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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May 27. 2022

나의 동네, 상도 1

16.10.29


 7월 25일


 더위가 지속되고 있다. 달아오른 기온은 몸에서 빠져나가려는 열을 받아주지 않고 있다. 이 세계를 꼼짝 못하게 포위한듯. 우리는 벗어 던질 수 없는 육체를 닦아가며 저항하고 있는 걸까. 그 시늉들은 마치, 이 무더위는 도대체 언제 끝나냐 같은 저주의 자세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각자의 기도는 결국 하나로 모이지 못했다. 더위는 지속되고 있었으니까.


 여름에 갇힌, 공중으로 떠나가지 못한 채 수그린 모양으로 책상 앞에 자세를 잡는 어떤 열기의 덩어리는, 지팡이 같은 펜을 붙든다. 기도들을 한 줄 한 줄 긋기 시작하며. 자꾸만 섬망에 빠지는 의식과 말라가는 입술을 동반한 채, 치열과 무력을 양손으로 삼은 채, 끄적이는 오른손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반쯤은 미쳐버린 채. 하지만 이 이상한 상태가 나를 구원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더위는 모두에게 제공되었지만 그런 쓰기는 오직 이 방에서만 가능한 기도였으니까.


 그런 7월 25일이라고, 나는 받아 적었다. 열기가 더해질수록, 의식이 혼미해질수록, 방에 갇힌 나는 내 안에 갇힌 열기로 인해 점점 더 스티커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눈앞의 백지장이 눈의 고장처럼 펄럭이기 시작하고. 온통 하얀 이 가공된 섬유를, 쉽게 찢어버릴 수 있고 무용하게 쌓아둘 수 있는 그런 창백한 낱장을, 열기를 통과한 가느다란 심으로 받아 적는 일. 하지만 나는 받아 적는 동안 무엇을 적는지 결코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었다. 또 그것은 하고 싶었던 말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런 종류의 말일지도 몰랐다. 그런 무력감 앞에 앉아 있는 나는, 이 서늘한 세계로의 매혹을 떨쳐버릴 수 없었기에 마구 써 제쳐야만 했다. 눈앞의 종이를 가만둘 수 없다며 달려들었던 것이다. 무한한 추위로 뛰어드는 뜨거운 공처럼.


 그리고 이런 쓰기를, 나는 고장 난 여름의 시간들이라고 불렀다. 시계는 사실, 시간을 등록하고 싶었던 인간들이 발명한 예언의 무덤이었지만, 그 관마다 누워 있던 기억들은 가끔 이상한 날씨가 올 때마다 벌떡벌떡 일어나 자기만의 무대로 삼는다는 소문이 있었다. 가령, 유리창을 사이로 세상이 온통 젖어드는 걸 보는 날이라든가, 싸늘해진 바람이 나뭇잎을 낙엽으로 만들며 거리를 배회하는 날이라든가, 그러니까 기상氣象과 기분이 조율하여 어떤 조화를 이뤄내는 기적 같은 날 기억은 기상起牀한다고. 그런 날이 오면 반드시 시간들이 동요한다고. 물론 세계의 시계들은 멈추지 않고 잘 움직일 것이다. 발명된 이래로 멈춰본 적 없었기에.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동요되는 것이다. 기상한 기억들은 더 이상 잠들어 있지 않기에 잠든 사람의 규칙적인 호흡처럼 돌고도는 시계의 장치를 혼동시킨다. 똑딱거리는 리듬에 개입하고, 순차적인 날짜에 기입되고, 이 날과 그 날은 더 이상 같은 날이 아니게 된다. 그때의 7월 25일과 오늘의 7월 25일이 ‘7월 25일’로 모인다. 각개의 날짜가 하나로 모인다. 이런 갑작스런 해후가 벌어지는 곳, 그 지면紙面은 바로 이 창백한 낱장이다. 그렇게 기억 속의 지면地面과 지면紙面은 밀회를 맺는다.




 7월 25일


 여름, 너는 지나치게 더웠고, 잠은 언제 내쫓겼는지 기억도 안날 만큼의 열대야가 계속됐다. 이번 더위는 치열하구나. 몽롱하다. 난 제정신일까? 눈을 뜬 채 꿈을 꾸던 며칠간 글자를 긋지 않으면 손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은 점점 외설스럽게 변하고 있었다. 거리로 나가 벗기 시작했고, 벗어서 거리로 나가기 시작했고, 벗어던진 걸 누구도 주워가지 않았다. 이런 무더위가 오면 젊은 최승자의 『여자들과 사내들』이 떠올라 매미처럼 뒤지르게 돼 도시의 여름밤이 밉다. 산이 있는 이 동네. 상도동은 높이가 있어 조금만 오르면 시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서울의 밝기는 지나치게 분명했고, 쉬이 꺼지질 않았고, 그래서 밤이 되면 아름다웠다. 아름다워서 미웠다. 밝기가 분명한 것들을 나는 아름다움이라 부르고 열렬하게 미워했다. 그래야만 심장의 고동이 고막에 닿았다. 이 무력이 언제부터였던가? 말을 앗아가는 순간들, 거대한 무력에 휩싸여 완전한 공포에 잠식당하는 바로 그 순간들. 너무나 아름다운 순간들. 내가 사는 이 동네 사방에는 빛이 너무 많았다. 가로등이 벗어 던진 빛들이 바닥에 뒹굴었다.


