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해지는 법을 잃어버린 나에게

이해와 존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놓치고 있는 줄도 모르고

by 폼폼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서 정다은 간호사는 과할 정도로 환자에게 이입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환자를 위하는 정신병동 간호사이다. 환자의 사연이 안타까워 뭐라도 좀 더 해주고 싶은 마음에 간호사로서 해 주어야 할 처치를 넘어서는 사람. 그 과정에서 때로는 본인이 몸과 마음의 상처를 입거나, 본의 아니게 다른 간호사에게 피해를 주거나, 환자가 예기치 못한 반응을 하게끔 만드는 등 부작용이 따를 때도 있다. 그러나, 정다은 간호사는 확실히 '인간적이며 좋은' 간호사이다.


드라마 후반부에 정다은 간호사는 우울증으로 다른 병원 정신병동에 입원하게 된다. 우울증이 극심하게 발현된 데에는 결정적인 계기가 있지만, 드라마는 정다은 간호사가 평소에 어떠한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너무 좋은 간호사라서요, 자기 자신보다는 남한테 더 집중을 하고, 자기가 아픈 것보다는 남의 상처를 더 아파해서요, 무슨 일을 만나든 이쁜 것만 내보내고 험한 건 안으로 삼키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을 때는 자기 자신을 탓하는 걸로 해답을 찾는 사람이라서요."


사람의 마음에 병이 생기고 시들어 가는 건 생각보다 아주 결정적인 일에 의한 것이 아님을, 결코 한 순간 때문만이 아님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애쓰는 과정이 나도 모르게 나를 아프게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타인보다 자신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 때로는 다른 이들의 기분을 고려하기보다 내 기분을 먼저 살피어 행동하는 것, 내가 힘들 때는 험하고 싫은 소리도 할 줄 아는 것. 이것들은 많은 이들이 아무렇게 하는 일들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한 번조차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어느 저녁, 회의를 하러 갔다가 사각지대에 있는 야트막한 돌계단을 보지 못한 채 커브를 돌다 차의 일부분이 파손되었다. 그날 가장 힘이 셌던 감정은 후회와 원망이었다. 주차 공간을 찾으러 좁은 곳으로 들어간 내가, 계단을 보지 못한 내가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그저 속이 상하고 당황스러워서 울고 싶었기에 회의는 내게 더 이상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날 나는 함께 계신 분께 '침착하게' 도움을 요청한 뒤, 속상함이 '약간' 새어 나오긴 했지만 애써 '담담하려' 노력했고, '그래도' 회의는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기에 회의도 예정대로 최선을 다해 참석했다.


다행히 함께 계신 분께서 야무지게 도와주신 덕분에 일시적으로 집까지 갈 정도의 상태는 되었으나, 다음 날 운전하여 출근을 하기에는 차 상태도 내 마음도 영 불안했다. 그러나 어쩐지 교감 선생님께 내일 조금 늦게 출근해도 될지 여쭤보는 전화를 드리기가 망설여졌다. 찰나에 많은 생각들이 스쳤다. '내일 학교를 늦게 가도 괜찮을까', '아 맞다, 내일 회의 있는데', '임시방편으로 당장은 어떻게 되었으니 내일 출근했다가 일찍 퇵근하는게 나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안전이랑 직결된 문제잖아', '너 지금 학교에서 책임 있게 네 역할 다하려고 충분히 애쓰고 있잖아', '지금은 네 입장 생각해도 되는 정도의 상황이잖아', '다른 사람이었어도 이렇게 했을 거야', '잘 참고 내일 출근하면 누가 알아주는데? 네 입장 먼저 생각해도 돼'. 이러한 생각들이 맞서준 덕분에 나는 교감 선생님께 연락드려 상황을 말씀드렸고 다음 날 차 수리를 맡긴 뒤 천천히 출근했다. 대신, 내가 늦게 가게 되어 수고해 준 여러 사람들에게 굉장히 미안해하고 고마워하면서.


그리고 오늘, 몸이 너무 안 좋아 내일 갑작스럽게 출근을 못하게 되었다는 동료의 연락을 받았다. 나는 최근에 스트레스 많이 받아서 그런 거냐며, 학교 일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으니 병원 조심해서 잘 다녀오라는 말을 '당연하게', '몇 번이고' 건넸다. 진심을 다해서.


