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떠나고 싶지만, 작정하고 떠나다

- 작아지는 나

by 낮은돌담

어쩌다 보니, 우연히 학교 실장을 맡게 되었다. 순전히 가위바위보에서 진 것과 착해 보이는 첫인상 때문이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고 선생님은 1반부터 12반까지 4그룹으로 나눠서 서라고 했다. 그리고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사람은 나오라고 했다. 그렇게 우리 네 명은 실장, 부실장, 서기, 총무의 역할의 후보가 되었다. 그리고 착해 보이는 나의 첫인상은 꽤 많은 표를 받아 실장이 된 것이다. 그렇게 고등학교 3학년 때도 실장을 하게 되었다.

보통 실장이라고 하면 우수한 성적을 떠올리나, 나는 그렇게 우수한 성적은 아니지만 나쁘지는 않은 성적이었다. 내가 특히 자신 있는 과목은 '국어, 수학'이었고 '영어'는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다.

나의 '영어'가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던 것은 내가 '국어'를 잘했기 때문이다. 몇 가지 아는 단어만 보고도 대략적으로 독해가 가능하였고 그렇게 나의 시험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단어가 한정적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영어회화 선생님은 매 시간마다 단어시험을 쳤다. 그리고 그 시험지를 다 걷어서 섞은 후 다시 나눠 준 다음에 어김없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실장 것 가져와."

나는 실장이다. 나는 선생님이 불러주시는 영단어 대부분을 적지 못했다. 그럼 어김없이 이어지는 말.

"2번 뭐야?"

이렇게 나의 성적은 온 학생에게 공개되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스트레스였냐면 고작 단어시험을 위해 전날 밤새 공부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암기 능력이 뛰어난 편이라 예전에 '국민교육헌장'을 다 외워 상도 받았고 대부분의 암기 과목을 잘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 놈의 영단어는 죽어도 안 외워진다.

그렇게 밤새 공부했음에도 절반도 맞추지 못한 날, 나는 교무실로 찾아갔다.

"선생님, 저 어제 밤새 공부했어요. 그런데도 쪽지시험 점수가 이렇습니다. 앞으로는 쪽지 시험 보고 나서 부실장 것을 가져가 주시면 안 될까요?"

부실장은 우리 반 모두가 인정할 정도로 영어능력자였다. 그러니 부실장 것을 가져가면 될 일이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나의 제안을 받아주지 않으셨고 일 년 내내 나의 빈 쪽지 시험지는 영어 선생님에게로 향했다.

여행을 좋아하는 내가 영어공부를 안 했을 리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도대체가 늘지를 않는다. 그럼에도 이런 나를 받아들이며 나는 여행을 유지하고 있다.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다. 그런데 한국인 가족이 들어온다. 엄마, 아빠, 어린아이 두 명. 즐겁게 여행 중이신 듯하다. 그런데 이 네 명 모두가 영어가 능숙하다.

그런 순간, 나도 모르게 나는 작아진다.

뭔가 머쓱해진다. 왜냐하면 사실 나는 영어가 능숙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영어를 하지 못하는 지금 나의 상황은 정확히는 나의 목표가 실패했음이다.

그래도 외국인 앞에서 영어를 못할 때는 괜찮은데 괜스레 한국인 앞에서 영어를 못하는 것은 이상하게도 작아진다. 정작 그들은 나의 이런 상황을 전혀 모른데도 말이다.


오늘은 오후에 맹그로브 카약을 하기로 했다. 드디어 첫 액티비티다.

트럭을 개조해서 만든 썽태우와 비슷한 차량을 탑승하고 출발.

우리 말고 외국인 커플 1팀, 그리고 우리가 준비 중인데 오토바이를 타고 직접 찾아온 외국인 커플 1팀. 우리까지 총 3팀이다.

그리고 영어로 진행되는 투어. 예전에 카약을 타본 적이 있는 데다가 진행자가 설명하며 하는 몸짓으로도 다 알겠다. 그리고 진행자의 배를 따라가면 될 일이니,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

나는 셋째와, 첫째와 둘째가 각각 1팀이 되어 신나게 출발!

운동신경이 없는 나는 얼핏 보고 따라 하기가 너무 힘들다. 처음부터 뭍으로 가게 되고 빠져나오기가 힘들다. 게다가 신나서 흥분한 셋째는 노를 마구 젓는다. 방향이 뒤죽박죽. 우리의 카약은 더 방향을 잃는다.

진행자가 우리에게 와서 나에게 노를 잡는 법을 알려주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를 않는다.

그리고 나에게 뭐라고 하는데 내가 들은 것은 300바트 밖에 안 들린다. 나는 '노'라고 답했고 더 작아진 나는 괜스레 진행자의 표정에 예민해진다.

나는 연신 들떠서 노를 젓는 아이에게 예민하게 군다.

"멈춰, 멈추라고 했지."

이 카약에서 내리고 싶다. 나의 운동 신경으로는 한국어로 진행되더라도 제대로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걸 영어로 뭐라고 하니 더 뒤죽박죽. 우리는 두 시간을 카약을 타야 하는 것이다.

나와 셋째 말고 모두가 평화롭고 즐겁다.

