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떠나고 싶지만, 작정하고 떠나다

- 힘들지만 짜증이 나지는 않아.

by 낮은돌담

마음에 들지 않는 이 숙소를 얼른 옮기고 싶다.

또, 이제 옮기는 숙소에서 이틀이면 예약해 둔 숙소는 끝이다.

숙소도 알아봐야 하고 끄라비에 적응도 해야 하는데 물놀이가 중심이 될 이곳에 오는 날 월경의 시작은 상황을 더 곤란하게 만든다.

심지어 이번 주는 예정일도 아니었다. 일주일이나 빨리 시작하다니..

우선은 숙소를 옮겨보기로 한다. 그리고 옮기는 숙소가 마음에 들면 연장하기로 한다.

이제 더 이상 싱글베드 세 개가 있는 숙소는 안될 것 같다.

옮기는 숙소도 싱글베드 세 개가 있는 곳이다.

먹는 양이 줄고, 잠도 편하게 못 잔다. 셋째가 떨어질까 봐 자다가도 계속 아이를 챙기게 된다.

이제는 적어도 퀸 베드가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숙소를 검색해 보았는데 이곳은 지금이 성수기다. 가격과 나의 조건이 맞는 곳을 찾기가 힘든 데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 숙소를 처음으로 마주하고 보니 우선 보고 나서 결정하고 싶은 간사한 마음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한두 번의 경험은 나를 확고히 만들었다. 바로 가까운 거리는 그랩이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글 지도를 보니 걸어서 16분, 차로는 3분이면 된다.

그랩이 잡힐 리 없다는 확고한 생각, 그리고 얼른 숙소를 옮기고 싶은 마음, 거기에 몸 상태까지..

걸어가야겠다는 무모한 생각이 든다. 이곳은 더운 데다가 두 개의 캐리어에다가 배낭을 합치고 나면 그 무게가 상당할텐데도 걸어가야겠다는 생각은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다.

둘째는 싫다고 하지만, 아이는 안다. 엄마의 생각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14살 둘째 아이는 나보다 키도 크고 힘도 세다.

아이는 몸을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고 사실, 여행기간 내내 모든 무거운 것들을 도맡고 있다.

아이가 들 캐리어에 이것저것 주렁주렁 매달았다. 족히 30Kg은 넘을 것이다. 나도 캐리어 하나와 빨래들을 잔뜩 매달았다.

그리고 걷기 시작한다.

너무 덥다. 게다가 대리석 같은 길이 아닌 울퉁불퉁한 길이어서 캐리어를 끄는 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제주도에 살고 있고 나는 친정이 대구라 비행기 탈 일이 많았다.

그리고 아이가 세 명이니 짐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렇지만 한 번도 캐리어를 사 본 적이 없다. 누군가가 쓰던 것을 받았다.

이번 여행에 함께 한 캐리어도 내가 바퀴 네 개 달린 거 쓰고 싶다고 말했더니(사람들은 바퀴 네 개 캐리어가 대부분일 때도 나는 바퀴 두 개 캐리어를 비스듬히 하여 끌고 다녔었다.) 아는 이가 바퀴의 중심축이 자꾸 빠지지만, 한 두 번 쓰고 버리라며 바퀴 내 개 캐리어를 준 것이다. 그것을 받아다가 거의 오 년째 쓰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도 상태가 좋지 않다. 지퍼를 닫는데 지퍼의 맞물림이 맞지 않아 중간에 터지면 어쩌나 걱정했었다.

매끈하지 않은 길과 이번 여행을 끝으로 쓰임을 다할 것 같은 캐리어, 그리고 더위.

너무 힘들다. 힘들어서 짜증이 밀려온다. 게다가 나는 생리통 중이었다.

둘째 아이가 끄는 캐리어는 중간에 결국은 바퀴의 중심축이 말썽을 부려 손으로 고쳤는데 손이 너무 뜨겁단다. 그리고 이것 저것 매달아놓았더니 짐이 넘어지기까지 한다.