나는 어떤 상황을 듣거나 마주하면 나도 모르게 상대방을 깊숙이 들여다보며 그 사람의 상황과 입장이 되어 본다. 아니, 되고 만다는 표현이 좀 더 적절할까. 이야기를 듣고 상황을 지켜보며, 그 사람의 기분이 어떨지, 어떤 마음일지 있는 힘껏 추측하고 헤아리려 애쓴다. 나아가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을지를 생각해 본다. 사실, 가끔은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요즘은 종종 생각한다. 이건 병일지도 모르겠다고.


기한 내에 우선적으로 해주어야 하는 일을 전혀 챙기지 못하고 있다가 결국 그 일이 내 몫이 되게 하는 동료에게 나는 어제도, 오늘도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야 할 일임에도 내가 편하고 착하다는 이유로 쉽게 부탁하는 상급자에게 나는 거절과 항의는커녕 이해를 내밀기도 한다. 곰곰 생각해 보면 그분이 가장 힘든 위치에 서 있으니 괴로울 것이며 결코 나쁜 분은 아니고 정도 참 많은 분이라고, 바쁜 와중에 사소한 것까지 챙기시느라 애써주셔서 고맙다는 말을 곁들이면서. 여유가 있는 상황도 아니면서, 사실 나도 힘에 부치면서 왜 항상 나는 내가 이고 있는 짐에 조금씩 돌을 얹는 이들에게 웃으면서 밝은 모습만 보이려고 부단히 애쓰고 있는 걸까.


이런 날들은 유독 에너지가 더 많이 소모되는가 보다. 그도 그럴 것이 내 마음에 솔직하지 못해서 나를 속이는 일이니까, 나를 속이는 일은 나를 힘들게 하는 일이 맞으니까. 에너지가 다 소진되어 지친 채로 집에 와 금세 피곤해하던 요즘의 나를 떠올려 본다. 책임을 다하기 위해,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모습을 보이느라 나를 조금 제쳐두는 날들이 쌓이고 쌓이면서, 나는 어느새 기계처럼 다른 이들의 입장에 서 있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고 좀 더 쉬운 일이 되었다. 상대를 향한 내 마음들이 진심인지 아닌지 혼동하는 날들이 생기고, 나를 먼저 생각하는 일이 어려워지고 있다. 요즘 더욱이 그렇다.


책 <어른의 행복은 조용하다>에서는 섬세한 이들이 자주 번아웃을 겪는다고 했다. 겨울 냄새와 봄 냄새와 같은 계절의 향을 느낄 수 있는 삶을 사는 만큼 다른 이들의 감정과 상황 또한 원치 않음에도 느끼고 마는 탓이다.


"친구들의 무너짐에 울고 위로하는 건 이들이 가장 잘하는 일이다. 가족들의 안 좋은 감정 역시 모두 이들의 차지다. 회사에서도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문제 자체에 대한 민감성이 아주 높기에 친구와 가족과 회사와 학교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가장 앞서 반응한다. 물론 해결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해결하지 않고서는 마음이 불편해서 살 수가 없어서. 그러나 슬프게도 자기 자신에 대한 문제만큼은 어디서도 드러내지 않는다. 절대. 타인의 감정을 대신 책임지는 것이 얼마나 지치는 일인지 잘 알기에 내 감정만큼은 누구에게도 쉽게 넘겨주지 않는다. 마치 밀린 설거지 중 맨 아래 위치한 그릇처럼 내 마음만은 씻어내지 못한 채 매번 그대로다." (25-26p)


다른 사람 마음이 걱정된다는, 자신 주변의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정다은 간호사에게 담당 의사는 한 번 이기적으로, 정다은 님이 원하는 대로 살아보라고 권한다.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느라 뒷걸음질 치고 있던 나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건 아닌지, 배려와 존중이라 여겼던 순간들이 쌓이고 쌓여 정작 나를 돌보는 법을 잃어버리고 있는 건 아닌지 나의 하루를 잘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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