 나의 동네, 상도. 고개와 언덕에 오르면 사방의 빛들을 둘러볼 수 있는 동네, 상도. 산과 사찰이 있어 유년의 여름을 외롭지 않게 했던 동네, 상도. 생애의 칠할을 고스란히 품어 애증의 둥지가 된, 상도. 같이 살던 식구 하나가 땅으로 돌아가 버린 이후, 시간이 엇나가버린 나에게 여전히 열린 관 뚜껑처럼 찝찝하면서도 들여다보면 오싹해질 것 같은 이 공동. 나는 이 동네가 얼마나 많은 유년의 얼룩을 묻히고 있는지 감히 모르지 않건만, 내가 엎지른 얼룩에 아무런 오염도 되지 않은 것 같은 이 동네가 싫으면서도 좋지만. 며칠째 새벽을 똑바로 보내지 못하는 나에게, 바깥에서 벌어지는 실감나는 사실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단 식으로 등을 돌린 나에게, 이 동네는 아직 할 일이 남았다는 듯 미처리 상태로 의식을 떠돈다. 한동안 열대는 가시지 않을 것이었다. 아직, 7월 25일. 의식은 엄숙한 시간에 치러져야 한다고, 새벽이면 의례처럼 공책을 꺼내고, 새벽녘의 안식이 오면 다시 서랍 안에 봉인되길 며칠째. 상도는 종잇장에 조각조각 바로세워진 채 열기를 식혀가고 있었다.


 하여, 쓴다. 종잇장은 중얼거림으로 엉망이 될 일이니, 다시 떠올린다, 다르게 떠올린다. 무르익은 과일처럼 잘 열린 불온한 기억들. 연약한 살부터 벌어져 나를 유혹하고, 이 좁은 틈으로 손을 넣어봐, 들여다 봐, 헤집고 더듬거려, 어때? 눈은 손이, 손은 눈이 되어 현실과 동떨어져 봐, 그렇게. 손끝이 분주할수록 기억에 잠식당하는 모험 같은 잠수 같은 숨바꼭질. 하지만 그 속에서 무엇을 찾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숨쉬기가 가빠질수록 혈안이 된 나의 눈/손은 한 치 앞의 그림도 안개로 만들어 나를 놓친다. 잃어버린다. 고의로, 미아로 만든다. 이 모험의 끝에서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내가 기대하는 건 도대체 무엇인지, 그리고 언젠가 마침내, 이 모험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거란 희망이 과연, 받아 적는 나와 그걸 읽는 나에게 도착할 수나 있을지, 알 수 없다. 알아낼 수 없을 것이었다. 어쩌면 쓰기를 멈추는 그 순간, 알고 싶지 않을 것이었다. 발견하는 즉시 쓰기를 멈추게 될지도 모를 일. 나의 공책은 나에게 아무런 발견도 보여주지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쓴다. 손은 나를 잊어버린다. 다른 손은 필기하는 오른손의 글자를 의심한다. 종이는 시간을 기록하고 먼저 보여주지 않는다. 반드시, 우연이라는 느낌 아래 그 시간은 태풍처럼 나의 정신을 강타할 것이다. 잉크에 젖은 종이의 시간은 추위처럼, 오지 않으면 모른다. 오고 나면 피할 수 없다. 덜덜 떨며 견뎌내도록 하는 그 계절, 겁 많은 유년은 겨울을 사랑했다. 여름에 겨울을 쓰는 일. 그것은 내가 유년을 사랑하는 이유이면서 동시에 증오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 유년의 계절은 항상 여름이었지만, 나는 언제나 겨울을 동경했다. 그것은 외로움과 관련된 지독한 짝사랑이기도 했다. 상도동은 다행히, 여름에 어울리는 동네였다. 산이 있었고, 언덕이 있었으며, 그곳에 오르면 석양의 노랑 빨강 주황으로 태어난 온갖 잠자리들이 들판을 가르며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것을 잡고 싶었다. 하지만 공중을 나는 잠자리를 공중에서 잡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그 잠깐의 저물녘이 끝장나면 신기하게도 비행하던 잠자리들도 사라졌다. 광란의 축제가 끝난 허기처럼 저녁이 내려앉을 때 언덕을 내려오며 집으로 돌아가던 유년이, 지금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 구쁜 열망들이 여전히 생생하다. 그리고 겨울이 오면, 필시 눈이 꼭 한 번씩은 크게 내렸고 상도동의 언덕들은 꽝꽝 얼었다. 그리고 우리는 국사봉 밑에 난 큰 내리막길에서 줄곧 포대를 타고 놀며, 사자암 밑에서 천자문을 외웠다. 어떻게 그곳에 다니게 되었는지 기억은 나질 않지만, 그 해 겨울은 한자와 포대가 방학을 수놓았다. 요즘 겨울에는 빙수골마을공원에서 마을의 한방을 깨부수며 노는 뽀득거리는 아이들을 본다. 그때 낙원주택 옆 공터는 잔해로 가득했고, 청운종합복지원 주차장에서 놀던 아이들에게 비밀은 없어보였다. 여기에서 유년을 쓰는 일. 그것은 내가 동네를 사랑하는 이유이면서 동시에 더 다가가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것은, 세기말 아이들로 자라났던 우리 또래에게 더욱 해당되는 이유일 것이다. 나의 동네, 란 것이 사라지기 시작한 건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니므로.




