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푸닥거리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과와 돌멩이 May 26. 2022

반성이라는 함정 3

22.05.25



 지난 5년간 절뚝거리며 수행한 '이 나'에의 추적은 대체로 '자기 상실'의 삶이었다. 상실된 삶으로 산다는 건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몸부림으로 이해될 수도, 고속 열차에 몸을 실은 채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무엇인가 할일을 찾는 분주한 심심함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전자는 무기력의 절박함을, 후자는 무능력의 망각을 의미한다. 이 둘은 시소처럼 하루의 일상을 나눠 들어올렸다 내린다. 절박함이 가해질 때마다 이 상실을 점검하고 표명하고 종국에는 그것을 무찌르기 위한 수단으로 삼지만 허사다. 자기 부정은 부정되지 않는 자기를 도덕적 눈치로 포획함으로써 꼼짝없이 붙드는 죄의식의 일환일 뿐이다. 자기 명령을 체화한 현대인에게 있어 이 자기 부정은 삶의 동반자이자 경찰관, 어떠한 검증도 가할 수 없는 멘토다.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자기 상실의 응시가 세 가지 측면으로 수행된다고 봤다. 자신의 정념 밑바닥을 뚫어져라 보는 것, 자기 자신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습관의 이면-반복의 이면을 보는 것, 더 멀리 나아가기 위해 논리라는 언어의 고속도로를 까는 것. 상실의 극복을 위한 세 측면은 분명 효과가 입증된 방법들이다. 반면 나에게는 멘토의 부재, 스승의 부재, 올바른 방법으로 수행을 완수할 수 있게끔 돕는 트레이너의 부재가 가장 큰 이슈였다. 혼자는 위험하고 취약한 상태이지만, 가장 먼저 시작하는 출발점이자 종국에는 도착할 끝이기도 하다. 실질적인 도움 없이 홀로 수행자의 길을 걷는 자는 필시 방황하기 마련이고, 높은 확률로 소리 소문도 없이 미아가 되기 마련이다. 이 처지는 스스로를 긍정하지 않으면 결코 헤어나올 수 없는 자기 파멸의 환경이다. 


 과거 '이 나'에의 관찰은 다른 학자들의 결론을 내 삶으로 체험하기 위한 시도였다. 의식화된 자기 자신은 이를 추적했던 선배들의 결론으로 이미 끝장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길의 마침표는 '불가능'이었고, 그 탐구에 있어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다. 나 또한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 자기 언술을 눈치채고서 중단하기에 이르렀고, 불행히도 그 단단한 매듭을 풀지 못해 방황을 일삼게 된다. 언제까지고 '나'를 위한 공부와 읽기, 쓰기가 이어질 수는 없다. 사회로부터 '쓸모있으라'는 명령에 어떠한 대답도 제출하지 않았을 때, 그 유보 심리는 나에게 모종의 희망을 품게 만들었는데 그건 스스로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린 어떤 운동 선수의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운동 선수는 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다른 모든 걸 포기한 자다. 그가 포기한 모든 걸 보충해주고 그가 전념할 수 있게 불필요한 모든 신경을 차단하는 역할을 그는 수행할 수 없다. 운동에서의 기록은 그에게 하나를 제외한 모든 걸 포기하도록 요구한다. 운동 선수는 그 강압적인 요구를 자기가 직접 원하는 것으로 만들지 않고서는 결코 감당해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서포터들이 늘 항상 잔존하게 된다. 가령 어떤 사람이 인간으로서의 기예를 끝까지 밀고 나가 사람들에게 경탄을 자아내고 있다면, 십중팔구 그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다른 조건으로부터 면죄를 받은 것이다. 이 현실적 사실이 감춰지고 또 평가 절하될 때, 홀로 수행자의 길을 걷는 사람에게 가장 불리한 조건으로 다가온다. 그는 이 보이지 않는 조력들을 몸소 느끼지만, 이 모든 걸 스스로 해야 한다는 자기 부담으로 전환하지 않고서는 한 발자국도 내딛을 수 없는 난처함에 직면한다.


