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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폰더 Jul 27. 2021

그렇다면 난 열심히 살지 않겠다

    2013년 3월. 겨울이 물러나고 봄맞이를 막 준비하던 때였다. 이상하게 몸이 좋지 않았다. 주말마다 병원에 가서 영양제를 맞고 틈만 나면 잠을 자고 쉬었다. 그래도 컨디션은 회복되지 않았다. 이때 엄마는 짐작하셨단다. 어딘가 큰 문제가 생긴 거라고. 유전이었다. 정 씨 집안 장녀에게만 내려오는 무슨 저주 같은 질병. 뇌종양. 맏딸이었던 할머니가 그랬고 첫째 딸인 큰 고모가 그렇게 돌아가셨다. 두 분 다 쉰을 넘기지 못하셨다. 그다음 세대 장녀가 나다. 어김없이 뇌종양은 맏딸인 나를 찾아왔고 나는 서른둘에 머리를 여는 개두술과 방사선 치료를 해야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뇌종양은 드라마 여주인공이나 걸리는 질병인 줄로만 알았다.


    수술과 치료는 현실이 되었고 과정은 꽤나 힘겨웠다. 수술이 아주 잘 됐지만 재발률이 높은 암이었기에 이런 물음이 종종 들었다. 나도 쉰을 넘기지 못하면 어쩌지? 이제 서른 초반인데 15년 정도 남았나? 그렇다면 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답은 하나였다. 예전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가 소멸하기엔 인생이 너무 억울할 것 같았다. 애만 쓰다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일을 그만뒀다. 어학원 강사로 나름 잘 나갔고 돈도 많이 벌었지만 나를 소진하며 아이들 앞길을 빛내주는 일은 더 이상 하기 싫었다. 


    대학원에 가서 영어학을 제대로 공부했다. 박사 학위를 받았다. 살을 깎는 고통을 몸소 체험했다. 논문을 쓰느라 3kg이 빠졌다. 너무 힘들었지만 공부하는 5년이 정말 행복했다. 이후 들어오는 강의는 온라인으로만 하고 전업 프리랜서 번역가가 됐다. 시간 여유가 생겼고 일하는데 장소 제약이 없어졌다. 꿈에 그리던 디지털 노매드가 된 것이다. 언제든 놀 수 있고 해야 할 일로 스트레스나 압박도 없다. 번역 일이 있으면 코어타임에 하고 없으면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본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다. 새벽에 일어나 하고 싶은 걸 하고 반드시 챙겨 먹는 나름에 건강식을 먹고 또 잘 수 있는 선택권이 있다. 매일 아쉬탕가 마이솔 수련을 위해 요가원에 간다. 내 몸의 미세한 힘줄까지 집중해 운동을 1시간 넘게 한다. 테니스를 배우기 시작했고 우쿨렐레 강습을 받고 서핑을 이전보다 자주 간다. 3주에 한 번씩 정신건강의학과 심리상담을 받는다. 선생님과 이야기 나누며 늘 나를 돌아본다. 매일 몸과 마음을 관리한다. 


    자본주의 사회 기준으로 볼 때 잉여인간처럼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아닌가 가끔 생각한다. 그런데 여전히 내 대답은 이게 맞다. 백세시대 유병장수가 간절한 꿈이 되었다. 백 살까지 살면서 80세까지 지식 노동을 하려면 아주 길고 가늘게 살아야 한다. 그러려면 에너지를 너무 많이 소진하면 안 된다. 조금씩 얇게 써야 한다.

고용불안과 불규칙한 금전 문제로 약간의 스트레스를 매일 감수해야 하지만 이전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풍족한 노후와 행복한 미래라는 무형의 꿈을 위해 포기한 꽃다웠던 희망을 생각하면 그렇게 잔인할 수가 없다. 나를 희생하고 돈과 맞바꾼 게 뇌종양이라니.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교훈을 호되게 가르쳐 줬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자.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다. 열심히 살지 않아도 된다. 나까지 열심히 살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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