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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나무 Dec 07. 2019

#38. 완벽한 밸런스를 찾아서

몸은 둥글게, 시선은 안 쪽으로

목요일 아침, 커튼을 걷으니 온 세상이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밤사이 쏟아 놓은 양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하얀 눈을 잔뜩 장전한 하늘은 먹먹하게 하얬다. 언제라도 굵은 눈송이를 뚝뚝 떨어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부우연 눈안개가 새벽빛과 뒤섞여 어슴푸레한 아침. 창문을 열었다. 눈 내린 아침의 공기는 이상하게 둥글다. 차갑고 맑은 기운과 포근함이 공존하는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밤사이 시간 여행을 하다 낯선 세계에 불시착한 것처럼 비현실적이었다. 하얀, 너무도 하얀 세상을 한참 바라보았다. 직사광선이 없어도 이렇게 세상이 눈부실 수 있다니. 여느 때와 다름없이 더운물로 샤워를 하고 학교에 갈 준비를 했다. 내복에 남방에 니트까지 단단히 껴입고, 간밤에 미미가 싸놓은 도시락을 챙겨 집을 나섰다. 발자국 없는 매끈한 눈밭을 뽀득뽀득 밟는데 나도, 세상도 고요했다. 걸으며 생각했던 것 같다.< 평생 이렇게 살 수 있다면 참 좋겠다>고.


오랫동안 나는 직업적 성취가 삶의 성취가 되는 삶을 꿈꿨다. 나는 내가 돈도 벌고 그걸로 자아도 실현하는 그런 사람이 될 줄 알았다. 사실 돈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부모님이라는 꽃밭에서 돈 무서운 줄 모르던 시절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면 배곯는 것쯤이야, 했던 무모하고 귀여운 나였다. 인생이 생각하는 대로 살아지지 않음을, 모든 사람이 꿈꾸는 대로 사는 건 아님을, 평범해 보이는 일상을 떠받치는데 꽤 많은 돈이 필요함을 깨달았을 때, 내 삶의 지향점도 조금씩 방향을 틀고 있었다. 나는 노동과 삶을 분리했다. 노동에는 영혼을 담지 않으려 애썼고, 일을 뺀 나머지 삶 속에서 특별한 것을 찾고 싶었다. 파리에서 찾아 헤맨 건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나는 자주 안녕하지 못했다. 결핍된 것이 많아 정서적 밸런스가 널을 뛰었기 때문이다. 무기력과 폭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서적 균형을 맞추기 위해) 매일매일 갖은 애를 썼는데, 파리를 떠날 때쯤 나는 완전히 지쳐있었다. 사는 게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그냥 평온하고 싶다. 매일이 아니더라도, 대체로 평온하면 좋겠다. 어디에 살든, 무슨 일을 하든, 누구와 함께이든 혹은 혼자이든 일정한 정서 상태를 유지하며 살고 싶다. 그걸 깨달은 건 한국에 귀국한 후 서울에 있는 O의 집을 찾았을 때였다. O의 작은 오피스텔에서 우리는 야식으로 파닭에 맥주 한 잔을 먹고, 밤 열두 시에 따릉이를 타고 한강 공원을 달렸다. 매미가 아니라 귀뚜라미가 울기 시작하는 늦여름이었다. 제법 찬기가 도는 눅눅한 바람이 불었고, 싱그러운 풀향이 짙었다. 한적한 도로 위에서 나는 마음껏 속력을 냈다. 강 건너 반짝이는 밤의 서울은 너무도 아름다웠고, 등 뒤에서 오랜 친구가 나와 함께 페달을 밟고 있었다. 그 순간, 오랫동안 기울어져 있던 내 안의 저울이 서서히 영점을 찾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모자랐던 부분이 채워지고 비로소 균형을 되찾은 그 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하고 행복했다. 서울을 좋아하지도 않고, 도망치듯 살던 곳을 떠나왔으며, 대책 없는 백수 상태였는데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목요일 아침 <평생 이렇게 살 수 있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한 건, '몬트리올'에서 살고 싶다는 게 아니었다. 평생 이렇게 '백수로 돈이나 까먹으며' 살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이런 '정서 상태'로 살고 싶은 마음이었다. 정확히는 지금의 밸런스를 지키고 싶다는 바람. O가 없어도, 파닭과 한강과 따릉이가 없어도 이곳에서 나의 생활은 (대체로) 조화롭다. 한쪽에는 적당한 거리와 온기가 있다. 미미가 싸준 촌스러운 핑크 꽃무늬 도시락통, 화장대 의자와 침대 한편을 차지한 두 마리의 검은 고양이, 어학원 친구들과 함께 먹는 점심, 곳곳에 남겨진 룸메들의 흔적, 닫힌 방문을 똑똑 두드려오는 목소리... 그리고 반대편에 적당한 외로움, 내게만 온전히 주어진 나만의 시간이 있다. 두고 온 것들에 대한 그리움, 아직은 낯선 거리, 덩그러니 앉아 바라보는 아침 풍경, 도서관에 앉아 이렇게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지금처럼 말이다. 이 저울은 아슬하게 수평을 이룬다. 이 균형이 내게 평화를 준다.


물론 매일 평온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저울이란 건 늘 위태위태해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의 아주 사소한 한 마디에도 금방 눈금이 출렁인다. 그럼 나는 다시 눈금을 영점에 맞추기 위해 애쓴다. 그때의 나를 떠올리면, 몸을 안으로 둥글게 말고, 바깥으로 향한 시선을 안 쪽으로 끌어당기는 모습이 그려진다. 밖으로 산발하는 감각을 차단하고, 고개를 파묻은 채 나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어디가 불편한지, 왜 아픈지, 무엇이 필요한지, 묻고 매만지고 다독이다 보면 어느새 눈금은 다시 0에서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다.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돌아보면 모두 자신만의 방식으로 정서적 균형을 지키며 살아간다. 접시 위에 어떤 것들을 놓을지는 사람마다 다르고, 누군가에게는 아주 손쉬울 것이고, 또 누군가는 상담이나 약 같은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어쩌면 사는 건 끊임없이 균형을 맞추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흔들리지 않는 완벽한 밸런스를 갖고 싶다. 이 문장은 내 손으로 써놓고도 신기루처럼 느껴진다. 목요일 아침의 나는 평온했지만, 내일의 나는 다시 무너질 것임을 안다. 관계의 문제이든, 자존감 문제이든, 호르몬의 문제이든 또 다시 마음이 크게 출렁이며 괴로울 것이다.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서, 마음의 요가를 하듯, 다시 몸을 둥글게 말고 시선을 안 쪽으로 끌어당기는 연습을 한다. 길고 고요한 이 겨울이 지나면, 코어 근육이 생기고 균형을 버티는 일이 한층 수월해질 것이다. 저울의 눈금이 언제나 반듯한 영점이기를 꿈꿔본다. 미미의 라자냐가, 눈 속에 잠긴 하얀 아침과 발 밑에 잠든 고양이가, 도서관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는 한가한 오후가 사라진 후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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