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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리 Aug 29. 2019

여름의 끝자락, 아무캠의 한가운데에서 보낸 날들.

아무캠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에 대한 이야기

아무캠 어땠어?
이야기 좀 들려줘!





아무나 와서 아무렇게나 즐기면 된다는 이상한 영화제, 아무캠(아일랜드 무비 캠프 페스타)에 다녀왔다.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아 더욱 비밀스러운 축제 아무캠의 한가운데에서 직접 느낀 매력적인 순간들을 기록해 보았다. 아무캠의 정체가 궁금했던 모든 이들에게 바치는, 내년을 위한 영업. 하지만 너무 많이 오시면 제 자리가 없을 수도 있으니까 조금만 오세요. 진심입니다.








마음껏 드러누워

뒹굴면서 영화 본 적 있나요.

그것도 청량한 여름빛, 제주에서.



"아무캠의 시작은 벌러덩 드러눕는 것으로부터!"


축제 시기에 발맞춰 플레이스 캠프 제주 광장에 푸르른 잔디밭이 깔렸다. 8월 말의 제주는 제법 선선해져 있었고 하늘은 맑았다. 마침 <오, 여정 : 여름/제주>를 상영 중이었다. 친구의 갑작스러운 여행 취소로 혼자가 된 여정이의 여름 여행 이야기다. 커다란 스크린 위로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늦여름의 공기가 느릿느릿 흘러간다. 사람들이 하나 둘씩 돗자리 위에 앉거나 눕기 시작한다. 나도 신발을 벗고 잔디 위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았다. 산들거리는 바람 사이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으니 이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이 곳엔 여러 번 왔지만 광장에서 이렇게 여유롭게 뒹굴어 본 건 처음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인파가 조금씩 모여들며 활기가 돈다. 골목에 늘어선 마켓에서 와인도 사고 먹을거리도 사서 나누어 먹으며 대화를 나눈다. 아이들이 캐릭터 모양의 솜사탕을 손에 들고 자유롭게 뛰어다닌다. 혼자 온 사람도, 같이 온 사람도, 자연스럽게 뒤섞인다. 웃음소리가 가볍게 떠 다닌다. 누군가가 말한다.




서울, 도심에도
이런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 여기, 내가 경험하고 있는 모든 감각들이 영화 속으로 스며드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아마도 <오, 여정 : 여름/제주>를 다시 본다면 나는 분명 이 순간의 장면을 생생하게 떠올리겠지. <오, 여정 : 봄/경주>와 <오, 여정 : 겨울/부산> 역시 그 장소에 가서 보는 것이 좋겠다. 아껴 둬야겠다.





"원래 사람 관계라는 게 유리처럼 위태로운 거잖아."
"사람을 잘 안 믿나 봐요."
"만나고 헤어지는 걸 믿는 거지. 그냥 여행이랑 똑같다고 생각해. 가려는 목적지가 다르니까, 결국 멀어지고 각자 갈 길 가는 거지 뭐.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 편하더라."
"그래도. 그래도 좋으면요. 좀 더 같이 갈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오, 여정 : 여름/제주> 中



이 시간을 같이 나누고 싶은 사람들을 떠올린다.

메시지도 보내 본다.

내년엔 꼭 같이 오자고.





영화를 보는 경험,

어디까지 가능할까?

상상력을 자극하는 축제



문득 오래전에 보았던 어느 건축가의 인터뷰가 생각났다. '어렸을 때부터 이사를 많이 다녔고 주택부터 빌라, 아파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주거공간을 경험하면서 자연스럽게 공간에 대한 감각과 상상력을 키우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인터뷰이가 누구였는지는 잊어버렸지만 '공간에 대한 상상력'이라는 키워드는 이상하리만치 마음에 남았다.



영화를 보는 공간에 대한 당신의 상상력은 어디까지인가? 네모 반듯한 멀티플렉스 상영관 또는 내 방 침대가 아닌, 다른 공간에서 영화에 푹 빠져든 경험은 얼마나 될까? 아무캠은 '영화를 좀 다르게 볼 수 없을까'라는 상상에서 출발한 유쾌한 공간 실험이라고도 할 수 있다. 플레이스 캠프 제주의 드넓은 야외 광장과 액티비티 라운지, 펜트하우스 등 곳곳이 영화관으로 변신했다. 관객들은 그 사이를 자유롭게 유영하며 다채로운 경험들을 오롯이 만끽하는 행운을 누린다.



물론 실험실이 좀 많이 멋지다.


서울에선 왠지 입기 쑥스러웠던 화려한 로브를 걸친다. 남자들은 암홀이 깊게 파인 나시를 꺼내 입는다. '왜 다들 제주에만 오면 이런 옷들을 입는 거야? 제주에도 평범하게 살아가는 생활인들이 있다고.' 농담을 들으며 낄낄 웃는다. 도렐의 시그니쳐 너티 클라우드를 마시며 오늘의 프로그램을 살펴본다. 부지런한 누군가가 아침부터 찍어 온 일출 사진을 함께 보기도 한다.




올 때마다 살까 말까 망설였던 꽃무늬 모자를 마켓에서 사서 쓰고, 핸드메이드로 두드려 만들었다는 황동 컵을 이리저리 살펴본다. 커피를 드립 해서 마시기에 좋을 것 같다. 출출한 기운을 느껴 스탭 밀에서 밥을 먹는다. 지난번에는 없었는데, 이번에는 만둣국이 같이 나왔다며 기뻐한다. 야간 오름 트레킹 '용눈이 빛나용'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액티비티 라운지 앞에 삼삼오오 모여 선다. 오름 위에서 라면을 준다고 했다며 들떠한다. 조금 피곤해지면 룸에서 깜빡 낮잠을 자기도 한다.


