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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리 Oct 01. 2019

작고 오래된 마을,
푸제르를 잊지 못하는 건

푸제르에서 만난 사람들

푸제르는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에 있는 아주 작고 오래된 마을이다. 마을 한가운데 아름다운 고성이 자리하고 있지만, 그 외에는 특별히 즐길거리도 없고 그 흔한 호텔 하나 찾아보기 힘든, 평화롭고 조용한 곳.


잘 알려지지 않은, 별로 볼 것도 할 것도 없는, 그런 곳에 가고 싶어서 선택한 여행지였다. 간혹 자동차 여행을 하는 이들이 들르긴 하지만 굳이 찾아가기에는 좀 번거로운 게 사실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찾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하지만 가끔은 '딱히 갈 이유가 없는 곳이라서' 가기도 한다. 그냥, 재미가 있을지 없을지조차 예측되지 않는 점이 좋다고 해야 할까. 번잡하거나 화려하지 않은 것들 사이에서 나에게만 의미있는 기억을 만드는 것이 좋다. 어쩌면 오래된 물건들을 좋아하는 것도 비슷한 감성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결과적으로 나에게 푸제르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는데, 그건 분명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 덕분이다.




Marie




푸제르에 가기 위해서는 기차도 여러 번 타야 하고 버스도 타야 한다. 브르타뉴로 가는 기차 밖의 녹음이 아름다웠고, 한적한 마을 역사의 풍경들이 좋았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버스는 인적이 드문 공터에 우두커니 섰다. 버스가 떠난 공터는, 기분 탓인지 무척이나 휑하고 깜깜했다.


아, 내가 생각한 건 이게 아닌데.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제공한 지도가 꽤 간단해 보여서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버스에서 내리면 마을이 있을 거라고, 마을 사람들에게 길을 물으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마을과 뚝 떨어진 듯한 공터, 쥐 죽은 듯이 고요한 공기, 그리고 나. 잊었다. 내가 길치라는 것을. 순간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런데 갑자기 작은 차 한 대가 근처에 섰다. 한 여성이 주차를 하고 내려서는 근처에 있는 건물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간절한 얼굴로 달려가 길을 물었다. 그녀는 주소를 보더니 고민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잠시 시계를 보는 듯 하더니, 우리를 차로 데려다주겠다는 말을 했다.


'여행자가 여기서 걸어서 가는 것은 무리야. 찾기가 어려울거야.'


그녀의 이름은 마리였다. 한국에 와 본 적은 없지만 언젠가 가 보고 싶다고 했다. 아까의 그 건물은 마을에 유일하게 있는 영화관이라고 한다. 마침 내일 쉬는 날이니 필요한 것이 있으면 연락해도 좋다는 말을 할 때쯤, 우리는 도착했다. 마리의 차 안에서 본 푸제르의 밤이 정말 너무도 아름다웠다. 차창 너머로 오래된 마을이 달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을 내며 스쳐 지나갔고, 그 때의 환상적인 기분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처음 보는 여행객에게 선의를 베푼 마리에게 느낀 고마움도.





Christine & Rémy



극적으로 도착한 에어비앤비는 지은지 100년도 더 된 아주 오래된 가옥이었다. 푸제르의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어 브르타뉴 지방에 한 눈에 내려다 보였고, 마당에는 작은 우물과 아름다운 꽃들이 있었다. 왜 여기서 굳이 에어비앤비였냐고 묻는다면, 에어비앤비를 통한 경험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이 작은 마을에 그 외엔 마땅한 숙소가 없었기 때문이다. 호스트는 머리가 새하얀 노부부였다. 벨을 누르자 크리스틴이 '밤 늦도록 오지 않아서 얼마나 걱정하고 있었는지 모른다'며 두 팔을 벌려 환영해 주었다.


크리스틴과 레미는 친절하고 유쾌했다. 나의 새까만 머리 색과 눈동자를 신기해했고, 아침에는 따뜻하게 구운 호밀빵에 버터와 잼, 커피를 내어 주었다. 이가 빠진 그릇에 커피를 담아 마셨고 생애 처음으로 무화과잼을 맛 보았다. 그 뒤로 종종 무화과잼을 사 먹는다. 할아버지 레미는 브르타뉴의 역사와 푸제르에 대해서 열렬하게 설명해주었고, 마을 회관에서 전통 악기 연주가 있던 날에는 나보다 더 흥분하며 동영상까지 찍어서 보여주었다. 




꼭 동화책에 나올 것만 같은 모양의 열쇠를 받아 들고, 조용한 그 마을에서 3일을 머물렀다. 사람들이 정원에 물을 주는 모습을 몇 시간이고 바라보면서. 그들이 건강했으면, 언젠가 다시 이 곳을 찾아 한번만 더 만날 수 있었으면. 하지만 그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기에 아쉽고 마음이 말랑말랑해진다.




이름 모를 사나이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타고 왔던 문제의 그 버스를 새벽 차로 다시 타고 나가야 했기 때문에, 잔뜩 긴장해서 전 날 낮에 미리 답사까지 마쳤다. 완벽했다. 뿌듯한 마음으로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했고, 짐도 싸 놓았다.


하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어두컴컴한 새벽이 되니 방향 감각을 잃고 또 다시 헤매기 시작했다.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버스 출발 시간 오 분 전이 되었고, 절망에 잠겨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길을 알아도 갈 수가 없다. 오 분 전이라니. 하루에 몇 번 오지 않는 버스다. 이 버스를 놓치면, 그 뒤로 줄줄이 기차도 비행기도 놓칠지도 모르는 상황. 왜 나는 길치인거야.


그러던 중 어디에선가 엔진 소리가 들렸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으로 차를 막아섰다. 그리고는 운전자에게 급하게 사정 설명을 하면서 애걸했다. 내 인생 가장 유창한 프랑스어였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별 말 없이 손짓으로 뒷좌석을 가리켰다. 구사일생으로 출발 직전에 버스를 탔다. 그는 나를 정류장에 내려 주고는 쿨하게 떠났다. 정신이 쏙 빠진 상태여서 그 어떤 사례도 하지 못했던 것이, 감사의 말도 제대로 전하지 못했던 것이 마음에 남았었다.


인류가 한 배에 탄 승객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 우주선을 타고 달의 뒤편까지 갈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인생의 축소판인 여행을 통해, 환대와 신뢰의 순환을 거듭하여 경험함으로써, 우리 인류가 적대와 경쟁을 통해서만 번성해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최근 김영하 작가가 <여행의 이유>에서 언급한 '환대의 순환'에 대해 읽으면서, 그 조건없는 호의들을 다시금 떠올렸다. 누군가에게 이 환대를 되돌려주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순간들이 나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특별한 것 없었던 푸제르,
나에게는 가장 특별했던 푸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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