 98년, 어린이날을 보낸 5일 째, 비오는 날 트럭에 실린 가구들과 함께 이곳, 상도동으로 이사 왔다. 상도동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외조부모가 살던 동네였는데, 더 이상 자식들의 양육에 관여하지 않을 만큼의 세월을 보냈으므로 외조부모는 귀농을 결정하게 됐다. 외조부모가 살던 다세대주택의 반지하는 방이 두 개였고 거실과 부엌이 딸린 가정집이었는데, 뒷산 어귀 근처에 위치했으므로 동네로 치자면 꽤 높이가 있던 거주지였다. 내가 이사 올 무렵엔 이미 외조부모가 시골로 이사를 다 끝마친 상태였고, 막내 이모만이 학업을 위해 남아 있던 상황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나는 고작 아홉 살이었고, 이사에 참여할 힘이 없었으므로,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방해가 되지 않으면 다행일까, 너무 멀리는 말고, 근처에서 알아서 놀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홉 살의 역할이었으니까. 만약에라도 엄마가 부른다면 언제라도 대답할 수 있는 사정거리는 터득한 아홉 살이었으니까. 추적추적 비를 맞으며 집에 가구를 비롯한 온갖 물건들이 심겨질 때, 나는 동네 어귀 쯤 담벼락 밑에 핀 민들레를 괴롭히고 있었다. 오월이었고, 어린이날은 아주 오래 전에 끝나버린 것 같았다. 상도동에서의 첫 날이었다.


 상도동은 나를 다른 세계로 집행했다. 내가 갖고 있던 세계는 태어나서 곧 자란 난곡동이었는데, 그곳에서의 생활이 봄처럼 따뜻하고 노곤하고 싱그러운 것이었다면, 앞으로 시작 될 상도동은 봄을 묻고 뚜껑에 못을 박는 우렁찬 소리로 나를 환영했다. 갖고 있던 세계를 약탈했고, 호령과도 같은 언덕길과 골목길들로 미지를 선보였다. 나에게 있어 상도동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기에, 마치 살아있는 괴물처럼 두렵고 겁나고, 그러면서도 여느 어린애처럼 무엇이든 놀이로 삼을 수 있는 장난감 박스처럼, 낯설고 신기한 곳이었다. 상도동에 있는 한 초등학교는 다음 날부터 나를 등하굣길에 오르내리도록, 그리고 그곳에서 공부를 하고 친구를 사귀고 뛰어 놀고 다치고 다투는 학교생활을 하도록 했다. 상도동은 고작 아홉 살이었던 약 120cm짜리 남자 아이의 유년을 형성하는데 어떠한 거부도 하지 않았다. 어떠한 조력도 하지 않았고, 다만 있는 그대로 있었다. 그렇다고 나의 심리가 상도동이라는 동네와 섞일 수 없었던 건 또 아니다. 내가 처음 이사 왔을 때 그곳은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않는, 말 그대로 미지이자 타자였다. 동네의 사물들, 집과 담벼락, 콘크리트 길바닥과 슈퍼들, 수많은 샛길들, 친구의 집 등등이 그랬다. 이것들은 상도동이 갖고 있는 것들 중 일부였지만, 그렇다고 나의 행동을 이끌도록 어떤 의지를 내보이거나 하진 않았지만, 나는 이것들이 마치 자신과 맺는 일종의 관계처럼 노골적인 것들로 여겼다. 길이 나 있으면 나는 곧잘 길의 끝까지 걸어갔다.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나 작지만 뾰족한 돌, 온갖 잡동사니들은 나의 호주머니로 들어와 손에 붙잡혔다. 집집마다 세워진 담벼락이 보이면 나는 낙서를 하고 싶어 했고, 그 담벼락마다 틈새라도 보이면 꼭 한 번씩 쑤셔보곤 했다. 상도동은 나에게 있어 새로 찾은 놀이터가 되고 있었다. 


