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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나무 Aug 02. 2018

#08. 프랑스에서 시 읽는 즐거움

사람과 기억이 단단히 엉긴 시

나는 시를 좋아한다. 이미지와 감각으로 텍스트를 기억하는 내게 잘 맞는 취향이다. 반면 서사는 곧잘 잊는 편인데, 인물이나 결말이 기억이 안 나거나 플롯의 한 토막이 통째로 증발해 버리는 식이다 (DC니 마블이니 하는 시리즈물을 못 보는 슬픈 이유..). 시집을 읽을 때는 마음에 드는 페이지의 귀퉁이를 야무지게 접으며 읽는다. 언제든 책장에서 꺼내 다시 읽기 위해서다. 간혹 아주 좋은 시집을 만나면 접힌 귀퉁이가 온전한 귀퉁이보다 많아지곤 한다. 드물긴 하지만 그럴 땐 접는 것을 중도 포기하고 그냥 읽는다. 완곡히 말해 '포기'지 사실 '항복'에 가깝다. 무심한 얼굴로 책장을 넘기지만 속으로는 연이은 시 폭격에 허우적거리며 내가 졌어요 날 가져요 엉엉, 외치고픈 심정이랄까 (예컨대 진은영의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같은, 진은영의 <훔쳐가는 노래> 같은, 진은영의 <우리는 매일매일> 같은, 진은영의...). 내 책장에서 '최애 시집'이 탄생하는 흥분되는 순간이다.


슬프게도 한국을 떠나오면서 그런 기쁨을 맛보는 일은 드물게 되었다. 계절이 바뀔 때쯤 사식 넣듯(?) 시집을 보내주는 친구들이 있어 문학과 아주 단절되진 않았지만, 가끔 한국에 들어가 서점에 가면 뭘 읽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로 시 코너에서 오래 서 있곤 한다. 그러고 보면 한창 시집을 많이 읽을 땐 늘 길잡이가 있었다. 교양 시수업이나 외부 강좌에서는 강사가 항상 좋은 시를 소개해 주었고 자연스레 시집과 시인이 궁금해 찾아 읽게 되는 일종의 '독서의 분얼'이 가능했다. 도서관은 언제나 옛날 시집으로 가득했고, 합평이나 문예지를 통해 새로운 시인들을 알 수 있었다. 또 굳이 찾아다니지 않아도 좋은 시집은 친구들 사이에서 역병처럼 번지곤 했다. 한글로 된 인쇄물만 봐도 황송해지는 이곳에서는 '요즘 아무개의 시집이 좋다더라'식의 풍문은 들을 수도 없을뿐더러 어차피 읽을 수 없으니 내겐 신기루나 다름없다.


반면, 그런 이유로 어떤 시는 내게 무척 특별해진다. 눈 밝고 취향이 한결같은 친구들이 택배로 부쳐주는 책들도 의미 있지만, 역시 잊히지 않는 건 편지에 동봉된 시 한 편인 것 같다. 참 신기하게도 나와 편지를 주고받았던 친구들은 (마치 짠 것처럼!) 마지막 장에 꼭 시를 한 편 써서 보내곤 했다. 단 한 편이라 귀한 것도 있지만, 시집을 뒤적이고 고른 시를 옮겨 쓰는 그 투명한 마음을 떠올릴 때면 나는 한없이 가득해진다. 그 시를 가방 속에 넣어 다니며 지하철 플랫폼에서, 공원에서, 도서관에서 얼마나 자주 꺼내 읽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와 손가락이 잘 맞는" J는 신해욱의 <맛>으로, 자전거 뒷바퀴에 복사꽃과 달빛이 "하르르 자르르" 깔리던 봄밤의 O는 신현정의 <자전거 도둑>으로, "눈 속에 빛이 가득해서" 우리의 시간이 "조용히 우거지는 것을 보지 못했던" 내게 K는 강성은의 <환상의 빛>으로 남아있다.


좋은 시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꼽는 좋은 시는 언제나 사람과 기억이 단단하게 엉겨 있다. 지금도 나는 좋은 사람을 만나면 시를 선물한다. 나의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투명한 마음을 담아. 그럼 그 시는 그 사람이 되어 아주 오랫동안 내 안에 머문다. 그러니까 이장욱의 <아프리카식 인사법>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내게 음악을 나눠주었던 뮤지션 N으로, 이대흠의 <행복>은 감잎처럼 순한 귀를 가졌던 F로, 김행숙의 <다정함의 세계>는 참 이상한 상사 M으로 내게 오래 머물 것이다. 반대로 어떤 날의 기억은 시로 남기도 한다. 숨이 턱턱 막히던 어느 여름날, 진공관처럼 시간도 공기도 멈춘 것 같았던 6호선 찻간은 내게 황인찬의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으로 남았다. D를 만나러 가던 길, 속수무책으로 쏟아지는 눈송이의 마음이란 이런 걸까, 생각했던 그 밤을 나는 김행숙의 <새의 위치>로 기억한다.


지금을 기억하는 시는 아마 송승언의 <철과 오크>가 될 것이다. 무더위로 힘들었던 지난주는 대부분의 시간을 공원에서 보냈다. 점심엔 무성하게 우거진 나무 그늘 아래에서 샐러드를 먹었고, 퇴근 후에는 공원의 긴 의자에 몸을 기대고 해가 저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달팽이처럼 짊어진 현재를 내려놓은 것도, 시간이 흘러가는 양태를 정면으로 바라본 것도 참 오랜만이었던 것 같다. 그날 책장에 꽂혀 있던 송승언의 시집을 들고 나온 건 우연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시집을 읽다가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을 때, 햇살이 닿아 투명해진 마로니에 잎사귀들 사이로 빛이, 눈부신 빛이 잘게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꼭 생의 비밀을 여는 열쇠가 반짝이며 쏟아지는 것처럼. 눈을 감아도 눈꺼풀을 통과하는 환한 빛 조각 들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이건 "신의 사랑"일까 아니면 "교육"일까 생각하며. 또 하나의 기억이 한 편의 시로 남겨지는 순간이었다.     

     

       

  철과 오크


  숲의 나무보다 많은 새들이 있고 부리에 침묵을 물고 있고

  그보다 많은 잎들이 새를 가리고 있고

  수십 명의 아이들이 지거나 이기지 않고 같은 색의 옷을 입고 숲을 통과하고 있고

  끝도 모른 채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

  수십 명의 나무꾼들은 수백 번의 도끼질을 할 수 있고

  수천 그루의 나무를 수만 더미 장작으로 만들 수 있고

  빛은 영원하다는 듯이 장작을 태울 수 있고

  장작은 열 개비가 적당하고 그 불이면 영원도 밝힐 수 있고

  아이들은 영원을 지나가고 있고 별들이 치찰음을 내고 있고

  밤과 낮은 서로에게 이기지도 지지도 못하고 있고 

  불 앞에서 나무꾼들은 수십 개의 그림자를 벗으며 농담하고 있고

  인간의 맛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불 그림자가 불의 주변을 배회하며 불 그림자를 만들고 있고

  새들은 여전히 침묵을 부리에 물고 있고

  나무 위에서 열쇠들이 쏟아지고 있다

  나부라진 옷가지들이 발자국을 가리고 있고

  나무꾼들은 횃불을 나눠 들고 더 어두운 곳으로 움직이고 있고

  잎이 풍경을 가리고 무성해지고 있고


                                   송승언 <철과 오크>

                                  (문학과 지성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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