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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나무 Dec 01. 2019

#37. 나에게 다정해지는 중입니다

당신은 진짜 다정한 사람인가요?

B의 첫인상은 나쁘다, 였다. 어학원 첫날 B는 내 옆자리를 찾아 앉았다. B는 튀어 오르는 고무공 같았다. 즉각적이고, 때로 위협적이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동시에 표현을 할 때 수위를 제대로 가늠하지 못했다. 가벼운 농담에 f**k 같은 욕설이나 극단적인 말로 받아치며, 그걸 재치 있는 대응이라고 생각하는 부류였다. 나는 직감적으로 다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를 경계했다. 그런데 지내다 보니 좀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고무공 같던 B에게 다정을 내밀자 다정이 돌아온 것이다. 다정하게 안부를 묻고, 다정하게 전화를 받고, 다정하게 이야기를 들어주니, 언젠가부터 부드럽고 얌전한 대답이 메아리처럼 돌아왔다. 문득 B가 타인에게 다정한 법을 몰랐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쁜 게 아니라 사실 서투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처음으로 B의 곁에서 다정함을 보여주고 가르쳐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작고 여린 동물을 보듬는 법을 배우듯이 말이다.


나의 인간관계도 언젠가 B와 같았다. B처럼 자주 수위 조절에 실패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무뚝뚝한 쌍도녀로 태어난 나는 다정함을 견디지 못했다. 간지러운 게 싫었다. 조심스러운 관계는 무언가를 감춘 것처럼 답답했고, 좀 과격해도 직접적이고 솔직한 게 좋았다. 대학 동아리에서 받은 영향도 컸다. 그 시절의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약점이나 흠이 발견되면, 그걸 공론화해서 회화화하거나 냉소 섞인 농담으로 소비했다. 그땐 그게 쿨한 거고, 뒤에서 쉬쉬하는 것보다 건강한 거라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한 채 말이다. 지금에야 그게 엄청난 폭력이었음을 안다. 폭넓은 관계를 경험하면서, 나는 타인에게 살갑고 다정한 법, 누군가를 아끼고 보듬는 법을 배웠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한다는 것, 타인의 단점이나 약점을 모르는 척하거나 부드럽게 돌아가야 하는 때도 있다는 것, 따뜻하고 예쁜 표현이 참 많은 것들을 녹인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하지만, 누군가 내게 “당신은 다정한 사람인가요?”라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그렇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타인에게 그토록 관대하고 다정하지만, 스스로에게는 인색하고 혹독할 때가 더 많기 때문이다. 가끔 나는 스스로를 생각하며, 밖에서는 세상 좋은 사람이면서 가족들에게는 함부로 대하는 나쁜 가장을 떠올린다. 이건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나는 나를 사랑하고, 나는 나와 아주 가깝다. 몬트리올에서도 여전히 나는 나의 안부를 자주 묻고, 나를 꼭 붙들고 의지한다. 내가 굳게 믿고 있는 나의 어떤 부분도 있다. 하지만 그토록 사랑하고 의지하고 믿으면서도, 어떤 순간 나를 가혹하게 밀어붙이고 당연한 듯 희생하는 내가 있다. 공부를 할 때도, 취업을 할 때도, 다이어트를 할 때도, 심지어 운동이나 취미 생활을 할 때도 그랬다. 높은 기준을 부여하고, 어떻게 서든 그 기준에 부합하도록 당연하게 나를 갈아 넣었다. 어쩌면 스스로를 지나치게 사랑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가끔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학대'를 하곤 하니까.


나는 참 오랫동안 자신에게 다정하지 못했다. 목표가 있는 한 언제나 나보다 목표가 먼저였다. 태어나 처음으로 확실하고 구체적인 꿈을 가졌던 시절, 나는 모든 것을 내던질 준비가 되어있었다. 무보수도 불사하고, 잠이고 밥이고 건강이고 나발이고, 기회가 생기면 시녀처럼 달려 나갔다. 참 아이러니하다. 나를 너무너무 사랑한 나머지, 나를 그 목표 위에 올려놓기 위해 가장 먼저 희생시킨 게 나 자신이었다. 파리에 있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외로움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단단해지라며 자신을 몰아세웠다. 덕분에 이제는 진짜로 혼자가 두렵지 않은 강한 사람이 되었지만, 아주 작은 결함도 함께 얻었다. 그 정서적인 결함이 결국 프랑스를 떠나게 만들었지만... 씩씩하게 잘 살다가도, 예배당 구석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을 때면 몇 번이고 이유 없이 눈물이 울컥 솟구쳐서 이 악물고 참아야 했던 날들, 아주아주 작은 다정에도 버티고 있던 모든 게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을 반복하면서,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목적 없이 떠나온 몬트리올에서, 단 한 가지 바람('목적'이나 '목표'까지는 아니라서)이 있다면, 내가 나에게 다정해지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에게 다정해지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B에게 다정을 건네고, 다정을 돌려받으며 조금씩 다정을 가르치듯이 말이다. 요즘은 나를 괴롭혔던 모든 것들 앞에 '나'를 먼저 놓는 연습을 한다. 꿈도 좋지만 '내'가 먼저야,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해. 강한 것도 좋지만 '내'가 먼저야, 그냥 울어도 돼, 누구든 찾아 기대도 돼. 달리지 않아도 돼, 발전하거나 생산적이지 않아도 돼. 지금 '내'가 행복하잖아, 즐겁잖아. 놀랍게도 스스로에게 다정해지면서부터 결함도 사라지고 있다. 이 곳에서 나는 여전히 혼자이지만, 이유 없이 울컥하던 증상이 크게 줄었다. 이제 정말로 괜찮다. 착실히 내 몸의 안부를 묻는 일도 잊지 않는다. 미미가 해주는 건강한 음식으로 성실히 끼니를 챙기고, 유산균과 영양제도 꼬박꼬박 먹는다. 성년이 된 이후로 이렇게까지 규칙적으로 자고, 먹었던 날이 없는 것 같다. 요즘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하다. 몸도, 마음도.


얼마 전 미미가 내 방문 앞에 “IN(안에 있음)”, “OUT(외출 중)”을 알리는 팻말을 걸어주었다. 일부러 차분하고 부드러운 녹색 그림을 골랐다며, “C’est tout doux comme toi(너처럼 아주 부드럽지).”라고 덧붙였다. 누군가의 눈에 내가 부드러운 사람으로 보인다니, 기분이 좋았다. 스스로에게도 그런 사람이고 싶다. 시간이 걸릴 것이다. 스스로에게 부드럽고 다정한 날보다 가혹한 날들이 훨씬 더 많았으니까. 어학원에 다니는 지금도 불쑥불쑥 나를 몰아세우고 싶어 진다. 재밌고 즐겁게 공부하자고 등록했으면서, 어느 순간 별 것 아닌 시험에 목을 매고, 더 잘해야 한다는 강박을 못 버리는 내가 있다. 그럴 땐 난 정말 답이 없구나... 절망하다가, 다시 토닥인다. 잘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내'가 행복한 게 가장 먼저라고. 몬트리올을 떠날 때쯤엔 나를 몰아세우는 것보다 다독이는 데 더 익숙해지면 좋겠다. 진짜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다. 너에게도, 나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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