 그렇게 '이 나'에의 추적은 중단됐다. 나는 방황했으며, 자신이 유령처럼 느껴졌다. 메타버스나 NFT를 대하는 사람들이 자주 내뱉는 말 '실체가 어디에 있냐'는 물음처럼, 나는 나 스스로에게 그런 물음을 수도없이 던져야만 하는 지경에 이른다. 17년도부터 점진적으로 책 읽기를 줄여나갔다. 책을 읽는 '나'의 기세를 꺾어보자는 심산으로. 이후 맞닥뜨린 피상성의 세계, 잃어버렸던 평범함에 조금씩 몸을 기울여 마치 아무렇지 않았던 것처럼 합류해 뒤섞이고자 시도했지만 어쩐 일인지 사회는 받아주지 않는다. 나는 무거운 생각과 엄숙한 논리를 의식적으로 밀어냈다. '이 나'가 살아숨쉬는 그 정신 지평의 평수를 좁혀나갔던 것이다. 깨어있는 일상의 시간 동안 '이 나'가 고개를 들고 있던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 시간을 메웠던 건 우리가 사는 방식, 영상 콘텐츠를 시간 죽이기로 떼우거나 게임을 하거나 소비를 하거나 어거지로 돈을 벌거나 하는 식으로 채워졌다. 그동안 점차 힘을 잃어갔던 '이 나'의 의식은 나로 하여금 부정적 정념들에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는 평탄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평탄함은 마모된 감각의 무반응이었고, 덩달아 즐겁게 상상하던 영감의 지평도 축소되기에 이른다.


 



 자기 상실의 삶이 이어지는 동안, 잃어버린 자신과 그걸 응시하는 자신, 나아가 어떤 삶의 격차를 느끼는 자신은 어떤 주체인가? 스스로를 수행하는 자로서 삶을 견인해 나가기로 다짐했다면, 그는 필히 세속적인 자극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끊임없이 통제와 단절에의 보초 서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에게 있어 피상성 혐오란 자신을 지키기 위한 공격이자 끊임없이 수행하는 상태를 확인하기 위한 신호다. 반면 자본주의가 마련한 삶의 방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각종 편익과 안위를 안전하게 취하려는 자는 의혹과 망설임을 야기하는 각종 비판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생각하기를 멈춰야 한다. 그에게 있어 자기 의심, 무능력, 실패는 온갖 자기계발의 메뉴얼과 함께 언제나 역량 강화의 조건, 동기부여의 조건으로 활용되어야만 한다. 기업가적 자아로 모델링된 이상, 스스로가 아무리 그런 모델로부터 몸부림을 친다 하더라도 그는 그렇게만 발견되고 포획된다. 그리고 또 다른 태도가 있다. 디지털 세계로의 접속이 사실상 영구화된 21세기에 게임과 콘텐츠가 제공하는 무수한 세계성과 선정성과 키치를 핵심으로 여기는 이미지주의자. 그 삶이 추구되고 지속되기 위해서는 '현생'이라는 세계 소속감을 분리시켜 각종 장애들-방해받는 감각들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매끄럽고 전지전능한 자유의 보장을 필요로 한다. 이때 현생에서의 부름-요청은 그래픽 이미지로 스며들기 위한 윤활제 역할을 하며, 사실상 그들은 최소한의 노력으로 기입되는 '시간 총량'을 어떤 노동의 산물로 전시하기에 이른다. 


 17년이 시작되는 첫날, '이 나'에의 관찰을 시작했던 이유는 바로 이렇게 얽히고설킨 맥락 속에서 어떤 삶을 긍정하며 살아갈지의 모색이었다. 책을 읽으며 강화되었던 건 '비판 정신'이라는 서구 사회의 유산, 하나의 안전한 미덕에서 안정화를 꾀할 수 있는 자의식이었다. 나는 꽤 오랫동안 '자아, 자의식, 주체, 자기 자신'에 관심을 쏟았다. 그 이유는 명확했다. 아무리 감각해도 나의 상태라고 하는 건 결코 단일하지도, 동일하지도, 일관적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 나'를 포착하고 여러 선배들의 논의를 엿보며 스스로의 탐구를 이어갔던 것도, 종합되지 않는 자의식들의 구심 역할을 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이런 의구심을 품고 사는 게 나의 문제인가, 아니면 이 사회-세계의 자장 속에서 연루된 감각인가 확인하는 일도 필요했다. 1차적으로는 다른 사람도 그런 것인가 의아해 하는 일이고, 2차적으로는 다른 시대 사람도 그런 것인가 의아해 하는 일이었다. '무한'과 '분열'이라는 키워드에 관심을 돌렸던 것도, 어떻게 하면 이 감각을 언어로 획정할 수 있을까 하는 실험적 접근이었다. 


