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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폼폼 May 31. 2024

병원에 한 번 가봐

저의 일기를 정리하고 공개합니다 2023년 12월

2023.12.04. 월요일


눈을 뜨니 남편은 옆에서 자고 있고, 코뚜레와 입막음 테이프는 내 얼굴에 잘 안착해 있었다. 오늘부터 아침식단을 조금 바꿨다. 빵과 우유에서 빵의 양을 반으로 줄이고 사과와 반숙란을 추가했다. 당연히 손이 더 간다. 귀찮구먼, 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반숙란 20개를 주문했다.




빨래를 돌렸다. 나의 외출이 줄어들어 세탁바구니에 들어가는 옷의 개수는 살짝 줄었는데 빨래 회수는 줄어들지 않는다. 누군가 나에게 빨래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아주 자주 해야 하는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건조기 필터를 세척해야 하는데,라고 생각(만)하며 탈수가 끝난 빨래를 넣고 문을 닫았다.




학교에서 연락이 와서 자율연수휴직을 위해 복직원을 냈다.




반쯤 찬 쓰레기봉투에 남편이 파쇄기 통을 비우고 있었다. 교무실에서는 그 파쇄기 비우는 일로 은근한 눈치싸움이 있다고 약간의 과장을 섞어 이야기해 주었다. 바쁠 때는 가득 찬 파쇄기통을 열어 윗부분만 꾹꾹 눌러쓰기도 자주 했지만, 그래도 나는 '그나마' 나서서 비우는 편이었다. 두 번 연속으로 비우는 일이 생기면 한 번도 비우는 일을 돕지 않는 자를 두고 맘 속으로 투덜거렸다. 남편은 당연히 이해하지 못했다. 회사는 청소인력이 따로 있으니 말이다. 


개인정보 보호를 강조하려면 더 좋은 파쇄기를 주거나 전문파쇄업체계약을 해달라. 과제도 다 패드로 하면 이런 것도 없어지려나.




이전에 호평이었던 스팸 순두부찌개를 끓이고 멸치를 볶았다. 누군가 선물을 준다면 원재료가 아니라 완제품으로 줬으면 좋겠다. 보험설계사님이 주신 멸치가 아직도 한 상자 넘게 그득히 남아 있다. 흑흑. 이게 있는데 멸치볶음을 사 먹을 수는 없다. 남이 밥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나서도 1/3쯤 남은 순두부찌개를 바라본다. 더 먹고 싶으면 먹으라 했더니 해치웠다. 잘 먹으니 좋다. 




화장실을 점검했다. 정기소독의 날이라서. 

지난번 소독의 날이 왔을 때, 나는 우울하고 무기력했다(지금 생각하니 그렇고, 그때는 몰랐음). 샤워부스가 있는 욕실이 머리카락으로 아주 개판이었다. 치워야 하는 걸 아는데 방치했다. 소독해 주는 분이 오셨고 그분이 욕실에 들어갈 때 나는 작게 "더러운데..."라고 말했다. 사용을 별로 안 해서 깨끗한 다른 욕실을 먼저 들렀던 그분은 "깨끗하던데요, 뭘..."이라고 말하시다가 말을 끝맺지 못하셨다. 그분이 가시고 나는 수치심을 느끼다 무기력을 느끼기를 반복했다. 지금은 나도 욕실도 그때보다 상태가 좋다.





커뮤니티 고민글을 종종 읽는다. 많은 댓글이 "병원에 한 번 가봐."로 끝난다. 나 역시 고민글을 보다가 건강한 사람들은 죽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한다는 걸 알았다. 그전에는 하도 인터넷에 우울한 사람이 많아서 다들 그렇게 사나 보다 싶었다. '자살'을 키워드로 검색한 커뮤니티의 모든 글을 읽으며 내 상태를 가늠하려 애쓰다 이상하긴 한가 보다 싶어 병원에 갔었다. 덕분에 많이 호전됐다. 그렇지만 세상 모든 고민을 병원으로 해결할 순 없을 것이다. 




대학원에서 심리치료 수업을 들을 때가 생각난다. 내가 배운 건 딱 세 가지였다. 



1. 나를 미치게 했던 그들은 병원 치료가 필요한 수준이었다. (훈계로 지도 불가)

2. 거의 모든 치료는 어릴 때 시작해야 효과가 좋다.

3. 돈이 있으면 정신이 아플 확률이 적다. 

    (아프던 사람도 금전적 여유가 생기면 낫는 경우 많음)



그래서 그 수업이 내 교직생활에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거의 다 큰 그들을 내 맘대로 병원에 보낼 수도 없고, 그들에게 내가 돈을 줄 수도 없으니.





수목원에 가려 했던 날이 차일피일 미뤄지더니 12월이 됐다. 수목원은 휴장에 들어갔다. 





오후 내내 간헐적 집안일을 하며 꿈틀댔다. 양털 위에 누워있는 치즈를 끌어안고 뽀뽀하며 고양이들의 세상은 나로 가득하겠지, 하고 생각했다. 매일매일 보는 게 이 집과 우리 부부가 전부니까. 엄마 품에서 영원한 아기고양이다. 늙지 않았으면.





어제, 파스타를 만들고 남은 생크림으로 남편이 크림브륄레를 만들었다. 냉장고에 식혀둔 그것을 꺼내 토치로 겉을 굳혔다. 숟가락으로 파작, 표면을 깨트려 커스터드 크림과 캐러멜라이즈 된 설탕막을 함께 떠먹는다.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남편이 만든 크림브륄레 중에서 가장 맛있었다. 다섯 번쯤 감탄하며 싹싹 긁어먹었다.





이불장 속에 처박힌 베개커버 한 쌍을 발굴했다. 반쯤 변색됐다. 끙.





저녁 식사 후에 아파트를 산책하는데, 세 번째 바퀴 시작 때 갑자기 배가 싸르르했다. 무시하고(!) 돌았는데 마지막엔 사색이 되어 집을 향해 걷고 있었다. 처음엔 뛰어봤는데 곧 엄청난 일이 생길 것 같아서 포기했다. 남편에게 말했다. "이러다 남편에게 밖에서 ㅌ하고 ㄸ싸는 여자로 기억되겠어." 무사히 집에 도착하여 일을 해결하고, 따뜻하게 충전한 돌을 안고 고민에 빠졌다. 생리양이 적어져서 내일 수영을 가려고 했는데, 내일 수영 중에 찬 물에 담가진 배가 아프면 어쩌지? 소름이 돋는다. 하지만 첫 수업이니까 가고 싶다. 끙끙거리는 내게 남편은 내일 아침에 뜨거운 물에 누룽지나 말아먹으라 했다... "빵 먹고 싶어."라고 하자 "아직 덜 아프구먼."이라는 말이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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