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나의운명사용설명서
사람은 오직 자신만을 구할 수 있을 뿐이다. 너무 협소하다고?그렇지않다! 어떤 개인도 홀로 존재할 수 없다. 그의 존재성 자체가 사회적, 우주적 인연의 산물이다.
(고미숙, 나의운명사용설명서, p.55)
남편은 등산을 좋아한다. 주말 아침잠을 반납하고 동료들과 새로운 산에 오르고, 그날 나무들이 얼마나 싱그러웠는지, 단풍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정상에서의 풍경이 얼마나 장관이었는지 하는 얘기들을 사진과 함께 얘기해준다.
가끔 나에게도 같이가자며 등산을 제안하는데, 나는 등산이 싫다. 아니 뭐 싫은것까지는 아니고 좀 지루하다. 뭐가 좋은지 잘모르겠다. 초봄의 연연두색(그냥 연두보다 더 연두) 새순의 싱그러움과 가을의 붉고 노란 정취를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왜 굳이 산에 올라 보아야하는지를 모르겠다.
아니 오히려 출근길 아파트 화단에 삐죽 솟아난 초록이들이 마음을 건들때는 있어도, 작정하고 떠난 꽃놀이에서는 어떤 감동도 느껴본적이 없는것이다.
그런 연유로 등산 제안을 거절하고 나면, 남편은 내가 귀찮거나, 힘들어서 그렇다고 확신하는 투로
- 쉬운 코스로 가면 안힘들어. 같이가자.
하고 한번더 묻는다.
그가 그토록 애정하는 산이 누군가에게 지루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에게 너무도 좋은 산이기에, 그토록 아름답고 신선한 활력을 주는 것이기에 권하고 싶고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야 백번도 이해한다.
그치만 종로에서 불신지옥을 외치는 그들의 심정도 다르지 않을것이다. 이 좋은걸 왜 안믿지?너무 안타깝다. 이런 마음들.
곱창을 먹지 않는다고 말하면, 모두가 탄식하며
- 아, 너무 안타깝다. 너무 맛있는데!
하는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그나마 산과, 종교와, 곱창은 각자에게는 너무나 기꺼운 대상이라 다행인데, 그렇지 않은 권유도 있다.
- 얼른 결혼해서 가정꾸려야지.
- 어휴, 애 하나는 외로워서 안돼. 엄마는 딸이 있어야지.
이런 말들은 스스로에게도 진정 확신을 가진 문장인가하면, 그렇지가 않다.
결혼생활이 너무나 행복하고 좋아서, 자식이 많은 것이 너무나 기뻐서 그것을 남에게도 제안한다고 하기에는 화자의 얼굴에 생기가 없다. 사춘기에 접어든 딸(년) 때문에 돌아버리겠다고 말한지 30분이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남편을 북한산입구에 내려주며 말한다.
- 각자 하고싶은 걸 하고살자. 그러다 어느날 우연히 그게 겹치는 날 반갑게 만나자.
우리는 오직 자신만을 구할 수 있을 뿐인데, 구하는 방법조차도 오직 자신만이 알고있다. 그러니 우리는 각자 스스로를 구하며 살다가, 아주 우연히 약속도 없이,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마주쳐 깜짝 놀란 얼굴과 깊은 반가움으로 함께 차한잔 마시자.
그게 진짜로 반가운 거라고.
그게 우주적 인연인 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