 22년 현재, 내가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확신을 갖는 게 중요한 일인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의구심을 품지 않는다. 나는 삶에의 확신을 갖길 바라고, 진정성을 믿으며, 무엇보다 유효한 가치를 추구하는 데 일생을 걸길 바란다. 여지껏 확신을 갖지 못하는 건 이 시대가 그런 것들을 믿을 수 없게 만들었다는 비판적 관점이 진실이기 때문은 아니다. 수많은 학자들이 믿어 의심치 않았던 가치들을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만들었던 '20세기 성찰의 시대'가 남긴 유산은 분명 유효하고 필요한 것들이었다. 세분화된 과학의 발표들은 언론을 통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의혹들을 남긴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당신의 건강을 좋게 만들었던 것이 언제든 당신을 안 좋게(심하면 죽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당신은 더 이상 우리의 연구와 개발에 어떠한 개입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우리가 1인분을 하기 위해 사회로 나가 일을 할 때도 요구된다. 장치(기계, 기술적 발명품)를 노동의 영역에 포섭한 순간부터 인간은 장치 속에 편입됨으로써 장치 밖을 상상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의 노동 속성이란 게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 분기점은 새로운 장치들이 개입될 때마다 발생된다. 그 경험 속에서 자기 역량 강화로 밀려난 주체가 가질 만한 의혹들은 대체로 전체나 사회, 세계, 지구 따위의 거대한 무언가에 '감히' 개입할 수 없을 거란 역할의 축소다. 스스로의 인헨스먼트에 집중하면 할수록, 그는 할 수 있음과 할 수 없음을 명확히 알게 되고, 그렇게 삶의 반경은 네트워크화된 수동적 참여자로 안주한다. 그에게 도달하는 정보량이 증가할수록,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거라는 기여의 의혹에 짓눌린다. 내가 삶에의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게 정말 이런 순간들을 알아볼 수 있게 되어서가 아니라고, 단번에 말할 수 있을까?


 믿을 수 있다는 감각은 그 감각 자체의 기반 상실이 아닌 믿음의 문제가 자신의 태도에 국한될 때 온전히 유지될 수 있다. '확신을 갖지 못하는 건 내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지, 확신을 가질 만한 대상이 믿을 만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하지만 태도의 문제로 넘어가기 이전에, 혹은 동시에 믿음의 대상 자체가 휘발적이거나 피상적이거나 인공적이라면, 그것은 우리에게 믿을 만한 가치가 없다고 느끼게 만든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믿음'이라는 건 단순 명제로써의 사실확인적constative 어휘가 아닌 행위수행적perfomative 발언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존 오스틴은 이를 언어행위에 있어서 분명히 기술해 놓았다. 믿음은 실천적일 때 온전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반복적이어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현재 우리가 21세기에서 살아갈 때 맞닥뜨리는 온갖 '위기'들이 언어화될 때, 자주 겪게 되는 인지부조화-신뢰 상실-방황 등은 대체로 실천할 수 없는 어휘들의 범람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이는 도덕적 진술로 그 정체가 분명해진다.


 이때 중요한 건 반복적으로 수행 가능한가의 여부다. 믿음의 대상이 변할 수 있음은 곧 자신의 반복적 수행 행위가 뒤흔들릴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옛부터 피상성, 휘발성, 인위성에 열등한-경멸적 어조로 그 의미 가치를 절하했던 건 믿음의 기반이 되지 못해 의미화가 충분히 공유되기 전에 소실되었기 때문이리라. 반대로 반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기반이 된, 과거에는 믿을 수 없던 의심스러운 대상이 반 영구화 된다면, 그 속에서 우리는 믿음의 기반으로 삼아 의미화를 꾀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과거에는 열등하게 치부되었던 것이 사회 개혁과 보이지 않는 변혁을 거쳐 사회 기반에 스며들었을 때 사람들의 정신 양태는 달라졌었다. 이의 일등공신은 역시 인공물(기계 기술 장치들)이 차지한다.


