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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리 Jul 29. 2020

나는 독립예술기획자다.

독립예술기획자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올해의 사건들

문화예술분야에서 기획자로 살아가겠다고 마음 먹은지 어느덧 10년이 흘렀다. 카운트 해보고 새삼 충격! 예술경영을 전공했지만 다양한 현장에서 나의 일을 하나의 맥락으로 잇는 과정은 어렵기만 했다. 모호한 정체성과 분명하지 않은 역할은 내 컴플렉스였다. 그러다 최근에 깨달았다. 나의 역할과 정체성은 스스로 정하고 선언하기에 달렸다는 것을.


나는 독립예술기획자다.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고 다양한 언어로 나의 일을 읽어낼 수 있지만, 내가 하는 모든 일은 내가 해석한 예술의 맥락 안에서 벌어지고 있기에 나의 본캐는 ─ 독립예술기획자다. 이 글에서는 올해 독립예술기획자로서의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미친 몇가지 사건들에 대해서 회고해 보려고 한다.




예술경영 졸업논문 제출 (1월)

나의 지난 경험과 스토리의 재해석



나를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은 만날 때마다 '아직도?'라며 놀라던 애증의 논문. 논문을 8년 만에! 드디어 제출했고 졸업했다. 내 논문의 제목은 <밀레니얼 예술경영자의 무경계 실천 사례 연구>다. 8년 동안 예술경영 커리어를 만들어 온 과정을 크게 세 가지 형태로 분류하고, 각각의 경험이 서로 융합하게 되는 과정을 '밀레니얼 세대'라는 세대적 특성과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에서 새롭게 등장한 '무경계'성에 기반하여 해석하고자 했다.


나는 예술 콘텐츠 창작,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도시문화기획, 창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일했다. 그 과정에서 겪은 정체성 혼란과 통합에 대한 기록을 논문에 담았고 나의 커리어 스토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객관화하면서 스스로의 의미와 역할을 점검할 수 있었다. 나 자신의 언어로 스스로를 정의하고 표현하게 되었다. 또한 내가 겪어온 커리어 현상이 나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닌 시대적 흐름이라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예술기획자'로서의 정체성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첫 단추가 되었던 것 같다. 정말 힘들게 썼는데 애정을 다해 지도해 주신 전수환 교수님께 너무 너무 감사하다. 논문이 나오고 난 후, 논문에 영감을 제공한 사람들에게 릴레이로 논문을 증정하러 다니기도 했는데 그 과정도 일종의 선언같았다. 논문을 제출하고 나서는 너무 오랜 시간 매달려서 그런지 허무함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제 제출해야 할 논문은 없지만, 내겐 삶에서 이어갈 '다음의 주제'가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예술경영 북클럽 (2월)

이야기의 공유와 연결



가장 먼저 했던 일은 논문을 매개로 독립예술기획자로서의 '나'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꺼내고 공유하는 일이었다. 나를 드러내는 일이 낯설고 어색하지만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독립예술기획자들의 이야기가 더 많이 공유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나에게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할 커뮤니티가 필요했다.



그래서 기록상점에서 예술경영 북클럽을 진행했다. 놀랍게도 이를 계기로 오래 전 프린지에서 자원활동가로 만났던 친구, 한 번도 교류한 적 없었던 문화기획자, 매개자의 씨앗을 품고 있는 창조적인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었다. 계속해서 이런 자리를 가지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후로 실천은 못했다. 이 글을 쓴 김에 조만간 고민해 봐야겠다.)

 



예술인 패스 발급 (2월)

공식적인 기관의 인정



예술인패스를 받았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서 발급하는 예술인패스는 예술을 '업'으로 하여 예술활동을 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예술활동증명 절차를 거치면 수령이 가능하며, 이를 통해 다양한 혜택을 제공 받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복지 혜택보다도 정체성 인정에 대한 욕구로 신청했던 것 같다. 약 4주간의 증명 절차를 거친 후 예술인패스를 받고 나니 '아, 나 예술인 맞구나'하는 마음이 느껴지는 것이 묘했다. 그도 그럴 것이 특정한 조직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기획자의 특성상 스스로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내 자신의 인정도 중요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타인의 인정도 필요한 법이다.




연극작품 <액트리스 투: 악역전문로봇> 프로듀싱 (2~7월)

프로듀서로서의 역할 탐구




작년 함께한 <액트리스 원: 국민로봇배우 1호>에 이어 올해에도 같은 멤버들과 함께 <액트리스 투: 악역전문로봇>을 기획하고 제작했다. 작년에 이어 함께 작업하는 것이 정말 좋았다. 작년보다 창작현장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고, 협업 과정에서는 더 적극적으로 나의 역할을 발견하려고 애썼다. 연극의 영역에서 나의 역할을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다. 나는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가. 어떤 동료가 될 것인가. 이 작업이 나에게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올해는 텀블벅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서울문화재단 생활문화활동가가 되다. (4월~)

새로운 가능성의 확장



올해 나에게 일어난 가장 즐거운 전환점을 꼽자면, 서울문화재단의 생활문화활동가로 성동구에서 활동하게 된 일이다. 꼭 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논문을 쓰면서 '생활예술' 영역을 오래 탐구하기도 했고, 이론이 아닌 현장에서 사례를 만드는 일을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 사업에서는 나를 '전문가'로 호명해 주었고, 나의 지난 모든 작업들을 존중해 주었다. 그것이 갖는 의미가 크다. 이전에 사례가 없는 영역에서 새롭게 일을 만들어가는 감각도 어렵지만 재미있다.


