 우연이다, 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그렇지 않았다면 너는 그것을 각인되게끔 허하지 않고 흘려보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다른 이들에게 허용되지 않는 어떤 특이점이 나에게 유독 강하게 침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자 결과. 그것의 매듭. 풀 수 없는 매듭. 풀려고 해도 도무지 풀리지 않는 강력한 매듭. 푸는 순간, 오류에 빠져 기능 정지하고 말 것 같은 자아의 무모한 호기심. '너가 하고 싶은 걸 해'라는 명제는 사실 이 최초의 각인까지도 소급된다. 너를 건드렸던 순간들, 너를 사로잡은 상황들을 받아들이고서 마음껏 그 조건들을 향해 투신할 것. 즐길 것. 몰입할 것. 그럴 수만 있었다면 애초에 그러지 않았을 터이니, 이미 그랬다면 너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수용. 그러나 이것은 왜 이리도 몸부림이 강한 것일까? 왜 그렇게 부정하고 싶고 왜 그렇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일까? 무엇으로 하여금?




 바로 이 나가 사로잡힌 이유이기도 하다. 이 나는 사유하는 주어이자 동시에 부정하는 주어이다. 주체의 형성으로부터 타자의 명령을 통해 수행되면서 형성된 에크리튀르적 주체는 애초에 반발하는 주어였다. 그것은 거부하면서 동시에 응하는 것이다. 부정하면서 동시에 수긍하는 것. 그래서 어긋나버리고 마는 것. 양립할 수 없는 이율배반이 공존하기 때문에 뒤틀릴 수밖에 없는 것. 같은 극의 자석을 서로 붙들고 있을 때의 불안한 척력. 이 나는 그런 척력의 자장 속에서 발생한 일종의 '불안' '의심' 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 나가 사로잡혔던 순간은 바로 '불안'과 '의심'이 실재로 도래한 그 순간.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던 바로 그 순간. 두려움과 공포가 약속했던 근미래가 도래한 순간. 피할 수 없는 그 순간. 붙잡혀버리고 만 것이다. 햄릿의 엇나간 시간은, 달리 말해 고장난 이 나다. 그때부터 이 나는 단순히 그날 그날의 관찰자가 아니게 된다. 붙잡힌 날짜로부터 끊임없이 소급되는 '반성적 주어'로 돌연 변하고 만다. 관찰자에서 훔쳐보는 자로. 구경꾼에서 관음증자로. 할례를 당해 숨기고 가리는 의복처럼. 부끄러움의 문신이자 수치와 치욕의 문신이다. 여기서 나는 의식적으로 정신분석적 용어들을 기피하고 있다. 그것들을 신뢰하지 않을 뿐더러 그들의 종교적 집단에서 배울 수 있는 건 몇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정신분석의 효과라고 할 만한 분석을 받아본 적이 없고, 또 성공할 수 있을거란 '전이 과정'이 있지 않았기에 그렇다. 이 나는 기피한다. 고장났지만 아직 기능하고 있는 이 나는 어휘를 검토하고, 자신의 주어에 기입할지 말지를 선별한다. 나의 어휘는 이 나가 나에게 변호하기 위한 어휘들로 꾸며진다.