 '이 나'는 이런 반복 가능함 속에서 그 명맥을 이어온 주체로 여겨진다. 글 쓰기가 보급된 이래로, 더욱이 지면 위에 '나'라는 에크리튀르적 주체를 호명하면 할수록 '이 나'는 강화된다. 동어 반복은 자기 자신의 자동화 생산 관계의 다른 이름이다. 그 기계적 반복을 지양하고 새롭고 신선한 상상의 세계로 발돋움하기를 권고하는 건 '가능성'의 영역에서 늘상 옳은 것으로 치부되는 결말이 정해진 드라마다. 반면 세계는 기계적 반복을 지향하고 어제와 오늘이 내일과 같기를 바라는 지하의 세계로 변함이 없기를 권고하는 '불가능성'의 영역을 지반으로 삼는 서사 거부의 웅얼거림이다. 사람들이 어떤 결말을 맺어야 할 때 혹은 지금이 아닌 '다음'을 그려내야만 할 때는 안전하고 옳은 것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귀결점으로 삼는다. 이것이 진부하게 느껴질 때는 행위수행적 성격이 사실확인적 발화로 둔갑했을 때다.


 



 현재 '이 나'는 유령처럼 잔존한다. 실제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으며, 어떠한 확신도 느끼지 못하고, 무엇보다 기반 없는 점멸의 상태가 이어진다. 나는 살아가는 데 있어 방황을 멈추지 않고 있다. 빌렘 플루서는 [몸짓들]의 두 번째 장에서 '일을 한다는 것'을 다룬다. 사회의 문턱에서 쓸모에 대해 고민하며 망설였던 15년도, 나는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해 어떠한 결단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플루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일을 할 수 있으려면, 세계가 ‘당연히 그러해야 하는 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런 가설들은 문제를 제기한다. 존재론은 세계가 어떠한지를, 의무론은 세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그리고 방법론은 세계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다룬다. 이 문제들은 서로 맞물려 있다. 세계가 어떤 상태인지 모르고서는 그것이 당연히 그러해야 하는 상태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없고, 세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모르고서는 그것이 어떤 상태인지도 알 수 없다. 또 세계가 변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고서는 그것이 당연히 그러해야 하는 상태에 있지 않음도 알 수 없고, 세계가 어떤 상태인지 모르고서는 그것이 변할 수 있는지도 알 수 없다. 결과적으로, 의무론과 방법론이 없는 존재론은 없고, 존재론과 방법론이 없는 의무론은 없고, 존재론과 의무론이 없는 방법론은 없다.

- 몸짓들, 빌렘 플루서, 워크룸프레스, 2018, P. 19


 우리는 플루서가 말하는 세 가지 일의 조건 중 그 어느 것에도 확신을 갖질 못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세계는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난무하며(우리 모두에겐 언제나 '핵' 한 방으로 세상이 끝난다는 묵시록이 있다), 그래서 우리의 행위로는 어떠한 변화도 야기할 수 없으며(나비효과의 잘못된 해설을 믿지만 우리의 행동 하나로 변화-혁명을 만들어낼 거란 기대는 갖질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대해서 어떠한 답변도 제출할 수 없다. 어떤 장기적인 목표를 세우려고 할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이 못 미치는 거대함에 일찍이 포기하는 게 덜 실패하는 것이라는 훈육을 정신에 새기고 있다. 이에 대해 그나마 현실적인 조건 기반을 제공해주는 곳은 자본화된 공간 안에서다. 비전Vision이라는 단어는 원래 샤먼들이 쓰는 단어였다. 이 단어가 현재 기업의 경영자, 조직 문화, 더욱이 직장인들에게까지 파급되어 있다는 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본 구조에 연루되어 있는 모두가 동일한 조건으로 주체화되어야 한다는 현상의 증거다. 하지만 비전을 갖는다는 건 불확실한 미래에 불투명한 그물을 던지는 행위다. 이것은 플루서의 표현대로 존재론과 의무론, 방법론의 결속을 위한 시한부 세계를 형성한다. 우리는 그 속에서 '일을 한다'는 환상을 잠시나마 품을 수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유효한 태도가 뒤따르는데, 하나는 인지의 조화로움을 위해 '세계' 그 자체를 제한하기, 다른 하나는 비전에 대한 비판과 의혹을 냉소와 조롱으로 전환해 웃어넘기기. 이런 조건들을 떼어내 봤을 때, 과잉확산된 세계상의 속속들이 우리네 정신 지평 속에서의 지분을 점차 넓혀가고 있다면 제대로 '일을 하는' 감각을 유지하기란 더더욱 버거워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현생을 스티커의 접착면으로 두고 환생幻生을 스티커의 이미지로 여기는 삶에 있어서는 '모르는 것이 약이다'. 이때 모르는 것은 봤지만 못 본 것, 보기만 했던 것들의 진부함이고 약은 키치Kitsch다. 실제로 '이 나'가 활개치던 당시의 삶 속에서 나는 키치함을 혐오스럽게 여겼다. 하지만 '이 나'의 주체 권력을 점차 줄여감으로써 키치의 수용성이 증가했다. 이는 과거 기계 기술 산업화가 인간 정신을 황폐화시키고, 비인간적으로 만들며, 무엇보다 인간성의 말소로 이어질 거라는 근심 걱정 우려 염려를 쏟아내던 조상들을 상기시킨다. 이제 막 태동하던 도시 서울의 발달을 보며 군중과 시민들의 양태를 비판하던 소설가들을, 우리는 교육 과정에서 배운다. 그들에게 급변하는 사회 조건, 가시화된 산업화의 산물들은 어떤 경악스러움으로 다가왔고, 이 느낌은 위기감을 고조시키는 디스토피아의 플룻을 안정적으로 여기게 만든다. 그들은 그 가속화에서 어떠한 긍정도 읽어내지 못했던 걸까? 삶에의 확신을 느낄 수 없었던 걸까?


