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78화]
* 즉문즉설은 질문자의 조건이나 상황을 고려한 대화입니다. 보편적으로 적용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질문자 “스무 살 먹은 아들 녀석이 있는데요. 아내는 서울에서 직장 다니고 있고, 저와 아들은 지방에서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밥 먹고 게임만 합니다. 밤새도록 게임만 하고 한 두시 돼서 자는데 학교는 안 빠지고 잘 갑니다. 아들과 꾸준히 무언가를 함께 하면서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방안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아들이 하다가 포기한 목록을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탁구, 학원, 글쓰기, 음악, 미술입니다.” (청중 웃음)
법륜스님 “아드님이 신체적으로 건강합니까?”
“예, 건강합니다.”
“아들이 같이 살면서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것을 절반 정도 분담합니까?”
“네, 빨래도 개고, 청소도 하고, 밥도 하고, 반찬도 합니다.” (청중 웃음)
“훌륭한 아드님입니다. 아드님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여러분들 고등학교 때로 돌아가서 생각해 봅시다. 10월 말 월말고사에 수학 점수를 평상시에 80점 맞다가 60점을 맞으면 그때는 정말 속상했을 겁니다. 그런데 학교 다닐 때 시험 점수 좀 못 나온 일이 30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잖아요. 점수나 등수가 좀 변했다고 내 인생이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아예 공부를 안 하거나 완전히 죽기 살기로 한다면 차이가 좀 나겠지만 10등에서 15등 사이를 오르고 내린 그 정도는 사실 우리 인생에 아무런 차이가 없어요.
제가 15년 전에 아프가니스탄에서 난민을 돕기 위해 한 3년 간 활동했는데, 거기서 어느 날 밤에 초라한 숙소에서 침낭 깔고 잔 것과 고급 호텔에서 잔 것이 그날 저녁에는 차이가 엄청나게 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아무런 차이가 안 나요. 여러분들 나이가 앞으로 80세, 90세가 되었을 때 돌아보면 50세, 60세 때 직장에서 차장을 했든, 과장을 했든 그게 그렇게 중요할까요? 눈 감을 때 예전 어느 날 저녁에 쌀밥 먹었나 보리밥 먹었나 그게 중요할 것 같아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눈 감을 때의 관점을 일상 속에서 지닐 수 있으면 사실 사는데 특별할 일이 없어요. 매 순간 그때의 상황을 따지면 죽을 때까지 괴롭게 살아야 해요. 아빠와 아들이 단 둘이 같이 살 일이 많지 않잖아요. 조금 있으면 따로 떨어져 살아야 해요. 아들의 추억 속에 아빠 얘기를 듣고 공부를 좀 더 했던 것이 기억에 더 남을까요? 어떤 일이 있어도 아빠가 자기를 이해해주고, 게임도 좀 같이 해주었던 것이 기억에 남을까요?
‘게임하느라 힘들지? 주스나 좀 먹고 해라’ 이렇게 얘기해줬던 것이 30년 지나서 아빠가 돌아가신 뒤에 무덤 앞에 앉았을 때 더 기억에 남습니다. 여러분들은 아이들을 위해서 야단친다고 하지만, 야단을 치면 아이들에게 정신적으로 거의 도움이 안 되고 상처만 남습니다. 자기 욕심과 집착으로 야단치는 거면서 마치 아이를 위해서 한다고 착각을 하는 겁니다. 이렇게 착각을 하기 때문에 인생이 고달파지는 겁니다.
