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카레니나 이야기를 하다가 남편에게 물었다.
당신은 내가 바람피면 어떨 거 같아?
: 놀다가 돌아와
그게 돼?
: 누가 그러더라. 세상은 모르는 지옥 아니면 아는지옥이래. 너 없는 모르는 지옥보다, 너 있는 아는 지옥이 나을 거 같다. 난 당신 없이는 못 살아.
모르는 지옥, 아는 지옥.
그이는 남아있는 술을 홀짝 마시고는 소파에 뻗어버렸고 나는 남아 있는 잔의 술을 바라봤다.
그이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준다.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의 고유성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참을 수 있는데, 나는 왜 못 참지?
: 사람은 다 다른데 왜 비교해. 당신은 내게 없는 추진력이 있잖아.
그는 참지 못하는 나를 탓하지 않는다. 자기가 잘 참는 것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잘잘못이 아니다.
그이에게는 우리가 다른 사람이라는 게 중요하다. 그 점을 늘 내게 말해준다.
나는 무리에서 항상 앞장서서 걷는다.
시댁 가족이든 친정 가족이든 친구들 모임이건, 회사를 같이 다닐 때도.
나는 목적지를 향해 걸음이 빨라지고 방향을 잡아가며 앞을 보며 걷는다. 그러면 어느새 늘 선두이다.
그런 나를 보고 사람들이 오리가족처럼 졸졸졸 쫓아온다.
마지막에는 항상 그이가 있다.
그이는 항상 마지막에 오는 사람을 챙긴다.
그 사람은 우리 엄마 일 때도 시아버지일 때도 풀꽃에 눈길주고 있는 우리 윤서 일 때도 있다. 유모차를 끌고 있는 친구일 때도 있다.
그이는 재촉하지 않고 항상 마지막 사람 두 발자국 뒤에서 천천히 걷는다. 항상 자기가 마지막이 된다.
나는 그런 그이가 좋다. 그이는 그 어려운걸 늘 당연한 듯 편하게 한다. 그리고 공기처럼 티 내지 않는다.
아침잠 많은 그이가 오늘도 힘겹게 출근을 한다. 이십 년째 힘든걸 매일 해내는 그이가 대단하다 생각하면서도 안쓰럽다. 그이는 현관에서 매번 나를 꽉 안는다. 그리고는 귀엽게 쪽- 하고 다녀올게 하며 나선다. 지각을 하는 한이 있어도 안는 걸 잊지 않는다. 그이한테는 그게 참 중요하다. 그이는 알고 있다. 우리의 심장이 마주 안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잠시지만 그 순간을 위해 우리가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애교도 없고 그이에게 예전에 비해 표현도 못한다. 내가 못하는 양만큼 그가 더 해주고 있다. 나를 아껴주고 사랑해 주는 게 느껴진다. 내가 사랑스러워서가 아니라 그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다. 내가 가진 사랑의 총량이 국대접이면 그이는 냉면기이다. 나는 그를 닮고 싶다. 그처럼 조용히 풍부하게 사랑해주고 싶다.
우리는 오늘도 아는 지옥에 있건지지 모르겠다. 그런데 함께 있으니 지옥 같지 않다. 전쟁통이든 영원한 회귀 중의 한낱 이 든, 당신이 나를 꽉 안아주는 한 우리는 함께할 수 있을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