 아마 나의 사적 고민은 공적 감각과는 무관한 것일지도 모른다. 다음 세대 친구들이 자라서 내가 품는 삶에의 문제의식을 마주한다면,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한심하게 생각할까, 시대착오적이라고 여길까, 리터리시의 급변화로 애초에 긴 글과 지루한 글을 읽지도 않을까. 분명 나의 윗 세대들도 비슷한 고민을 토로했던 흔적들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꽤 많은 기성들이 '요즘 젊은 것들은 책을 통 읽질 않는다'고 하소연해 왔다. 나같은 인간이 보기에는 도리어 그들의 세계관은 경직되어 있고, 돌려 말해 얼마나 책을 읽지 않았으면... 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하지만 전쟁 치른 지 100년이 채 되지 않은 한국 상황을 고려했을 때, 역사상 유례 없을 식자 범람의 시대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책방을 운영할 당시만 해도 이 괴리감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다는 착각. 어려운 책은 읽지 않는다는 착각. 더욱이, 글을 통 쓰지 않는다는 착각. 이는 일반화의 오류일 뿐, 그만큼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산다는 도시인의 실존을 드러낸다. 따라서 나 또한 다음 세대를 지금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게 얼마나 허튼 짓인지 안다. 


 그렇다면 나의 불확실이 어떻게 해서 극복될 수 있는지 작은 단초가 확인되기도 한다. 존재론과 의무론, 방법론에 있어서 1차적으로 세계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 끌고 왔던 게 20대의 삶이었다. 자기 자신이 어떠한지를, 자기 자신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이에 대해서는 슬로터다이크의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가 가장 유용한 지침서가 될 수 있다. 그 책을 완독하고 난 독자는, 그의 관점과 주장에 공감과 동의를 할 수 있는 독자는, 면역에 민감한 예방접종자가 되어 우선적으로 자기 자신을, 결국에는 세계를 온전하게-건강하게 만들기 위한 상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자기 수행'이 가능한 자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슬로터다이크도 자신만의 은유로 잘 표현했듯, '자기 수행'이 가능한 자는 본래 돌이킬 수 없음의 변혁을 통과하고만 자다. 그들은 때로 낭만주의자의 표상으로 다뤄지기도 했고, 특히 20세기 작가, 철학자들의 '가능성 지표'로 포착되던 티핑 포인트다. 이것들이 의미하는 바, 자기 자신에 대한 존재론과 의무론, 방법론을 슬로터다이크식 '자기 수행론'으로 운용될 때 나는 두 갈래를 마주한다. 하나는 기업가적 자아, 다른 하나는 튜링스 휴먼이다.