복합문화공간, 더불어 콘텐츠 인큐베이팅 플랫폼인 플레이스 캠프 제주의 매력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는 현장이다. 다양한 라이프스타일 콘텐츠가 영화제의 프로그램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탄탄하게 받쳐준다. 그 덕분에 이제 걸음마 단계인 아무캠의 내일에도 기대감이 생긴다.





사심가득

덕질의 향연



"그런데 이거 대체 왜 하시는 거예요?"


축제 기간 내내 어쩌면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캠은 영화를 좋아하는 개인들이 각자의 사비와 재능을 모아 사부작사부작 만드는 굉장히 사적인 축제다. 자신들을 그저 '아무개'라 칭하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영화계의 주요 인사들과 이름만 들으면 알 법한 기획자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는 게 핵심이다.


여기는 그런 이들이 영화를 매개로 평소 상상하던 것들을 마음껏 풀어놓는 덕질판인 것이다! 느슨하게 대충 만드는 것 같은데 여러 손길들이 한 톨씩 모이니 꽤나 재미있는 현장이 된다. 아무렇게나 한다면서 어떤 부분에선 어이가 없게 탄탄하고, 선수들이 모여서 얼렁뚱땅 진행하는 모습을 보면 웃음이 새어 나온다. 아무캠만의 미학이랄까.



사회자는 무려 프로 아나운서 김호수라구요.



“꼭 어디서 돈이 떨어져야만 재미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보여주기 위한 축제가 아닌 순수하게 우리들을 위한 축제.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즐기고 싶은 축제. 하고 싶었던 것들을 마음껏 해보는 축제. 영화의 맥락으로 만나고 교류하는 축제. 그런 마음으로 모두가 사비를 털어 만든 것이 아무캠이다. 그래서 그런지 각자의 사심이 잔뜩 담겼다. 너무 좋다!





올해의 대표 프로그램은 <광화문시네마 특별전>이었다. 믿고 보는 독립영화 레이블로 손꼽히는 광화문시네마의 작품 4편을 전부 몰아 보고, GV도 열자는 기획이었다. 처음에 '나 그런 거 하고 싶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될까? 싶었는데 - 광화문시네마의 감독과 배우들이 진짜로 제주도로 날아왔다. 역시 덕후는 위대해.




국내 최초 쓰레빠 GV. MC도 감독도 배우도 관객도 죄다 맨발바람!


이 분들이 이런 차림으로 이러실 분들이 아닌데... 어쨌거나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보다 더한 호사가 있을까. 맥주에 귤도 까먹고 과자도 까먹으며 느슨해진 기분으로 영화를 본다. 영화가 끝나자마자 작품을 만든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방금 전까지 바다에 가서 헤엄치다 왔단다. 얼굴이 발갛게 탔다. 술도 한 잔 걸쳤단다. 분위기 탓일까. '아, 여기서 이런 이야기 해도 되나?' 하며 재미있는 비하인드 스토리들이 툭툭 튀어나온다.




좋은 작품을 보고 나면 누군가와 그를 주제로 끝없이 대화하고 싶은 기분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 이 곳에서 보고 싶어서 참고 참았던 <소공녀> 관람 후, 전고운 감독과의 대화다. 영화 속에서 미소가 마시던 위스키를 함께 마셨다. 이렇게 좋을 수가.




나의 사심을 풀어놓은 프로그램도 있었다. '스토리콜렉터 아무개씨가 수집한 물건과 영화들'이라는 주제로 진행한 영화인문학살롱 <아무살롱>이다. 내가 그 동안 수집한 물건들을 매개로 영화 이야기를 풀었다. 그리고 그런 나의 이야기와 관객의 이야기를 물물 교환하는 이상한 마켓도 함께 열었다. 오래전 영화 <타이페이 카페 스토리>를 보면서 막연하게 생각해봤던 기획이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들이 터져나왔다. 살롱이 끝나고 우르르 무대 앞으로 몰려나와 물건들을 하나씩 헤집어보며 자신의 이야기를 더하는 사람들이 귀여웠다


예상치 못했던 연결고리도 생겨난다. 알고 보니 피나 바우쉬를 좋아했던 사람과, 내가 소장하고 있는 DVD를 함께 보기로 약속한다. 알고 보니 마가렛 킨의 스토리를 알고 있었던 사람과, 빅 아이즈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인다. 내년에는 구교환X이옥섭의 단편들을 몰아 보자며 계획한다. 역시 덕질은 함께 해야 맛이다!





3일간의 축제는 아쉽게 막을 내렸다. 나도 서울의 바쁜 일상으로 돌아왔다. 도심을 걷다가 잠깐 멈춰 하늘을 올려다 본다. 아무캠에서 바라보던 하늘이, 지나간 순간들이, 자꾸만 그립다. 내년엔 무엇을 해보면 좋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당신 또한 조금 엉뚱한 사람이라면, 아무캠을 배경으로 재미있는 상상을 하는 것을 멈출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느새 '아무캠'의 일원이 되어 있을지도. 이상하고 사랑스러운 영화제 아무캠, 안녕. 내년에 또 만나!




아무캠과 더불어 즐기는 제주 여행도 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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