 아즈마 히로키가 다음의 저서에서 이 나가 제거된 상태로 임해야 될 거 같다는 일종의 다짐은, 실로 적절하다. 이 나는 끊임없이 동요하고, 결코 결단나지 않으며, 풀리지 않는 매듭이다.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동어 반복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 최승자가 정신병원을 전전하다 다시 조명을 받으며 인터뷰를 했을 때, 젊었을 때 문학은 대단해 보였지만, 쓰면 쓸수록 동어 반복에 지나지 않았다고 고백한 건 다름아닌 그의 문체 전반이 내밀한 주체의 표상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슬픔에 중독되고, 고독에 중독되고, 이 나에 갇혀 점점 나 스스로를 말소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늪 아래로 계속 헤엄쳤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러야만 했는지, 선배들의 조언에는 피가 서려 있다. 혹은 그런 내밀한 함정 속에서의 방황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쓰기와 읽기가 정보의 차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도 조리가 있다. 이 나는 글을 쓰는 주체이자 독자이기 때문에, 이 나를 전제하지 않고서의 글이란 애초에 심리와는 무관한 글이 되고 만다. 그것은 무용하지 않고 하나의 장치로 보는 것이 맞다. 심리와 무관한 글은 실로 노련한 읽기 기술이 동반되는 피로한 작업이기도 하니까. 사람을 둔감하게 만들고 공감을 무디게 만들고 교감을 희미하게 만드는 유해한 작업이기도 하니까. 기술-장치와 연결되는 사람은 거기에 점차 동기화되어 심리의 기능을 정지시킬 수밖에 없다. 반대로 이 나만에 갇힌 사람은 거기에 취해 고독한 병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는 정신병에 전전긍긍하다 사람 손길에 숨을 쉰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죽음에 이르는 자다. 그의 명석한 논리와 통찰과는 무관하게, 그의 이 나는 그를 숨죽여 질식시킨다. 공감으로부터, 대화로부터, '타자의 숨결'로부터. 그것은 그가 본인의 이 나에게 생의 대부분을 위임시켜버렸다는 뜻이기도 하다. 비겁한 처사이고, 두려움에 갇힌 왜소한 용기이기도 하다. 반대로 이 나의 생략은 희극 배우가 된다. 그는 비극도 느끼지 못하면서 동시에 웃을 수도 없다. 그를 보는 사람들만이 웃는다. 희극이 웃음과 유머의 세계라면, 그 세계는 언제나 관객에게만 허용된 세계다. 정작 희극 배우는 웃기지도, 슬프지도, 따라서 괴롭지도 않다. 표정이 고정된 인형인 것이다. 동작이 반복되고, 어긋남이 없는 인형인 것이다. 시간도 공간도 잃은 무한의 인형. 오직 그걸 지켜보는 이 나들이 웃고, 떠들고, 울고, 슬퍼하고, 새로움을 낳는다. 다른 반복을, 다른 시공을, 따라서 다른 인형을. 이 나를 둘러싼 담론은 이처럼 방대하다. 불안과 의심이 도무지 가시지 않는 것은 이해의 부족 중 하나는 아니었을까? 그것은 충분히 소격을 확인하지 못 한 상태가 아니었을까? 이 나는 글자와 관련된 주어이다. 에크리튀르적 주체이고, 만들어진 주어이고, 우연적이고, 따라서 끊임없이 가변적이다. '정지'란 있을 수 없다. 우연의 산물은 언제나 불안하다. 요동치고, 반응하고, 견딜 수 없어 끊임없이 흔들린다. 애초에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애초에 그런 조건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런 심리 배경 하에서 대리된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존재하기 때문에 불안하다'가 되어도 무방하리라. 하이데거의 이로와 다르지 않다. 이의 연장선에서 데리다와 아즈마 히로키가 덧붙인 '복수성'은, 발송 실패적 우편의 반복적인 시도는 어떤 불안과 의심의 말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애초에 '복수'인 것이다. 결코 상황은 단일하지 않다. 불안은 끊임없이 불안들로 증식하고 의심은 끊임없이 의심들로 증식한다. 그리고 단일한 것에서 구체화로 나아갈 때 요청되는 '복수'의 증식은 따라서 이 나들을 개입시킨다. 나는 여기서 다시, 페소아의 이명들을 떠올린다.


 문제의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나는 네 가지 각도가 있다고 했다. 여기까지가 하나의 각도에서 설명된 이 나다. 이것은 그저 주체의 형성에 관한 근대 코기토의 결과며 이는 희미하고 우연적인 산물일 뿐이었다. 필수불가결한 것이고 동시에 말소되지 않는 주어였다. 문제는 이보다 좀 더 포괄적이다. 이 나를 승인하고 거부하며 이 나를 돕는 나는 언제 발생하는가? 그 증거를 가족 관계에서 찾을 수도 있고, 사회적 주체의 증명 과정에 연결된 ID에서 찾을 수도 있다. 가족-사회적 주체인 나. 나의 구분은 여느 심리학 서적에서도 발견할 수 있고, 특정 이론들이 숱하게 나오지만 매우 단편적인 단계로만 그치고 만다. 그저 '그런 모습이 있었다' 거나 마치 거대한 육류의 슬라이스 하나를 보여준 것 마냥 처리한다. 하지만 이 가족-사회적 주체는 다르게 말해 '신체에 연결된 주체'이기도 하다. 이 나는 에크리튀르를 신체로 삼는 주체다. 육체를 신체로 삼는 주체는 바로 가족-사회적 주체인 나.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사이버네틱스의 이론을 두루 살펴보면 부각될 이 주체는 접속과 인터페이스, 그리고 관계망이 어떻게 기능하는지 판이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준거다. 그리고 남은 두 가지 각도 중 다른 한가지 각도는 바로 비인간에 관한 각도다. 이것은 심리가 생략된 시공이 아니라 오히려 심리가 유도되는 준-주체적 시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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