이미 반을 걸었다. 되돌릴 수 없다. 이를 악물고 끝까지 갔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놓여있는 의자에 털썩 몸을 던진다.

그리고 둘째 아이에게 말한다.

"너무 짜증이나. 우리 서로에게 한 번씩 짜증 낼까?"

"왜? 엄마, 나는 사실 힘들기는 했지만 짜증이 나지는 않아."

힘든 것과 짜증이 나는 것은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천지차이다.

힘들었던 아이는 목적지에 도착하였고 힘듦이 사라지고 쉬이 평화가 온다.

짜증이 났던 나는 목적지에 도착하였음에도 여전히 '짜증'이 멈추지 않는다.

맞아, 이건 힘든 일이었어. 그리고 그걸 해냈잖아!


여전히 '짜증'이 머물러있던 나는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모기를 발견했고 이후로 새로운 숙소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이들은 지금까지의 수영장 중에 수영장 물이 가장 깊다는 이유로 너무나 마음에 들어 한다.

사실, 마음이 잘 마무리가 되고 나서 보니 새로운 숙소는 후아힌에서의 숙소보다 조금 더 유니크한 분위기가 있는 좋은 곳이었다.

그런데 들어서자마자 발견한 모기 한 마리를 트집 잡고 있는 것이다. 짜증이 난 나는..

나의 상태도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월경주기가 같은 첫째도 어제 월경을 시작했고 우리는 둘 다 예상보다 일주일이나 빨리 월경을 하게 된 것이다.

이곳은 온갖 섬투어와 스노클링을 할 수 있는 크라비라는 섬이다.

이곳에서의 일정은 다 '물'이었다.

게다가 첫째 아이는 물을 사랑하는 아이이다. 아이는 수영장을 보고서 물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고 그럴 수 없음에 대해 스스로 참아내고 있었다.

나는 첫째도 물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떤 일정을 만들어가야 하나 당황스러워진 것이다.

다시 생각해 보면 얼마나 다행인 일인가. 나와 첫째 아이가 같이 월경을 시작하였으니 대략 일주일 후면 이후에는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싫어.'가 지배해 버린 그 순간에는 '왜 하필'이라는 생각이 모든 생각의 시작에 서게 된다.

그리고 결국은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둘째 아이가 동생에게 말한다.

"지금은 엄마가 아무것도 아닌 걸로도 크게 화를 낼 수 있는 어이없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어. "

아이의 말을 듣고 피식 웃음이 난다.

"엄마가 뭐?"

"동생아, 내가 아까 당했거든."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든다.

사실, 처음으로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드는 날이었다.

나는 계속 잠을 못 잤고, 먹는 양이 현저히 줄었으며 낯선 땅에서의 적응 중이었고 오늘은 언젠가 한 번은 거쳐야 하는 모든 싫은 것들이 합쳐져 싫은 마음의 꼭대기에 가야 했던 날이었다.

그리고 꼭대기에 올라서고 보니, 다시 내려올 마음이 생겼다.

둘째와 셋째를 수영장에 보내고, 나와 첫째는 모든 짐을 풀었다. 그리고 모아두었던 빨래를 챙겨 바로 앞 빨래방으로 가져갔다.

출국 전까지도 정신이 없어 짐을 뒤죽박죽으로 쌌었기에 짐을 풀고 다시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틀 후에 머물 숙소도 정했다.(지나고 나니 마음에 들지만 그 사이에 예약이 다 찼다. 이제 머물고 싶어도 떠나야 한다.)

짐을 정리하며 마음을 정리했다.

싫은 마음의 꼭대기에서 나는 내려오기로 했고 그러고 나니 모든 것이 그냥 수월해졌다.

위기가 이렇게 지나가고 있다.


KakaoTalk_20240106_233046174.jpg 캐리어에 양손을 올리고 밀어야 한다. 허리도 아프고 덥다. 걷는 것은 자신 있지만 이렇게 캐리어를 들고 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임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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