부모가 해야 할 역할은 아이에게 공부하라고 다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이가 성적 때문에 고민할 때 등을 두드려 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아빠도 네 나이 때 그런 고민을 했는데, 인생을 오래 살고 보니까 성적 좀 오르고 내리는 것은 별로 안 중요하더라. 엄마가 오늘 맛있는 거 사줄 테니 나가자. 갔다 와서 심기일전해서 다음에 잘하면 되잖아.’ (청중 박수)
여러분들은 쓸데없는 데는 엄청나게 에너지를 쏟으면서 자기도 괴롭고, 애들한테도 상처를 주는, 바보 같은 인생을 살 때가 많습니다. 아이들을 상담해보면 대부분 상처도 부모한테 받아요. 아이들의 성격은 대부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거예요. 부모가 짜증내고 성질낸 것을 닮아서 아이들도 성질내고 짜증 내는 거예요. 그런 어리석은 삶을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이가 아예 아무것도 안 하면 좀 문제지만, 아이가 밥도 하고 빨래도 한다면 아빠가 밥도 하고 빨래도 가끔 해주고 하세요. 실제로 삶을 사는 데는 밥이나 빨래를 잘하는 것이 중요한 거예요. 생활을 자기 책임 하에 사는 사람을 만나야 삶이 편하지,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공부를 잘하는 것은 사는데 아무 도움이 안 돼요. 같이 사는 데 있어서는 요리 솜씨가 도움이 되지 잘 생긴 게 도움돼요? (청중 웃음)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생활을 하는데 자기 직분을 다 한다면, 그 아이는 훌륭한 아들이에요. 다른 것들은 좀 소소하게 못해도 괜찮아요. 게임 좀 많이 한다고 뭐가 문제가 있어요. 옛날에 제가 자랄 때는 애들이 모두 만화방에 가 있어서 엄마가 가서 멱살을 잡고 끌고 오고 난리가 났는데, 제 친구들 중에 만화방에 가서 야단맞았던 애들 모두 다 결혼하고 애들 낳고 잘 살고 있어요.
지금은 밥 먹고 살 만한 시기이기 때문에 옛날과 달라요. 너무 아이를 억압하지 마세요. 게임하는 것이 조금 심하다 싶으면 고치는 것을 도와줄 수는 있어요. ‘하지 마라!’ 이렇게 하면 잘 안 고쳐져요. 회사 가지 말고 아이와 컴퓨터 게임을 계속 같이 하는 거예요. 아이가 학교에 가려고 하면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학교 가지 마라. 아빠도 직장 안 간다. 게임해보니 진짜 재미있네.’
‘직장 안 가면 어떻게 먹고살아.’
‘먹고살 것이 걱정이 되니?’
‘아빠가 직장은 갔으면 좋겠어.’
‘너도 학교 가면 좋겠어.’
고치려면 이렇게 해야 해요. 이렇게까지 할 생각이 없으면 고치려고 해서는 안돼요. 잘못했다고 종아리 때리면 그게 다 상처가 돼요, 아이들은 ‘100을 잘못했는데 맞은 건 500이다’라고 생각해서 억울한 거예요. 그래서 옛날 분들은 애들이 잘못하면 애들 보고 회초리를 가져오라고 해서 애들에게 엄마 종아리를 때리라고 하죠.
‘엄마, 왜 그래?’
‘내가 너를 잘못 가르쳐서 네가 이렇게 되었다. 너는 미성년자니까 네 잘못은 엄마 책임이다. 그러니 엄마를 다섯 대 때려라.’
이렇게 해서 아이가 감동을 해야 변화가 오는 겁니다. 감동을 해야 변화가 오지 의식으로 결심을 한다고 해서 절대로 바뀌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자기 성질은 못 바꾸는 거 알면서 남의 것은 자꾸 바꾸려고 그래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런 말을 하신 거예요.
‘제 눈에 대들보는 못 보고, 남의 눈의 티끌만 본다.’
바꾸려면 이렇게 접근하고, 그게 어렵다면 아이를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야 나도 좋고 아이도 스트레스를 안 받아요. 아이가 스무 살이 넘었으면 자기 인생은 자기가 살도록 해야 합니다. 제가 출가해서 절에 있을 때 어머니가 오셔서 저의 스승님께 항의하셨어요. ‘애를 고등학교라도 졸업하고 데려가야지 어떻게 학교 다니는 아이를 데려가느냐?’ 이렇게요. 그때 어머니가 항의를 한다고 해서 제가 어머니를 따라 집에 갔으면, 저는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자식이라 하더라도 남의 인생에 그렇게 간섭하면 안 돼요. 저는 부모의 간섭이 적었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같은 부모 만났으면 제가 오늘 이 자리에 못 서 있을 거예요.”
“네, 감사합니다.”
자식을 위해서 야단친다고 하지만,
야단을 치면 아이에게 정신적인 상처만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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