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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나무 Jan 20. 2020

#39. 우리를 살게 하는 기억들

몬트리올에서 보낸 연말, 그리고 새해

크리스마스 즈음 홈메이트 G에게서 데이트 신청을 받았다. 우리는 몬트리올 근교, 라발이라는 곳에서 열리는 <일루미>라는 행사에 함께 가기로 했다. 이색적인 크리스마스 시장과 다채로운 불빛으로 만든 조형물이 있는 행사였다. 싸락눈이 펄펄 날리는 저녁, 우리는 기 콩코르디아에서 만나 따뜻한 베트남 국수로 배를 채운 후 라발로 향했다. 지하철 종착역에서 내려, 다시 셔틀버스를 기다리는데 솜털 같은 눈이 쏟아졌다. 거대한 조명 트리가 맞이하는 야외 행사장은 테마에 따라 꾸며져 있었다. 펭귄, 이글루, 꽃밭, 자동차, 나무, 구두, 집, 기린, 정글, 붕어... 불빛으로 만든 조형물 옆에서 G와 함께 꺅꺅거리며 사진을 찍었다. 즐거웠다. 이렇게 깔깔 웃으며 사진을 찍은 건 오랜만이었다. 5달러나 주고 산 맹탕 같은 핫초코를 마시며 추위를 견뎠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나중에는 발끝이 꽁꽁 얼어붙어 힘들었지만, 눈 때문인지 공기가 순하고 색색의 불빛이 참 아득하니 예뻤다. 2019년의 크리스마스는 휘황한 일루미의 불빛으로 기억될 것 같다.


얼마 전, 등굣길에 문득 파리에서 보낸 첫 크리스마스가 떠올랐다. 지하철에서 내려 출구로 가는 긴 통로를 걸을 때였다. 그 날 나는 프랑스 친구인 M의 집에 초대되었다. 와인 한 병을 들고 파리 외곽에 있는 아파트로 가던 길이 생생하다. 수줍던 M의 동생들, 도도한 검은 고양이, M과 똑같은 눈을 가진 엄마와 이모의 모습도. 저녁 일곱 시에 시작된 식사는 밤 열두 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파떼 앙 크루트, 타마라와 푸아그라가 올라간 토스트, 새우와 연어, 크림을 끼얹은 생선, 고기를 채운 닭구이, 치즈 플레이트, 케이크와 통나무 모양 아이스크림, 초콜릿에 커피까지. 음식이 쉼 없이 나오는 게 충격이라면 충격이었던 밤. 식사를 하며 샴페인으로 토스트도 하고 선물 교환식도 했다. 다음날 아침, 더부룩한 배를 안고 부엌으로 갔는데, 식탁 위에 뺑 오 쇼콜라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먹느라 힘들었지만 참 단란했다. 텔레비전의 소음과 은은한 호박색 조명, 분주한 부엌,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까지 참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기억이다.               


이 크리스마스를 떠올리며 나는 잠시 걷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 기억의 타래가 뺑 오 쇼콜라 더미에 다다랐을 때는 실소가 나왔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입가에 미소를 걸고 있었다. 프랑스를 떠나왔다는 것도, 학원에 가는 길이라는 것도, 지금이 몬트리올이라는 것도, 모두 잊은 채 말이다. 몇 분 되지 않는 짧은 회상이었지만, 학원으로 향하는 길이 내내 따뜻했다. 가끔 우리는 어떤 기억으로 살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런 기억은 대체로 느닷없이 나타나, 예상치 못하게 일상을 견디는 힘이 된다. 매일매일이라는 익숙한 책을 무심하게 넘기다가, 예기치 않은 페이지를 만난 것처럼. 사소하거나 짧은 기억들이 맥락 없이 뛰어들 때도 있다. 가물거리는 센 강의 일몰이나, 호텔 앞에서 나를 기다리던 그림자 하나, 공기가 멈춘듯한 어느 여름날 오후처럼. 그 기억들은 과거의 어떤 순간을, 그때의 감정들을 되살려놓고 떠난다. 그래서 다들 여행을 떠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특별한 기억을 만들러 가는 것이다. 지루한 일상은 우리를 길들이고, 반복되는 지금을 버티려면 가끔은 그런 기억도 필요하니까. 그 기억들이 다시, 지금을 살게 하니까.  


