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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리 Feb 27. 2020

안녕, 춘광사설.

오랜 시간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것에 대하여

잡지사에서 일하던 한 남자가 가파른 언덕 위에 작은 홍콩식 주점을 열었다. 그는 영화 ‘해피 투게더'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영화 속의 방과 꼭 닮은 모습의 공간을 만들고 술과 볶음밥, 홍콩식 토마토 라면, 토스트 등을 팔았다. 작은 공간이라 언제나 예약제로 운영됐고, 나는 약속을 지키러 가는 그 길을 사랑했다. 두 달에 한 번쯤은 꼭 홍콩을 가는 사람. 다녀와서 받은 영감으로 작은 변화들을 만들어냈던 사람. 어쩌면 홍콩을 가기 위해서 그 공간을 운영해 나갔던 사람. 몇 년간의 영업을 마치고 얼마 전 문을 닫기로 결정한 그 가게를, 나는 오래 잊지 못할 것 같다. 이 글은 기약 없는 휴무에 들어간 춘광사설에 대한 아쉬움이자 예찬이다. 사실은 오래 전 여행기로 쓰다가 작가의 서랍에 넣어 둔 글이었는데, 춘광사설이 문을 닫은 이 시점에 꺼내 놓게 될 줄이야.



어느 겨울, 홍콩에 갔다. 사실 목적지는 치앙마이였지만 직항이 없었고 어딘가를 경유해야 했다. 짧은 시간이나마 매력적인 곳에서 보내고 싶었다. 그 때 불현듯 홍콩이 떠올랐다. 홍콩은 이미 두 번이나 다녀온 곳이다. 그런데 왜 새삼 그곳에 또? 라고 묻는다면,



아무래도 

춘광사설 때문이다.


나는 그곳을 사랑했다. 내가 본 적도 없는 옛 홍콩 영화의 분위기를 담아낸 그 곳에서 처음 먹어 본 토마토 라면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언젠가 다시 홍콩에 가서 토마토 라면을 먹어봐야지. 그리고 가기 전에 꼭 홍콩 영화를 봐야지. 결심했었다. 그러니까 사실 홍콩에 가기로 결심한 건 토마토 라면 때문인데, 


다시 생각해 보면 결국은 사랑 때문이다. 무언가를 향한 사랑은 그 대상을 다시 보게 하는 힘이 있다. 예민한 감성의 남자가 가파른 언덕 꼭대기에서 공간을 차려 낼 정도의 사랑. 또 그런 사람이 찾아낸, 나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매력. 그래서 홍콩에 가면 꼭 토마토 라면을 먹고 싶었다. 간이 의자에 앉아 토마토 라면을 먹다 보면 꼭 옆에 제복을 입은 양조위가 털썩 앉을 것만 같은 환상은 덤이다.



결국 갔고, 먹었다.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쌓아온 애정을 신뢰한다. 관계의 밀도에 함께한 시간은 비례하지 않는다지만 절대적인 시간이 쌓여야만 가능한 감정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어떤 공간이든, 영화든, 뭐든 - '아, 이 사람 이걸 정말 오랫동안 바라봐왔구나' 라는 감정이 드는, 애정 어린 시선이 느껴지는 무언가가 나타나면 마음 한 구석이 파르르 떨려온다. 그리고 나에겐 춘광사설이 그랬다.




사장님이 홍콩에서 가져온 파인애플 모빌이 창문가에서 흔들거리는 걸 볼 때, 붉은 초 끝자락에서 특유의 향내가 풍겨올 때, 그걸 바라보며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좋아하던 공간이 사라진다는 건, 마음 한 구석을 허전하게 만든다. 




안녕, 춘광사설.

오늘은 좋아하는 반찬을 미루어 두듯

아껴두고 또 아껴두었던 해피 투게더를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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