 높이가 있는 동네는 언덕길과 내리막길 골목길 산길 등 좁지만 다양한 길을 갖고 있다. 내가 상도동에서 살기 시작했을 무렵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길을 외우는 일이었다. 취학아동인 나에게 필요한 길은 등하굣길과 놀이터를 기점으로 삼는 온갖 샛길이었고, 그렇게 한 번 걷게 된 길은 보통 누구도 의심하지 않게 되었지만, 호기심이 많은 나에게 길은 언제나 모험이었다. 처음에는 무작정 가방 멘 아이들을 따라다녔지만, 아이들도 저마다의 샛길을 가지고 있어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미아가 돼버리곤 했다. 그건 우리가 같은 집에 사는 게 아니라는 걸 뜻했지만, 나는 그 후에도 종종 다니던 길을 놔두고 다른 샛길로 빠지곤 했다. 특히 하굣길에 그랬는데, 시간이 정해져 있는 등교와는 다르게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없었던 나는 학교가 끝나면 친구가 사는 집 쪽으로 같이 걸어가 보길 즐겼다. 막상 같이 걸어갈 때는 모르지만, 친구가 집에 들어가 버리면 그제야 혼자임을 알아차린 나는 어깨끈을 붙들고 걸음이 다급해졌다. 그리고 유독 그런 시간이 나에게 많았다. 외로워서 그랬을지, 호기심이 많아서 그랬을지, 외로워서 호기심이 생겼을지 알 수 없지만 나는 항상 친해지고 싶은 친구가 있으면 집까지 같이 가주는 습관이 있었다. 방향이 완전 반대인 경우도 왕왕 있었으나, 막상 하교 시간이 되면 친구와 같이 보내는 시간에 집에 돌아갈 걱정 같은 건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덕분에 나는 상도동을 점점 하달지리하게 되었지만 이상하게 혼자 있는 시간이 점점 더 늘어만 갔다. 그리고 그렇게 수도 없이 걸었던 길들은 포장되어서일까, 수 년간 밟아도 발자국 따위는 그 어디에도 생기지 않았다. 그 길들은 나의 흔적을 허용하지 않았지만 나의 기억에는 그 길들의 흔적이 남아 있어 상도동의 골목골목은 나에게 흔적을 남기는 데 성공했다. 지금은 이 길들에 어린이보호구역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당시에는 그렇지가 않았고, 따라서 호명할 수가 없었다. 이 동네에는 산도 있지만 집과 집 사이에 담장들 없이 가깝게 붙어 골목을 만드는 동네이기도 했기에, 어떤 담을 넘으면 샛길이 나오고, 어떤 집을 가로지르면 어떤 길과 맞닿는 등의 지름길이 꼬마들 사이에서 형성되기에 유리했다. 따라서 그때 아이들은 아주 다양하고 복잡한 길들을 외우고 있었는데, 불려지지 않는 그 길들은 오직 아이들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상도동에서의 생활에 점점 익숙해질 무렵, 동네 아이들과 함께 나는 빠르게 자라나고 있었다. 세기말 아이들답지 않게, 아니 외환위기의 그늘이 아이들의 활발을 덮어 버리지 못한 채, 나와 아이들은 아무 걱정이 없었다. 준비, 시작! 하면 뛰고 숨고 쫓고 다투기 바빴다. 그것은 하늘이 정말 검어지기 전까지 허락된 놀이 시간이었으므로, 세상의 그늘은 오직 하늘의 암막뿐이었던 것이다. 나중에서야 안 사실들이 참 많지만, 세기말이라고 하는 건 정말 많은 시름들이 무르익는 시간이었다고, 해당되지 않는 세기말 아이들답게 반쯤 의구심으로 회상해 보지만, 집과 집 사이, 주차장과 자동차 사이, 동네에 나있는 온갖 틈이라면 비집고 들어가 놀아대기 바빴으니, 정말 아이들은 아무 걱정이 없었다. 오히려 아이들에게 절대적인 걱정이란 집과 부모가 전부였기에 놀다가 다치기라도 하는 날엔 엄청난 걱정에 짓눌려 다친 사실을 감추려고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다쳐서 집에 들어가는 날엔 생채기의 쓰라림도 쓰라림이지만 불호령처럼 떨어지는 꾸짖음과 온갖 놀이 금지들의 두려움 때문에 아픈 사실을 감추는 아이들도 종종 있었다. 한 번은 내가 무릎을 다쳤을 때 ‘놀다가 다쳤어요’라는 말을 도저히 할 수가 없었던 적이 있었다. 미안해하는 친구를 집에 돌려보내고 홀로 구급상자를 뒤져 거즈를 붙이고 옷으로 가려 다 나을 때까지 한 번도 부모 눈에 걸리지 않았던 적이. 물론 이런 것도 동네에서 뛰어 놀다보면 생기는 자질구레한 상처들의 경우 가능하지만, 한 번씩 크게 다치는 날이면 다음 날부터 놀이터에 그 아이는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 아이가 모습을 보이는 날은, 놀다가도 다치지 않을 정도의 민첩한 경계심을 온몸으로 체득한 상태로였다. 당시 내리막길은 아이들의 주된 놀이터였고, 바퀴 달린 기구들을 타고서 정신없이 굴러 내려가거나 쫓고 쫓기는 달음박질을 하는 등 아이들 사지에 상처가 나는 주된 길바닥이기도 했는데, 아이들에게 사용되는 내리막길은 차가 다니지 않는 주거지역에 있어야 했다. 공을 찰 수 있는 공터나 집 앞 골목길, 주택들이 즐비한 통로가 아닌 길들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기에는 부적합한 편이었고, 달리 보면 아이들에게 상처를 내지 않는 길이기도 했다. 그때 아이들은 동네에서 노는 일이 아니면 보통 다칠 일이 없었다.


