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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나무 Aug 16. 2018

#17. 김도비 수난사(受難史)

이 죽일 놈의 혐생

*이 글은 30대 직장 여성 김도비의 이야기다. 글쓴이와는 일절 관련이 없음을 밝힌다.


김도비(3n세, 비서)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시곗바늘은 아침 8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동굴처럼 깊은 잠이었다. 알람 소리가 닿지 않을 만큼. 괜찮다. 이런 사태를 대비해 회사 가까이에 집을 얻었던 게 아니었던가? 화장을 포기하면 35분쯤 집을 나설 수 있다. 보스가 도착하는 시간은 8시 50분 근처. 약간 아슬아슬하지만 그전에 사무실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김도비는 발작하듯 일어나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샴푸와 바디샤워를 한 번에 뒤집어쓰고 미련이 덕지덕지 붙은 잠을 씻어냈다. 마른 수건으로 몸을 닦고 나오니 시계는 8시 2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순간 핸드폰 문자 메시지 소리가 울렸다. <평소보다 일찍 출발. 40분 도착 예정>.


지나치게 사려 깊은 운전원이 보낸 문자였다. 이런 시ㅂ... 김도비는 자신도 모르게 육성으로 욕이 튀어나오는  동시에 반사적으로 두 가지 선택지를 떠올렸다. 1. 보스가 먼저 출근했다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도 아닌데 포기하고 천천히 출근한다. 2. 그대로 옷만 입고 냅다 사무실로 달린다. 하지만 고민은 무의미했다. 머리로 선택지를 떠올리는 동안 김도비는 이미 바지 한쪽에 다리를 꿰고 있었다. 널려 있는 옷 중 보이는 것을 집어 걸친 후, 어제의 가방에 비비크림과 선크림을 쓸어 넣고서 집을 뛰쳐나왔다. 젖은 머리가 미역줄기처럼 얼굴을 찹찹 때렸지만 최소한의 시야만 확보한 채로 무작정 내달렸다. 지름길인 기차역에 도착했을 때 시계 분침은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기차역만 가로지르면 사무실은 금방이니 승산이 있는 게임이었다. 김도비는 전속력으로 뛰었다.


회사 건물로 들어와 엘리베이터로 다이빙했을 때 시각은 8시 33분이었다. 예쓰! 승강기 안에는 각 잡고 양복을 갖춰 입은 프랑스 남자가 멀찍이 떨어져 서 있었다. 김도비는 남자가 자기보다 높은 층수를 누른 것은 피 대신 육수를 줄줄 흘리는 미역머리 동양 좀비를 피하기 위한 기지가 아니라고 애써 믿어 본다. 상승하는 엘리베이터 안은 진공 상태의 고요로 팽팽했다. 안도감과 동시에 김도비는 갑자기 참을 수 없는 구역감을 느꼈다. 아ㅇ안돼, 이 밀폐된 공간에서 토만은 절대 안 된다. 승강기 계기판 쪽으로 몸을 붙이고 심호흡을 했다. 뭔가 이상했다. 귓가에 숨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호흡이 가빠져서인지, 귀가 먹먹하여서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서서히 눈 앞에 조도가 낮아지는데 갑자기 여기가 어딘지 잘 모르겠다. 여기는 어디고 나는 누구지.


땡! 청명한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울렸다. 승강기가 열리고 익숙한 건물 복도가 눈에 들어오자 김도비는 최면에서 깨어나듯 출근 중이란 사실을 떠올렸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자 멀대 같은 프랑스 남자 얼굴이 보였다. 남자는 부축하듯 김도비의 팔을 잡고 괜찮냐고 묻고 있었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김도비는 그저 사무실로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웅얼거리듯이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인사하고 총알처럼 승강기에서 내리는데, 남자가 큰 소리로 "저기요!!!" 외친다. 돌아보니 그가 김도비의 핸드폰을 내밀고 있었다. 김도비는 낚아채듯 핸드폰을 받아 고맙다 인사하고 성난 황소처럼 달렸다. 사무실 입성의 순간, 시계는 8시 35분을 넘기고 있었다.


