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텐데
인간이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건 너무 고독한 일이 아니겠느냐는 큐레이터의 말에 실비아는 대답했다. " 고독하다는 건 착각입니다. 우리가 없는 세상에서, 사라진 세상에서 고독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건 살아 있는 동안에도 마찬가지라고 하나는 생각했다. 인간이 모두 사라질 세상에서 고독할 수는 없다고, 하나는 생각했다.
(공현진,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텐데, p.270)
누구 좋으라고 명절이 있을까 싶었다. 명절이라서 너무 좋다는 사람을 나는 본적이 없다. 대신 그 존치에 의문을 품는 자들은 아주 많이 봤다.
꼭 며느리들만 괴로운 것은 아니었다. 아들들은 부모와 부인 사이에서 괴로워했고, 결혼안한 자식들은 그나름으로 편치 않았으며, 이제 자식들을 맞이하는 입장이 된 사람들도 자식을 보는 반가움이 일상의 리듬이 깨지는 불편을 겨우겨우 누르는 수준이었다.
이럴거면, 그냥 다같이 출근이나하지. 이런게 다 무슨 소용이야. 어차피 다 괴로울 거면.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한편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불효자들과, 이제는 자식도 귀찮은 부모들을 위한 면죄부는 아닌가. 일년에 단 두번만 날을 정하여, 이 날만 만나면 다른 날은 해방이다,하고 나라에서 정해준 건 아닐까. 그리하여 명절이 정해져있지 않았던들 매주말, 매휴일이 모두 압박이었을 것을, 이 면죄부로 하여금 모두를 반기에 한 번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자유를 부여한 건 아니겠는가.
못된 시누이가 있다든가, 아무도 즐기지 않는 음식을 하염없이 만들어낸다든가 하는 표면적인 고뇌 안쪽에는 근원적인 질문이 있다.
부모자식형제자매삼촌사촌사돈의팔촌.
그들은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우리는 정말 서로에게 애틋하고 대체불가능하며, 서로의 부재가 우리를 심연의 고독으로 이끄는(혹은 그럴것으로 추정되는) 사이인가.
우리는 한때, 열렬히 사랑했으나, 지금은 어떤가. 헤어진 옛 애인을 다시 마주한 것과 같이 다소 어색하며, 때로 감상에 젖고, 알수없는 부채감으로 마무리되는 감정은 아닌가.
[사랑했었다]
지나간 사랑은 죄가 아닌데도, 우리는 죄책감을 숨겨가며 기어이 현재형인 척 안간힘을 쓰다가 1박2일도 힘겨워지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수있다.
나는 진행형이라고.
그렇다면 더더욱 반문해볼일이다.
어찌하여 그 사랑은 특정한 날에만,
번번이 남의 손을 빌어 표현되는건지.
누구누구네 집은 재산을 미리 나눠주었더니 결국 요양원 신세라며, 죽을때까지 아주 끝까지 통장은 들고 있어야한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
그 얘기들은 마치 괴담처럼 구전으로 떠돌며, 노인은 노인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나라면>을 떠올리게한다.
사랑이 과거형일진데, 병든 나를 돌보는 것이 가족이든 아니든 뭐가 다른걸까.
모든것은 어차피 지나간다. 어차피의 세상에서 영원한 사랑을 말하는건 좀 징그럽다. 모진년, 쌉티, 너어는 어릴때부터 애가 좀 차가웠어, 기타 등등을 감수하고 진실을 외쳐본다.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텐데! 어차피 50년 안에 우리는 모두 헤어질텐데! 어차피 그럴건데 고독해질 수가 없어 우리는. 누구도 남지 않은 세상에 어떻게 고독이 남을 수 있겠어. 누구도 남지 않을 세상에 무엇이 우리를 외롭게 할 수 있겠어. 멸종위기종에게 고독사 따위는 없어! 없다구!
그러니 고독하다는 착각은 접어두고, 지나간 사랑도 놓아주자. 조상님들 동그랑땡 좋아한다는 착각은 접어두고, 집나간 며느리도 놓아주자.
이번 추석에는 소주에 전어회 먹는거다. 멸망전에 꼭 만나야하는 사람들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