 그 해 여름이면 나는 뒷산에 올라 온갖 곤충들을 잡고 다녔는데, 방학이었고, 혼자였기 때문에 채와 채집통만 있으면 심심할 수 없었다. 아침이면 아무도 없는 집에서 일어나 차려진 밥을 먹고 채비를 맞춘 뒤 뒷산에 올라 저물녘의 잠자리를 마지막으로 집에 돌아오는 일상이었다. 나는 주로 혼자 다니며 매미를 잡았다. 곤충 사전을 뒤적거리며 세상에 매미는 아리따운 것부터 온갖 신기한 무늬들이 있음을 알았지만 뒷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종류는 매우 제한적이었고, 또 나의 신장과 휘두를 수 있는 채의 길이가 더해진 높이에서 잡혀줄 매미는 더 제한적이었다. 그 여름, 나는 정말 많은 매미들을 잡아넣었다. 채집통은 언제나 득실거렸고, 그것은 마치 훈장처럼 산길에서 마주친 또래의 어깨에 멘 채집통과 비교되는 상징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거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고, 오직 채집에만 열중했다. 더욱이 산길에서 또래를 만나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하루 종일 산에서 놀다보면 한 번쯤은 통과하는 곳이 있는데, 약수터가 바로 그랬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이면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고 멱을 감기 일쑤였고, 허기가 져도 물을 벌컥벌컥 마셔대면 쾌적하니 든든해졌다. 국사봉은 배드민턴 시설도 마련되어 있었고 약수터도 동북쪽과 서쪽에 각각 있어서 주민들에게 자주 등산되는 곳이지만 산을 아예 놀이터로 쓰는 꼬마는 별로 없었던 탓에, 사람들이 모여 있을 법한 약수터에서도 나는 또래를 만나기 힘들었다. 따라서 운이 좋은 날에는 하루에도 수십 마리 매미를 잡을 수 있었는데, 당시는 살아있는 곤충을 채집하는 일이 그저 더 생생한 장난감을 줍고 다니는 일처럼 여겨져서는 그렇게나 많이 잡았던 매미들을 다 풀어주지도 않은 채 고스란히 집에 갖고 와 밤새 매달아두었던 적이 있었다. 매미의 한살이는, 특히나 사람 눈에 띄는 매미 성충의 한살이는 그렇게 길지 않으므로 산란도 하지 못한 매미들을 나는 그렇게 잡아 죽였던 것이다. 채집통에 갇힌 매미들, 특히 국사봉에는 애매미와 참매미가 많았는데, 나에게 잡힌 애매미들은 가정집 천장에 매달려 개미의 밥이 되거나 기운이 빠져 시들어 죽고 말았다. 그 꼴을 한 번 봐버리고 난 뒤에는 꼭 집에 오는 저물녘에 도로 놔주어 채집통을 텅텅 비우고 귀가를 했지만, 종일 붙들린 곤충들은 힘이 다 빠진 상태로, 휘청거리며 날아가는 모습을 나는 귀가를 마중 나온 엄마처럼 바라보곤 했다. 이후 나는 매미를 잡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놀이들도 집집마다 컴퓨터가 보급되기 시작한 이후, 아이들은 바깥에서 노는 시간보다 사이버 세상에서 노는 시간에 더 구체적이고 실감나는 재미를 느끼기 시작하여 사라지게 되었다. 동네는 갈수록 조용해지는 모양새였다. 120~130cm 또래들이 자주 놀았던 호수문방구나 대성문방구, 슈퍼 앞 오락기들이 점차 작아지거나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곳 앞에서 옹기종기 쭈그리고 앉아 딱지를 치거나 구경을 하거나 공기를 하거나 따먹기를 하던 열기들이 학원으로 모집되어 하나둘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가정용 컴퓨터의 보급과 동시에 방과 후 학원의 일상이 아이들의 생활을 차지하기 시작한 이후로 동네는 그런 모양새를 띠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나도 마찬가지 다른 세기말 아이들과 컴퓨터 게임에 완전 빠지기 시작했으므로, 더 이상 국사봉은 놀이터가 아니게 되었다. 그곳은 이제 추억이 되어 버려, 그렇게 놀았던 기억만으로 운이 좋으면 재현해보는 일종의 이야기로 변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유년의 상도동은 서서히 탈바꿈에 들어갔다. 동네에서 자라는 아이의 심리에 따라 그 동네는 다르게 기억되고, 심지어 있던 집이 사라지는 것처럼, 어떤 용도들도 사라지곤 한다. 가령 아스팔트로 포장된 집 앞 길가는 우리한테 낙서장이자 놀이판이었다. 자동차가 잘 다니지 않는 도로여야 했고, 간혹 지나가는 오토바이로 놀이가 중단될 때 말고는 방해할 것이 없어야하는 그런 길가여야만 했다. 잘 긁히는 돌을 주어다 마구 긋다 보면 하얗게 갉작이게 되어 땅따먹는 도식을 그리거나, 친구 이름에 바보 멍청이 하트 따위를 붙여가며 야유를 새기기도 했다. 돌과 콘크리트로 쌓아올린 담벼락에는 항상 부식된 작은 구멍들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가끔 한국깔때기거미들이 집을 지어놓고 있었다. 심술궂은 어린 시절, 동네 길목에 굴러다니는 나뭇가지나 작은 돌, 부스럼들이 있으면 나는 꼭 그걸 주워 다 담장에 나있는 구멍들을 쑤셔보곤 했다. 거미집과 개미집을 망가뜨리기도 했으며 담과 바닥 사이에 핀 온갖 풀들을 뽑기도 했다. 동네에 반드시 있는 이런 구석들은 주로 아이들이나 가까이 다가가지 어른들은 전혀 흥미가 없으므로 그럭저럭 유지가 되는 것들이었다. 다시 말해, 놀이감은 어디든, 언제든 주변에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파트도 들어서고, 사자암 밑에 놀이터와 연꽃어린이집 건너편 언덕도 황폐해지거나 사라져버렸다. 주택들도 점점 오피스텔이나 신형다세대주택으로 재건축에 들어서고, 유년에 있던 대부분의 친구 집들은 허물어지고 완전히 다른 집과 사람이 들어서게 되었다. 낙서장이었던 담장들도 주차공간을 위해 허물어지기 시작하고, 담장이 필요 없는 다세대주택으로 높이가 올라가기도 했다.


