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이 있다.
비행기표와 숙박비가 저렴할수록 고생길이 훤히 보이지만 가난한 여행자에게는 선택권이 별로 없다. 저가항공의 편도 5만 원짜리 홍콩행 비행기 티켓은 출발일 3주 전에도 남아 있었다. 냉큼 결제버튼을 누르고서야 세부내용을 확인했다.
밤 9시 30분에 출발하고 12시 반에 도착하는 스케줄이었다. 다행히 홍콩 공항은 심야버스가 운행되고 있어서 시내에 있는 호텔로 쉽게 찾아갈 수 있고 택시비도 별로 비싸지 않았다. 잠시 고민했다가 유일한 동행인이자 짐꾼인 남편에게 소리쳤다.
"우리 공항에서 노숙하자!"
이번 홍콩 여행의 1일 숙박비 예산은 8만 원이었다. 루앙프라방이나 티오만 섬에서는 이 정도 예산이면 꽤 괜찮은 호텔에 묵을 수 있었고 싱가포르나 호찌민, 오사카 등 도시에서도 깔끔한 호스텔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홍콩은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그렇다고 8일 동안 그나마 괜찮다고 여겨지는 저렴한 호텔에 계속 묵고 싶지는 않았다. 그동안 다양한 숙소를 경험해보고 서로 비교해보는 재미도 꽤 쏠쏠했기 때문에 한 숙소에는 2박 3일씩만 머물기로 했다.
우리는 첫날밤 12시 반에 공항에 도착해서 어찌어찌하다 새벽 2시를 넘겨 호텔에 들어가서 늦잠을 잔 후 일정을 시작하기 위해 8만 원을 쓰는 것은 조금 아깝다고 생각했다. 옥토퍼스카드 판매가 시작되는 시간은 아침 5시 반, 유심칩을 파는 곳의 오픈 시간이 7시니까 다섯 시간 정도만 의자에서 버틸 수 있으면 하루 숙박비를 아낄 수 있다.
나는 난생처음으로 비행기의 연착을 바라게 되었고 (어차피 빨리 도착해도 할 게 없기 때문에) 실제로 비행기는 두 시간 정도 늦게 홍콩 첵랍콕 공항에 도착했다.
그 스케줄의 비행기에는 한국인 관광객이 거의 없었다. 중국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들은 어마어마한 양의 쇼핑백과 박스를 들고 와서 승무원을 난감하게 만들었다. 짐을 부치면 돈을 내야 하기 때문에 아마도 어떻게든 객석에 들고 타려고 우기는 것 같았다. 이들의 짐을 처리기 위해 한 시간이 지나서야 이륙 준비가 끝났고 지각한 비행기는 이륙 순서가 뒤로 밀려 한참 동안 활주로에서 대기했다.
새벽 두 시. 나는 바삐 출입국 심사대로 향하는 무리에서 빠져나와 잠잘 곳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심사대를 지나고 나면 뻥 뚫린 공간밖에 없기 때문에 의자가 많은 게이트 주변이 훨씬 아늑해 보였다.
하지만 조용했던 공간은 갑자기 엄청난 소음과 먼지에 뒤덮였고 평화롭게 잠들었던 나 같은 노숙객들은 화들짝 깰 수밖에 없었다. 새벽시간에 진행되는 면세점 내부 공사로 인해 더 이상 귀를 막고 못 들은 채 견디기 어려웠다.
결국 졸고 있는 출입국 심사원을 깨워서 도장을 받고 넓고 황량한 공간으로 나왔다.
대부분의 의자는 일찍 온 사람들과 짐으로 가득했고 24시간 운영하는 맥도널드 주위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우리는 아직 기다란 의자가 비어있는 화단에 잠시 누워있기로 했다.
가지고 온 옷을 깔고 담요를 덮고 눈을 감았다. 피곤이 눈을 짓눌렀지만 쉽게 잠들 수 없었다. 높은 천장에서 핑핑 도는 대형 팬의 소음, 휴대폰 게임 소리, 화단에서 짤깍짤깍 식물을 다듬는 규칙적인 마찰음까지 귓속에서 맴돌았다.
깜빡 잠이 들었다가 깨니 다섯 시가 넘었다. 퉁퉁부은 눈으로 주위를 바라보는데 갑자기 차가워진 공기 탓인지 하나둘 깨어나고 있었다. 이상한 인연으로 같이 하룻밤을 보낸 사람들의 얼굴은 태연했다. 부스스한 얼굴을 대충 비비고 우리는 점점 밝아지는 바깥 풍경을 멍하게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