김도비는 사무실의 불을 켜고 보스의 방문을 열려고 했다. 비밀번호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번호들은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데 아무래도 조합이 되지 않았다. 매일 아침, 하루도 빠짐없이 열었던 문이었다. 두 번의 시도에 실패하자, 이러다 큰일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도비는 일단 자리에 앉아 심호흡을 했다. 등판이 온통 땀으로 젖어있었다. 호흡을 고르자 숫자의 배열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다행히 세 번째 시도는 성공이었다. 보스는 정확하게 40분에 도착했다. 그는 창백한 김도비의 몰골에 놀라는 듯한 눈치였지만, 어쨌든 그녀는 오늘도 출근 임무를 무사히 완수했다. 김도비는 익숙한 몸짓으로 커피를 내려 보스에게 배달한다. 


머리가 멍했다.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살펴보니 액정 부분이 들려 있었다. 복기해보면,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그 짧은 시간 정신을 잃었고, 손에 힘이 빠지면서 핸드폰이 떨어진 것 같았다. 아마도 일시적으로 산소 공급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 평소 저혈압이기도 했고, 일어난 지 15분 만에 그렇게 전속력으로 뛰었으니 심장이 놀라지 않은 게 이상한 일이었다. 출근은 무사히 완수했지만 이후에 찾아온 현타는 여운이 길었다. 질문들이 폭풍처럼 김도비를 쓸고 지나갔다. 과연 아침 출근이 내 심장과 맞바꿀 정도로 가치 있는 일이었을까. 자아실현하는 것도 아니고, 4대 보험도 되지 않고, 고용 안정이 보장되는 것도 아닐뿐더러, 나의 노동권을 존중해 주는 것도 아닌데. 산소가 부족해 정신줄을 놓을 정도로 매달려야 할 일이었을까? 게다가 아침부터 미역머리 동양 좀비가 휘청대는 꼴을 봐야 했던 그 남자는 대체 무슨 죄?


지난 세월 수난의 기억이 알감자처럼 줄줄이 딸려 올려왔다. 점심시간 샌드위치 셔틀 (이럴 거면 차라리 업무시간에 외근으로 보내주든지). 주말이고 휴일이고 아침이고 밤이고 가리지 않고 날아드는 업무 문자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미리 보내 두는 거니 신경 쓰지 말라는 코멘트가 포인트...ㅋ). 주말에 전화로 하는 사적인 부탁 (병원 예약이나 약품 구입은 아프니까 그렇쳐도 전자기기에 문제가 생겼다고 연락할 땐 어디 총 갖고 있는 사람 없나 싶다). "뭐, 김도비씨가 하는 일은 단순해 보이지만 하하." 라며 모두가 있는 앞에서 김도비의 노동을 폄하했던 상사 J  (아니 뭐 자기가 하는 일은 지구라도 구하는 건 줄 아는가봉가). 직원이 수백 명인 공장도 아니고, 조그만 사무실에서 그것도 현지 직원'만' 근퇴관리기에 지문을 찍는 굴욕적 차별까지. 가장 한 맺혔던 기억은 작년 12월이었다. 김도비는 2년 만에 처음으로 장기 휴가를 냈다가, 중요한 행사가 줄줄이 잡혀 고민 끝에 휴가를 반려했다. 취소가 안 되는 비행기표와 숙소 비용은 고스란히 날아갔고, 주어진 휴가를 다 쓰지도 못한 채 새해를 맞아야 했다.


그 외에도 '이런 것까지 해야 해?' 싶은, 계약서에 명시되지 않은 수많은 일들. 말로 하기에 치사하고 졸렬한 상황들도 주마등처럼 눈앞을 지나갔다. 하지만 모든 미움과 분노는 결국 자책으로 수렴한다. 좀 늦었다고 죄송하다고 말하고 천천히 출근해도 될 일이었다. 행사는 대체자에게 맡기고 떠날 수도 있었다. 문자나 전화도 적당히 읽씹하거나 못 받은 척, 못 본 척 피해갈 수 있었다. 이럴 때 김도비는 자신이 싫어진다. 왜 나는 이리도 책 잡히는 게 싫은가. 왜 나에겐 이렇게 거절이 힘든가. 왜 나는 120%의 노력을 처부어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인가. 고분고분하고 성실한 도비 근성에 침이라고 뱉고픈 심정이다. 이 기나긴 수난사에 종지부를 찍는 날이 오긴 할까? 이제는 좀 놓아버려야지. 영리하고 뻔뻔해져야지. 김도비는 사무실 책상에 앉아 비비크림을 찍어 바르며 다짐한다. 벌써 몇 번째 같은 다짐인지 김도비는 기억하지 못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 글은 30대 직장 여성 김도비의 이야기다. 절대, 절대 내 얘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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