나는 오로지 우리 그룹을 따라가야 한다는 일념이다. 이것은 노동보다 더 한 강도이다. 노를 마구 젓다 보니 카약 안으로 물이 들어오고, 결국 뭍에서 못 나오는 우리를 보고 진행자가 밖으로 나와 걸어서 카약을 빼내라고 했다. 그러다 보니 옷이 다 젖었다. 나는 지금 생리 중이다. 나의 엉덩이가 물놀이를 한 것처럼 젖었다.

노동보다 더 한 강도, 그 강도에 맞춰 셋째를 향한 나의 날카로움도 계속된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셋째는 정확히 노 젓는 법을 알고 있었다. 방향을 조정하는 법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상황파악이 나보다 조금 더 늦을 뿐이고, 호기심이 많을 뿐이다.

셋째는 4살 때부터 소아뇌전증이 시작되었다. 그때는 증상이 더 심해서 어린이집에서 놀다가도 증상이 나타났고 아이의 입장에서는 친구와 놀고 있었는데 눈 뜨면 집인 상황이 잦았다.

한참 사회성이 증진될 시기에 아이의 끊기는 상황은 분명히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게 아이는 자라서 11살이 되었다. 아이는 자기주장이 강하고 사람을 좋아하지만 관계 맺는 것에 어려움이 있다.

그러니 카약을 타는 상황에서도 나는 아이가 그저 들떠서 자기 멋대로라고 생각한 것이다.

'영어'로 일어난 상황들은 나를 예민하게 만들었고 나를 작게 만들었고 나를 속 좁게 만들었다.

멋진 풍경을 찍고 돌아오는데 아이가 혼자 되뇌며 열심히 노를 젓는다.

"나는 잘할 수 있어.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실패하면 안 된다."

다시, 정신이 번쩍 든다.

"셋째야, 엄마가 계속 못하게 해서 미안해. 정말 미안했어. 엄마가 너무 힘들어서 그랬어. 미안해. 너무 잘하고 있고, 실패해도 돼. 그럼 저 아저씨가 우리를 구해주러 올 거야. 우리는 그냥 저 아저씨를 따라 천천히 가면 되는 거야."

그러고 나니 우리는 아름다운 절경에 둘러싸여 있다.

그때부터 아이와 바위도 보고 하늘도 본다.

그리고 잠시 쉬는 시간. 그 절경의 한가운데 뭍으로 나와 모랫속을 다니는 게도 찾아보고 아이들이 원했던 수영도 했다.

그림 같은 풍경이다.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고 푸르른 물. 그곳에서 행복한 아이들.

한바탕 놀고서 다시 돌아가는 길, 나의 어깨와 손은 만신창이지만 가는 길은 훨씬 편안하다.

아이는 이제 힘이 다 빠졌다고 노를 젓기 힘들다고 하여 누워서 하늘을 보라고 했고 눈이 부실까 싶어 나의 선글라스를 준다. 나는 눈부신 햇살을 그대로 맞으며 작지만 평안해진 마음으로 노를 젓는다.

돌아오니 시원한 수박을 내어준다. 그리고 물기를 닦아내는데 우리를 제외한 다른 두 팀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가방을 받으며 진행자에게 말한다.

"Thank you. And I'm sorry for late."

사실 내내 굳은 표정의 진행자가 신경 쓰였다. 나 때문에 전체가 늦어지는 것이 또 신경 쓰였고 눈치가 보였다. 그런데 그는 그냥 굳은 표정을 지닌 사람이었다. 나의 말에 웃으며 괜찮다고 말한다. 내가 너무 힘들었다고 하니 그럴 것 같다고 하며 아플 것이라고도 말한다.

돌아가는 차, 우리 그룹 말고 다른 그룹의 한 팀이 더 있었다. 차를 타려는데 옷이 젖어서 그들 옆에 앉기가 미안했다.

"I wet."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한 표정이다. 내 옷을 보이며 다시 한번 웻, 그러자 웃으며 괜찮다고 말한다. 그렇게 우리 네 명이 차량에 올라탔는데 진행자가 조금 늦어진다. 더운데 갑자기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미리 타고 있었던 그 외국인이 부채를 꺼내 부치며 "Wow!" 하며 익살스레 웃는다.

나는 영어를 하지 못한다는 것에서 상황을 조금 곡해해서 보았던 것 같다.

나와 함께 오는 차량에 탔던 외국인커플은 다시 보니 조용한 편인 듯하다. 그리고 돌아갈 때 탔던 또 다른 팀은 그들 자체가 유쾌하고 외향적인 사람들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주 내향적인 사람이기에 먼저 다가가 농담을 하거나 대화를 나누지 못했던 것일 뿐이다. 그저 그것뿐인 것이다.

나의 언어가 유창하면 더 좋았겠지만, 어쩌면 개인의 성향이 드러나는 것뿐인데 나는 나의 약한 점을 누구보다도 스스로 크게 들어내며 스스로 작아졌던 것이다.

욱신거리는 어깨에 셋째의 머리가 닿고 얼얼한 손은 셋째의 손을 잡았다.

즐거운 피곤함에 잠이 든 아이와 다시 부족한 나를 인정하는 나로 돌아오는 차 안이다.

KakaoTalk_20240106_233820375.jpg 내가 마주하는 나를 작아지게 만드는 순간은 다시 나를 키워간다. 그림 같았던 풍경을 차마 사진으로 담아낼 수 없었다. 그저 '노젓기'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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