 우리는 더 이상 동네에서 놀지 않게 되었다. 동네는 계절을 잃기 시작했고, 키가 자라면 자랄수록 커지는 발의 크기에 비례하는 세상에 맞춰 아이들은 교통도 이용하고 다른 지역에 갈 수 있게 되었다. 날씨는 더 이상 동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세계가 확장된 것이었다. 상도동에 국한되어 있던 세계의 울타리가 월담되어 점점 그 영토가 넓어진 것이다. 결국 우리는 더 이상, 동네를 사랑하지 않게 된 것이다. 다른 지역, 다른 동네, 다른 학교로 길이 확보될수록 이 동네는 희미해져갔다. 거주지로 분류될 뿐인 동네의 의미는 여느 대화에서도 주제가 되질 못했다. 무엇보다 같은 동네에서 같이 노는 친구들의 수가 급격히 줄어 거의 한 명도 남아나질 않게 되었으니, 동네의 기억은 다른 의미로 미지의 세계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처음 이 동네에 이사 왔을 때의 두근거림은 앞으로 더 이상 나의 두려움을 대신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 실감을 공유할 또래는 앞으로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동네는 섬이 되고 있었다. 혹은 양식에 기입되는 글자가 되고 있었다. 어디 사세요? 집이 어디에요? 같은 질문들에만 호명되는 동네. 그렇지 않으면 바깥에서 잘 호명되지 않는 그 이름, 상도. 이것은 나의 유년과 같은 변화를 거친다. 동네는 기억되지 않으면 사라진다. 마찬가지 유년도 기억되지 않으면 사라진다. 장소는 여기 있지만, 그 장소가 기억되려면 동네에 살았던 주민들은 저마다의 기억들을 떠올려야만 한다. 그 장소에서 보낸 세월을 바로 세워야만 한다. 그래야만, 동네는 기억되고, 호명될 일이었다. 이런 모든 변화가, 이런 탈바꿈이, 어린아이들이 떠나가면서 생기는 모습이라면 성장통을 거친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동네를 허물처럼 벗어 어딘가에 두고 지금까지 온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4월 1일

 시간이 엇나가버린 나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우울을 가누지 못해 휘청거렸다. 같이 살던 식구 하나가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으로 갔을 때, 지워지지 않는 백색 셔츠의 핏자국처럼, 살던 집은 남은 가족을 과거로부터 놔주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리 눈물을 흘려도 지워지지 않았던 것이다. 새빨간 얼룩은 너무나 눈에 잘 띄어 못 봐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머리가 무거웠다. 무게가 무거워 웃을 수가 없었다. 시간은 무자비하게 나를 자라나게 해놓고서 아무런 책임도 지우지 않으려 했다. 나는 여전히 미수로 남은 유년의 사건들이 남았음에도, 꾸역꾸역 자라났고, 머뭇거리며 자란 나는 어딘가 멈춰있는 것 같았다. 자라는 걸 승인받지 못한 나는 어떤 보상을 요구하고 싶었다. 아무도 남아있지 않은 이곳에,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이때에.


