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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나무 Jul 31. 2018

#06. 기록의 습관

사라지지 않기 위해 씁니다

얼마 전 집에 놀러 온 S와 옛 애인의 근황을 구글링 했다. 구남친에게 미련을 줄줄 흘리는 그런 사람은 아닌데 '그 시절의 그 사람'과 내가 타임머신처럼 돌아와 (이게 다 조규찬 음악 때문이다) 그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졌다. sns에 어둡고 방어적인 옛날 사람 나와는 달리, 사회관계망을 통해 세상도 보고 친구도 만나는 요즘 사람 S는 오래된 몇 개의 정보로 그의 페이스북 계정을 금세 찾아냈다. 아주 잠깐 너 나 궁금하지 않니, 나 여기 있어! 손을 흔들고 싶었지만 그 욕구를 꾹 누르며 창을 닫고 검색기록을 지웠다. 우선 그는 나를 잊었을 것이고 말을 걸 수 있는 방법도 사실 없었다 (애초에 계정이란 게 없으니까!?). 나는 sns를 하지 않는다. 사회적 교류가 적은 천상 개똥벌레인지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일상의 기록'을 위해 sns를 한다고 하지만, 보통 사람들보다 한참 덜 사회적인 내가 굳이 사회관계망으로 일상을 남기는 것도 이상한 것 같다.


내게도 기록의 습관은 있다. 중증으로 기억이 짧은 나는 회사에서 팔로우업 하는 일이 테트리스처럼 쌓일 때 자주 위기를 맞는다. 인간은 실패를 통해 배우는 동물인지라 몇 번의 오금 저리는 경험 끝에 "기록이 아니면 죽음"이라는 필사의 의지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기록하지 않으면 나를 보호할 수가 없었다). 나 같은 메멘토적 인간에게 기록이란 일종의 생존 전략인 셈이다. '먹고사는' 의미의 생존뿐 아니라 '정신적' 생존 전략이기도 하다. 한국을 떠나온 이후 어느새 여섯 권의 일기장을 썼다. 언젠가 원치 않은 약속들에 질질 끌려다녀야 했을 때 <집에 빨리 돌아가서 거울을 보고 싶다. 가만히 나를 들여다보고 헝클어진 머리를 빗겨주고 싶다. 엉망으로 휘둘린 나를 툭툭 털어 침대 위에 올려주고 싶다. 이불을 덮어주고 불을 꺼주고 싶다> 라고 일기에 쓴 적이 있다. 자아의 생존이라는 점에서 기록이란 그런 의미였던 것 같다. 집으로 돌아와 거울 앞에 앉는 일. 조용히 얼굴을 쓸어보고 기분은 어떤지 마음은 괜찮은지 다치진 않았는지 묻는 일.


여러모로 '살기 위해' 쓴다는 이야기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글도 살기 위한 기록이다. 빵만 있고 장미는 없는 조직 생활 (매일 아침 '몇 안 되는' 현지직원'만'을 대상으로 하는 차별적 근태관리기에 지문을 갖다 댈 때마다 내 노동권은 휴지 조각이 되는 기분이다)의 바깥에서 내가 누구인지 외치고 나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어 이곳에 나를 기록한다. 그러니까 사라지지 않기 위해 "나는"으로 시작하고 "내가"가 지배하는 글을 "보라고" 쓴다. 숨통이 트이는 것 이상으로 재밌기도 하다. 이렇게 자의식으로만 가득한 글을 열린 공간에 쓰는 건 2000년대 초반 (내 이불 킥 버튼이자 웃음 지뢰인) 싸이월드 일기장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흩어진 나의 부스러기를 뭉쳐 새로운 몸을 빚는 기분. 물론 여기에는 "자기 삶에 대한 특정 이미지를 스스로 설정하고 그에 입각하여 자신을 재구성하고 형성하려는 의도가 불가피하게 개입(박혜숙, <여성과 자기 서사>)"되겠지만 그게 바로 자기 서사의 맹점이자 묘미 아니겠는가.


불특정 다수에게 나를 노출한다는 면에서 이 글도 sns와 다를 바 없지만, 후자는 불호인 편이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는 정보가 너무 많고 빠르고 즉각적이라 숨이 차서 볼 수가 없다 (머리채 잡고 싸우는 사람들 보는 것도 기빨리고). 한때 동료들과의 사회적 관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보려고 인스타 계정을 만든 적도 있지만 금방 그만두었다. 어떤 순간에 행복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 그 행복이 가장 잘 드러나는 사진을 고르고 보정하고 쿨해보이도록 윤문한 후 이모티콘까지 붙여서 올리는 행위가 못견디게 어색했다. 더 솔직해지자면 행복을 가장하는 느낌을 받았다. 사회성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뭘 했는지, 뭘 먹었는지, 내가 혹은 우리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시시콜콜 전시하는 것은 사회성 낮은 내게 불필요한 일이다. 그 순간 몸과 마음에 새겨진 감각들, 우리가 나눠가진 기억과 눈빛 이상으로 무엇이 그렇게 더 필요한건지 사실 잘 모르겠다.


후자에 대해서는 경계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갖은 sns에 자신을 노출하는 것을 즐기던 동아리 후배 B가 반려묘가 죽어가는 장면을 찍어 "너무 안타까운" 자신의 감정과 함께 블로그에 올리고, 끝내 아이가 세상을 떠나자 "잘 가, 너무 슬프다. 너를 꼭 기억할게" 식의 메시지를 쓴 적이 있다. 같은 내용을 인스타에도 올렸다고 한다. 얼굴 없는 친구들의 위로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이 장면이 내게 충격적으로 기괴하게 느껴졌는데, 사랑하는 반려묘의 축 늘어진 몸과 꺼져가는 눈빛에 카메라를 들이밀고, 사진을 골라 첨부하고, 자신이 얼마나 슬픈지를 아름다운 문장으로 가다듬는 B에게서 두려움과 경멸을 느꼈다. B가 슬프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B는 장애를 갖게 됐다고 생각한다. 슬픔을 온전히 슬픔으로 느낄 수 없는 장애. 타인에게 전시하고 관심과 리액션을 받아야 비로소 실체가 되는 감정들.


옆자리 P 선생님이 사무실 책상 밑에 숨겨둔 선물은 분홍색 서표가 달린 다이어리였다. 매일 아침 'To do list'를 작성하라고, 어떤 일이건 서면으로 흔적을 남겨야 한다고 조언해준 것도 P 였다. 꽃잎이 흐드러지게 그려진 이 노트도 곧 시시하고 구접스러운 생활과 나에 관한 잡다한 알리바이로 빼곡해질 것이다. 이 작은 육체에 꽉꽉 미어찬 수만 가지의 감정도. 그러고 보면 누가 미울 때도 기록만큼 좋은 게 없다. 노트 한 귀퉁이에 ooo 시발 새끼라고 작게 쓰는 것만으로도 스르르 녹는 기분이 드니까. 끝으로 헨젤과 그레텔이 떨어뜨린 빵조각처럼 인터넷에 흩뿌려진 나의 정보를 따라 이 글을 읽게 된 옛 애인이 있다면 수고를 전한다. 잘 지내니, 나는 별일 없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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