 나의 관찰로는, 기업가적 자아가 튜링스 휴먼으로 거듭날 수 있는지 아직 불분명하다. 하지만 전자는 세계에의 염려로부터 소외되는 부조화를 겪을 수밖에 없고, 후자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인간형이다. 현재 나의 주체성은 유령화되어 부전감에 시달리지만, 이 부전감을 긍정하는 (아직은) 유일한 방법이 결국 불완전한 세계와 관계맺기로 나아가야 한다는 인상이다. 여러 저자들도 언급하고 있지만 '고대로의 회귀' 현상은 점점 번져가고 있다. 플루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컴퓨터화'된 세계관을 중심으로 자전하지만, 그래서 사물의 이면, 습관의 이면, 말의 저의, 표현의 의도, 설계의 의도, 모델, 시스템 등을 '아무렇지 않게' 응시하고 표현하지만, 우리가 설계된 세계 속에서 어떠한 개입도 할 수 없이 우리 앞에 뿅 하고 나타나는 마술적 세계가 고대와의 유사성을 나타낸다. 현대의 엔지니어, 개발자, 과학자, 기술자들이 고대의 샤먼과 주술사라는 대조는 일견 설득력을 갖추는 느낌이다. 하지만 우리는 고대인들과는 다르게 그들을 축제로 초대하지 않는다.


 우리의 On-Life를 지탱해주는 다양한 장치들이 어느덧 토템화되어 주변화되었다는 관찰에 나는 동의하고 있다. 제의적인 의식 행위도 내비추고 있지만, 우리가 유령들과 교감하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유령이 되어가고 있다.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존재가 포착된다는 관점에 동의한다면, 21세기 On-Life 사람들은 모두 유령으로 떠돌아다닌다. 그 누구도 그들에게 실체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이 실체를 요구한다면 이는 점점 더 공포스러운 무엇인가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소위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들이 어떤 존재론을 확장해 나갈지 상상해 본다면, 그들은 우리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반복 수행되는 지형도가 판이하게 달라질 것인데, 그 차이를 우리는 따라잡을 수 없다. 우리는 여전히 실체 없음에 익숙하지 않다.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구분지어 감수성이 다르다는 접근은 그 어떤 것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미국에서 LP 판매량이 급등했고, 주요 소비자가 MZ세대라고 해서 아날로그 감수성이 부활하고 있다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플루서의 적확한 관찰대로, 기성 세대가 진정성 있는 어떤 시간의 총체를 가장 좋은 것으로 여겼다면 그 대타항은 거짓과 허상이 아니라 바로 키치다. 우리 세대는 키치에 익숙하고, 키치를 수용한다. 한 일본 정신의학자는 이런 젊은 세대의 피상성을 분열병적인 정신 특징으로 해석하지만, 그래서 깊고 끈질긴 것에 어떠한 노력도 갖질 못하고 바라지도 않는 미숙함의 표징으로 여기지만, 그런 것들은 그저 시간과 수고가 많이 드는 불필요한 태도일 뿐이다. 돈만 내면 신제품을 살 수 있는 감수성과 유사하게, 시간과 노고가 드는 일에 결과물의 이미지만 취하고 그 과정에 스스로가 개입되는 건 혐오스러운 일로 여겨진다고. 이를 '이 나'의 부재로만 보기에는 전혀 설득력이 없다. 우리는 분명 유령화되어 있지만, 접속 상태의 다른 이름이지 정체화된 동일시로서의 주체는 아니다. '이 나'의 요청은 번지수를 잘못 찾을 수밖에 없다.


 각종 위기들의 만연함이 우리를 부전감에 시달리게 만들고, 나아가서 감수성의 지형도가 전환되었음을 긍정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행위는 그만큼 왜소해질 수밖에 없다. 유령 상이 불완전을 의미한다면, 유령이 배회하는 세계는 그만큼 불확실한 곳이다. 존재의 부전감은 세계의 온전함 속에서 긍정될 수 없다. 필시, 세계는 불완전한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는 인식론과 존재론의 선후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보는 방법이 곧 존재 방식이고, 존재 방식이 곧 보는 방법으로 교차되는 맞물림을 받아들인다면, 불안은 박동으로 변모할 수 있다. 나를 위한 말이기도 하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세계는 유령들의 세계였다. 내가 유령이 되지 않고서는 교호할 수 없었던 것일까? 나는 수행자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였고, 한 번은 포기한 낙오자다. 그 누구도 나에게 올바름을 제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의 방황은 의미의 자리, placeholder가 된다. 나는 이제서야 '수행修/遂/隨行'의 의미를 바로 잡는다. 다만 기예의 성질이 변질되었고, 정신의 정화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닌 변태에 목적이 있다. '이 나'는 불가능을 기점으로 후퇴해 밑바닥으로 떨어진다. 그곳에서 반복의 의미를 수정한다. 나에게 있어 반복은, 의미 그대로 돌이킬 수 없음으로부터의 회복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반성이라는 함정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