 그때에 동네는 이상하게 여겨지는 사람 몇몇을 품고 있었다. 골목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다니는 K는 말끝마다 ‘살인죄’를 붙여가며 어떤 하소연을 크게크게 하고 다녔다. 그는 충분히 위협적인 이웃이었지만 다른 별짓은 하지 않았고 그저 소리를 내지르는 것뿐이었는데. 어떤 이웃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고, 신고를 했다. 서로 잡혀간 K의 진술에 따르면 동네는 지옥이었다. 온갖 살육이 난자하게 벌어지고 이웃은 사악한 악마며 생활은 끔찍했다. 취조하던 경찰의 눈에는 그가 악마처럼 보였다. 서로는 서로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의 죄목은 소란죄로 접목될 것이었으나 그는 감히, 동네를 용서할 마음이 없었다. 그에게 내려진 처벌은 가벼운 조치로 일단락될 것이었지만, 동네를 향한 그의 공격은 결코 누그러지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동네를 완전히 다르게 기억하고 있었고, 그 동네에 같이 사는 이웃들은 그가 미쳤다고 여겼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에게 괜찮냐고 묻는 모든 사람들이 미쳐보였다. 어떻게 사람이 죽었는데 괜찮을 수가 있어? 나를 만나는 족족마다 전단지처럼 건네는 그 안부에 금방이라도 미쳐버릴 것 같았다. 나는 더 이상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은 간혹 동네에 돌아다니는 이런 미친 사람을 누구보다 유심히 관찰했다. 그들을 미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오직 그들의 부모와 주변 사람들의 손가락질에서부터였으며, 그것이 아니었다면 미친 사람이란 단어의 의미를 아이들은 절대 알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의미라고 하는 건 정서를 공유한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그걸 확인하는 일이기도 했으니까. 그래서일까, 아이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걸 자랑스럽게 또래에게 알려주곤 했다. 특히 미친 사람을 발견하면 더욱 그랬다. 그들은 사회가 규범화한 장애의 분류에 한 가지 혹은 몇 가지가 포함되는 특징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생활에서 그들이 가진 특징은 그들을 더욱 외롭게 할 뿐이었다. 그들에게 말을 걸고, 접촉을 시도하는 건 때로 아이들에 의해서였고, 그것이 놀림과 야유, 비아냥 또는 멸시를 동반한 행동이었다 하더라도, 그런 행동조차 하지 않으면 그들은 누가 먼저 다가오는 경험을 자주 누릴 수 없었다. 성대시장에도 아이들의 공포와 놀림을 담당하는 몇몇이 있었다. 보육원을 다니는 아이와 그 아이에게서 태어나 처음으로 욕을 배운 학급 친구 둘(나 포함)은 방과 후 군것질을 입에 물고서 그를 약 올리며 괴롭혔다. 이런 모습들을 지나가는 주민들은 과한 조치로 대처하지 않고 일괄된 외면으로 무시하는 것처럼, 안전하게 지나치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 동네에서는 이런 미친 사람이 있으면 쫓아낸다고 하는 걸 들은 한 아이는, 사람들이 왜 그런 미친 사람과 기꺼이 이웃을 같이 하는지 궁금해 선생님께 물어보는 일도 있었다. 선생님, 선생님, 왜 사람들은 미친 사람을 쫓아내요? 같이 살면 위험한 거에요? 어떤 동네에서는 집값이 떨어진데요. 난처해진 선생님은 도덕 교과서처럼 또박또박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대답했지만 그도 그가 내뱉은 말의 의미를 잘 몰랐다. 이런 고민을, 아이들은 한 번씩 동네에서 마주친 미친 사람이 있을 때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했다. 저 사람은 누굴까, 저 사람은 왜 저러고 다닐까, 저 사람은. 등등의 이웃을 향한 관심은 알고 싶어 하는 상태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시장을 배회하는 그 특징 있는 사람 몇몇은 시간이 흘러도 시장에 출몰한다. 목적 있는 주민들과는 다르게 배회하는 모습이 유독 눈에 띄는데, 목적이 없어서일까, 급한 모양새도 아니고 주변을 둘러보는 여유마저 느껴진다. 혹은 자신과 눈이 마주치거나 한다면 그는 얼마든지 말을 건넬 용의가 있어 보인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그런 상황을 피하고 싶어 외면하지만 말이다. 4월 1일이었다. 상도초등학교를 다니던 나는 여느 때처럼 친구 두 명과 함께 하굣길을 우회해 시장 사거리에 도착했다. 우리는 이상하고 미친 사람, 이라고 이름 붙인 어떤 장애인을 골려줄 목적이 있었다. 벌써 수차례 그런 놀림과 야유를 했던 터라 이제는 보다 수위가 강해지길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꼬마 셋이었다. 그리고 마침, 그날은 거짓말을 해도 용서되는, 장난이 진리가 된 그런 날이었다. 꼬마들은 풍선에 물을 가득 채워 몇 개를 호주머니에 넣었고, 폭죽도 두어 개 샀으며, 나무젓가락으로 모양 낸 고무줄 총도 구비했다. 사냥의 모든 준비는 마련된 셈이었다. 꼬마들은 두근거림을 감추지 못하고 시장에 도착해 표적을 찾기 시작했다. 이래도 괜찮을까? 같은 걱정은 그들의 장난에 불을 지필 뿐이었다. 마침 표적은 사거리 마을버스 정류장 앞에 서성거리고 있었고, 아이들은 거리에 어른들이 별로 없어지는 틈을 노려 벼락 같이 달려들었다. 순식간이었다. 그는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꼬마들이 자기를 표적으로 삼았다는 걸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난데없이 벼락이 내려쳤다. 온 몸이 젖었고, 따끔거렸으며, 무엇보다 치욕스러웠다. 꼬마들은 자기들이 구사하는 온갖 심한 욕들을 내뱉으며 약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표적의 격한 반항이 어서 표출되길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도무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뚝뚝 떨어지는 물들과 더욱 초라해진 모양새는 그 광경을 보는 주민들에게 가감 없이 노출되었지만, 그는 도무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마침 지나가던 할머니 한 분이 우리들을 붙잡고 매섭게 야단을 치는 것으로 이 사건은 단락 지어지는 듯 했지만, 어느새 그는 홀연히 사라지고 없어 폭죽 찌꺼기와 젖은 바닥만이, 얼마 못 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그런 사소한 흔적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예전에는 이웃 간에도 자주 드나들고 차도 한 잔 마시며 수다도 떨었다지만 지금은 같은 동네에 살아도 옆집에 누가 사는지 그 얼굴을 모르는 게 대다수다. 소리 소문도 없이 이사를 가버린 이웃과 또 도둑마냥 이사를 와 버린 이웃들은 동네에 별다른 흔적들을 남겨놓지 않았다. 남겨놓고 싶지 않길 바라는 듯 싶기도 했다. 같은 동네에 산다고 자주 만나는 건 더욱 아니게 된 요즘, 동네는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미쳐버린 그처럼 동네는 끔찍한 지옥일까? 빨리 벗어나고 싶은 후줄근한 이력일까? 자신의 가치가 기입되는 이름과 숫자의 제목일 뿐일까? 이 동네에는 시장도 있고 노점들도 나와 있으며, 지난 모습들을 쉬이 갈아치워 버리는 분위기는 분명 아닌 것처럼 보였다. 확실히 노인들도 동네를 자주 배회하고 다녔고, 공원이나 정자가 있으면 꼭 노인 한 명이 앉아 있는 걸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었다. 적어도, 세월은 아직 이 동네를 떠나지 않음이 분명했다.