그래서 요즘은 성동구 곳곳을 누비며 동네의 문화를 재발견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한다.



오늘 지난 3개월간 구상한 프로젝트의 첫 시작이 있는 날이었다. 오랫동안 머릿속에 그리던 장면이 펼쳐지는 순간이 정말 좋았다. 앞으로 만나게 될 사람들과 현장들도, 올해 말에는 회고하게 될 내용들도 벌써 궁금하다.



애정 가득한 첫 프로젝트, 동네피크닉클럽





꼬불꼬불 레지던시의 시작 (5월)

함께 성장할 수 있는 동료 만들기



나는 지난 경험에서 무엇보다 동료가 중요함을 배웠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이들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 있다. 그래서 작년 첫 인연을 맺었던 라이프 컬러리스트 유보라와 프리블릭 아티스트 장비치에게 손을 내밀었고, 우리는 새로운 연대를 실험하고 있다.


꼬불꼬불 레지던시는 실체가 없는 아티스트 레지던시로, 정해진 공간이 아닌 여러 공간을 넘어다니며 작업하는 그룹입니다. 방황하는 꼬불이 김해리, 마음이 매일 바뀌는 꼬불이 유보라, 헷갈리는 꼬불이 장비치를 중심으로 다양한 창작자들이 협업하고 있습니다. 꼬불꼬불 레지던시는 사소한 일상과 스스로를 바라보는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며, 서툴고 느리고 꼬불꼬불한 것들을 사랑합니다.


문화예술의 경계에서 혼란을 느끼고 있는 이들이 문화적 리더로 스스로를 재인식하는 계기, 서로가 서로의 역할을 발견해주고 성장을 돕는 관계, 그런 주제로 우리의 관계를 연구하는 중이다. (ㅋㅋ) 이 작업 또한 나에겐 예술기획의 일부다. 올해 말 즈음에는 이 실험의 과정과 결과를 공유하는 자리를 갖고 싶다.


요즘 우리 아지트, 카모플라쥬 :)




동양가배관 브랜딩

예술을 통해 브랜드의 문화를 만드는 일



스페셜티 커피 브랜드 동양가배관을 함께 만드는 과정에서도 나의 정체성을 조금 더 또렷하게 할 수 있었다. 동양가배관의 고유한 정체성을 구축하고, 다양한 분야의 창작자들과 함께 이를 콘텐츠로 풀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우리 곁의 재료로 스페인 창작 요리를 하는 마하키친과 함께 하는 동양가배관 제철간식 프로젝트, 재즈 뮤지션 Treble&Bass와 함께 커피와 재즈를 페어링하는 Jazz from Coffee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전통공예가와 함께 하는 프로젝트들도 추진 중이다.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전통예술 콘텐츠와 공예를 좋아해왔는데 이렇게 연결될 줄 몰랐다. 마음껏 자아실현 중이다. 언젠가는 이 콘텐츠들을 들고 해외로도 나가고 싶다.







스토리 디렉팅 그룹 필로스토리

예술적 개입의 실현



두 명이 공동 창업해 운영하고 있는 필로스토리. 우리는 예술의 영역인 '스토리'의 본질을 탐구하고 우리만의 프로세스와 툴을 개발해 비즈니스상의 문제를 해결한다. 이 활동에서 내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예술적 에너지로 비즈니스 조직에 변화를 일으키는 일이다. 필로스토리에서 나는 기업과 예술 양쪽을 이해하는 연결하는 매개자로서 일하고 있다. 주로 스토리 기반의 브랜딩 전략 기획, 브랜드 스토리 기획, 스토리텔링 콘텐츠 개발, 아트 콜라보레이션 등의 일을 다룬다. 예술기획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지만, 비즈니스의 감각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에 내게는 아주 중요한 영역의 일이기도 하다.


재미있고 특이한 점은, 필로스토리는 B2B와 B2C 영역을 모두 다룬다는 점인데 이건 공동창업자인 자영언니와 내가 둘 다 크리에이터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어서이기도 하다. B2C 영역에서 우리는 누구나 스토리텔러가 되어 창조적 삶을 만들어나갈 수 있도록 돕는 경험을 설계한다. 스토리텔러들의 창작·교류 플랫폼 기록상점을 기반으로 꾸준히 '자기다움'을 발견하고, 표현할 수 있는 프로젝트들을 전개하고 있다.






문화예술기획 입문 <수림기지> 강연 (7월)

예술기획자로서의 첫 강연




이 글을 쓰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이기도 하다. 문화기획자 서상혁님의 초청으로 짧게나마 나의 이야기를 공유하게 되었다. 요즘 이런 저런 자리에서 내 이야기를 할 기회들이 많아졌는데, 이날은 좀 다른 느낌이었다. 말을 하던 중에 울컥하는 기분을 느꼈다. 그곳에 오신 분들이 10년 전의 내 모습과 꼭 닮아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간절한 마음과 불안감, 설렘이 뒤섞인 그 시절의 그 기분. 그러고 보니 어느새 10년이나 흘렀구나. 그 시간에서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기도 했다. 나는 어떤 선배가 될 수 있을까. 무엇을 나눌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날.




올해 남은 시간 속에서도 예술기획자로서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쌓아가고 다양한 역할과 가능성을 고민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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