언젠가 몬트리올에서 맞은 새해의 기억도, 책 속에 끼워둔 지난날의 낙엽들처럼 일상에 끼어들 것이다. 2020년의 새해는 미미의 집에서 맞았다. 연말 파티원은 집주인 미미, 홈메이트 G, 친구 S, 나 이렇게 네 명이었다. 우리는 미미의 특별 요리를 밤늦도록 먹고 (역시나 음식이 쉼 없이 나왔다...), '몸으로 말해요'와 비슷한 게임을 했다. 한 사람이 몸짓으로 제시어를 묘사하면, 상대가 정답을 맞히는 식이었다. 제시어인 'G-String(티팬티)'이 뭔지 몰라서 기타 치는 시늉을 하며 string을 유도하고, 손가락으로 G 모양을 만드는 억지에 가까운 (그러나 너무나 우승에 필사적인) 게임 진행이었지만, 그것마저 너무 웃겨서 게임을 하는 내내 우리는 발을 구르며 웃었다. G가 사 온 치즈케이크에 초를 꽂고 새해의 소원을 빌기도 했다. 자정을 기다리는 동안, 작은 콘서트가 열렸다. 집에서는 몬트리올 엄마지만, 사실 미미는 열한 장의 음반을 내고, 전 세계를 누비며 공연을 하는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다. 우리는 거실의 오래된 피아노 앞에 옹기종기 모여서, 미미가 들려주는 연주와 노래를 들었다. 2020년은 그렇게 왔다.


새해를 맞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생일이었다. 내 생일 루틴은 늘 같았다. 평소처럼 출근을 했고, 퇴근길에 한국 베이커리를 들러 조각 케이크를 샀다. 딸기가 올라간 생크림 케이크와 고구마 케이크였다. 평소에 잘 가지 않는 한국 베이커리에 들러 케이크를 산다는 게 특별하다면 특별한 날. 그날도 별생각 없이 맞은 토요일 아침이었다. 침대 정리를 하고 방문을 열었는데, 커다란 전지에 쓴 생일 축하 메시지가 눈 앞에 걸려 있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벙 찐 얼굴로. 그때, 잠에서 덜 깬 얼굴로 미미가 나와 생일 축하한다고 말해주었다. 미미를 꼭 끌어안았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쏟아졌다. 그 날 점심, 홈메이트들과 함께 미미가 끓여준 미역국(!)을 먹었고, 미미 표 사과파이에 초를 꽂고 소원도 빌었다. 이렇게 따뜻하게 사랑받는 기분이 참 낯설어서, 내내 어쩔 줄 몰랐던 것 같다. 그날 저녁, 홈메이트 G가 딸기 생크림 케이크와 고구마 케이크를 사들고 내 방을 찾았다. 파리에서의 생일 루틴을 선물하고 싶었다는 말에, 나는 다시 (김행숙의 시처럼) 무릎 아래가 녹아드는 것 같았다. 이 "다정함의 세계"에서 영원히 일어나고 싶지 않아 졌다.


이 시간들을 기록하는 지금도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참 신기하다. 어떤 기억은 이렇게 떠올리는 것만으로, 지금을 행복하게 한다. 누구든 마찬가지인 것 같다. 우리는 우리를 살게 하는 기억들이 필요하다. 기억 속의 내가 누군가와 함께이든, 혼자이든, 특별한 날이든, 평범한 어떤 순간이든. 가만히 떠올라서 아주 잠깐 나를 웃게 만드는, 혹은 따뜻하게 만드는 나만의 기억들. 몬트리올에서 보내는 이 하루하루도 언젠가를 살게 하는 소중한 기억이 될 것이다. 나라고 이곳에서 늘 마음이 편안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스스로 허락한 이 방학이 곧 끝나리라는 걸 너무도 잘 알아서, 이후의 삶을 생각하면 하루에도 몇 번씩 불안해진다. 그럴 때면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기억을 확인하며 나를 토닥인다. 반짝이던 일루미의 불빛들, 미미의 손 끝에서 만들어지는 피아노의 선율, 사과파이 위에서 일렁이던 촛불 하나, 콧속이 얼어붙는 추위나 속수무책으로 쏟아지는 함박눈, 이렇게 큰 창이 보이는 도서관에서 코코아를 마시며 자판을 두드리는 지금도. 지금의 이 평화도. 어디로 가든, 무엇을 하든, 이 기억들이 나를 살게 할 거야. 다시,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거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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