 같은 동네에 미친 그가 산다는 얘기를 들은 나는 지나가다 마주치지 않으면 결코 만나볼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잠에서 일어나 다시 잠에 들기까지 의식과 연결된 온라인 세대에게 그런 사람들이란, 아이들이 미친 사람을 대하는 것보다 더 건성이고 난처한 질문을 받은 선생보다 더 무지한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또는 그렇게 하기가 더 쉬워지기도 했다. 지나가다 마주치지 않으면 결코 만나볼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은 당신 이웃의 다른 수사일 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거리로 나간다. 외출에 항상 목적지가 있던 걸음과 목적이 없는 걸음은 그 속도부터가 다르다. 산책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런 산책은 동네의 미학이기도 하다. 지나가는 사람, 즐비한 주택들, 골목의 모양, 자기가 사는 집 겉면을 치장한 주인들, CCTV를 달아놓은 주민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생각보다 대문을 겨눈 CCTV가 많음을 나는 발견한다. 자신은 직접 식물을 기르지 않지만, 창가나 가게 앞, 혹은 층이 있는 다세대주택은 창 앞에 나있는 테라스마다 화분들이 그득한 걸 발견한다. 동네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징 중 하나는 동물과 식물을 기르는 주민들의 모습이다. 그것들은 사람처럼 넓은 세계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동네에 국한된 특징이 되기도 한다. 또 필요하지 않으면 찾지도 않았을 자영업소들을 발견한다. 철물을 팔기도 하고 싼 값에 밥을 지어주기도 하며 아직 철수하지 않은 구멍슈퍼들, 카페들 등등 주민들이 드나드는 공간을 본다. 그는 동네를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이전에는 못 봤던 동네의 모습들이 노출되는 걸 느낀다. 나의 고민은 수정된다. 사람의 얼굴뿐 아니라 행동, 모습들이 직접 보지 않으면 결코 만나볼 수 없는 것 아닐까, 라는 고민은, 관심 갖지 않으면 결코 상관이 없는 동네에 대해서, 로 그리고 동네가 만들어지고 지속되는 힘이 이러한 관심에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나는 아직 미친 사람이라 불리는 그를 실제로 만나지는 않았다. 또 그가 만약 이웃이면서 동시에 생활에 간헐적으로 개입하는 소란스러움을 동반한 그런 이웃이라면 과연 그를 인정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모든 관심이 수년 간 거주했던 나에게 없던 것들임은 분명했다. 수년 간 살면서 지나쳤던 작은 풀꽃들이 눈에 들어오면서 동시에 피로해지는 걸 느끼는 나였다.





 어느덧, 가을이 오고야 말았다. 계절은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표정을 싹 바꾸며 사람들에게 무언가 요구하고 있다. 추억이나 감정 같은 계절의 외투들 말이다. 지나친 시간에 반환을 요구할 마음이 없는 나는, 계절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피로와 불안의 투쟁이기도 하다. 지나치게 더웠던 여름, 나는 비겁한 유년에 복수를 하고 싶었고, 그것은 결코 달성할 수 없는 신파극이기도 했다. 오늘을 살아내는 것 말고도 지나간 기억들을 강하게 헤집으며 보냈던 쓰기의 세월은, 한 마디로 피로했다. 피로가 진지했다. 나의 공책은 아무런 말도 없이 이 진지한 피로를 다 받아내느라 지쳤다. 어느덧, 가을이 오고야 말았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나의 동네는 어디쯤 위치해 있던 것일까. 동네를 떠올리며 글자로 박힌 순간들은 분명하게, 밤하늘의 별이 되어 유년이라는 별자리를 만드는 것 같았다. 인간은 자신이 절대 가닿지 못하는 절대적인 거리를 두고 아름답다고 했다. 그것은 사실, 너무나 먼 이국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말하기도 했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쓰는 습관. 한 번 엇나가버린 시간은 무정한 시계를 따라잡을 수 없다. 영원한 절름발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엇박자는 끊임없이 반복된다. 엇박자, 그것은 또한 되풀이되는 기억의 다른 이름 아닌가. 나의 동네, 상도. 나는 이 속에서 그 무엇도 밝혀낼 수 없지만 분명한 기억들의 빛을 본다. 높이가 있는 이 동네는 언덕에 오르면 주변에 수많은 빛들을 둘러볼 수 있다. 지팡이 같은 펜은 나의 동네를 다 받아 적느라 그만 잉크가 다 떨어지고 말았다. 다 닳고 말았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열대는 갔고, 동경하던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상도의 겨울, 그것은 나에게 아직 도착하지 않은 계절이다. 


 나는 또, 이런 편린의 무책임함이 싫진 않다. 질서 지워지지 않는 모든 것들은 그래도 저마다의 목소리가 있다. 그것들이 한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책임 없다는 누명을 외투처럼 걸치지만, 그것은 온기가 부족해서이지 별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사람은 추우면 체온을 나누려고 서로를 껴안는다. 열기를 빼앗는 계절이 오고 있다. 추위는 욕심이 많아서 몸에서 빠져나가려는 열기로는 부족해 더한 열기를 달라고 손을 내민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자기 안 깊숙이 갇힌 외로움마저 뺏길까 덜덜 떤다. 추위를 탄다는 건 그런 것이다. 외로움과 관련된 지독한 짝사랑, 그것은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목소리를 낼 때 결코 한 눈에 다 보이지 않는다는 걸 말하기도 한다. 나는 그런 것들이 싫지 않다. 피로하다, 피곤할 뿐이다. 그것만으로, 우리는 적어도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해치지는 않는다. 목소리를 죽이지는 않는다. 이웃을, 그냥 내버려둘 수 있다. 동네를, 사랑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어느덧 가을이 왔다. 기상과 기분이 조율하는 이 기적 같은 순간을 필기하는 나의 오른손은 차분하다. 열기는 거의 다 식은 모양이다.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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