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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Aug 26. 2016

딴 짓은 항상 중요하다.

영감님 어디 계세요?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영감님(Inspiration)이 오시길 간절히 기다렸다. 에너지가 충전되고 몸과 마음이 회복이 되면 아이디어가 퐁퐁 솟아올라 말라 있는 머리를 촉촉이 적실 줄 알았는데 사실 점점 멍 때리는 시간만 길어졌다. 그러다가 한 두 가지 사건이 터지면 손수무책으로 매몰되어 다시 멍한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푹 쉬어야 한다. 


우리가 학교와 회사에서 주로 하는 일의 종류는 이미 답이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어디까지 개념을 이해해서 과제는 어느 정도 수준으로 해야 하는지 명확하고 그 결과는 구체적인 숫자로 알 수 있다. 회사에서의 일도 개인적인 목표와 조직의 목표를 얼마나 일치시켜 성취하는지의 여부가 평가 척도이기 때문에 내가 겪은 대부분의 업무는 데드라인 안에서 열심히 눈치를 보며 적당히 일을 마치는 게 우선이었다. 하지만 내가 스스로 주제를 정하고 그 누구의 간섭이나 강요 없이 다양한 것을 실험하고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굉장히 낯설다. 내가 주로 사용하는 매체가 시각적이라는 특성만 제외하면 모든 창조적 행위는 같은 선 상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나는 더 열심히 영감님이 날 발견할 수 있도록 감각의 세계에 닿을 수 있는 매개체를 찾게 되었다. 


나를 따뜻하게 해주는 활동 


우리가 목욕탕의 온탕에 들어갔을 때는 물의 온도가 체온과 그다지 이질적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서서히 따뜻한 기운이 온몸에 돌면 물이 내 일부가 되면서 나의 영역이 점차 넓어지는 상상을 한다. 이렇게 내가 따뜻하다고 분류하는 매개체들은 나의 체온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든다. 즉 현재의 감정을 확장시킬 수 있고 내 안에 숨겨진 것들을 들춰볼 수 있는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1. 눈을 뜬 후 30분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바쁘게 지냈을 때 과연 행복했나?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하면 하루를 치열하게 마무리했다는 안도감 이외에 노곤해진 몸과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함이 떠오른다. 나에게 조금의 여유도 주지 않고 몸과 마음을 놀지 않게 하는 게 현대 사회인의 이상적인 상태라고 한다면 외면적 성취 말고는 얻을 수 있는 게 없다. 하지만 이 외면적 성취 역시 온전히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요즘 나에게 큰 동기부여가 되고 있는 것은 아침마다 작은 노트에 쓰고 있는 모닝 페이퍼다. 줄리아 카메론의 '아티스트 웨이'에서 내 안의 창조성을 발견할 수 있는 첫 번째 단계로 제안하고 있다. 최근 EBS에서 방송된 '영감의 순간'에서도 아침에 눈 뜬 후 보내는 단 몇십 분의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https://youtu.be/6h8wz-jP0-Y)


모닝페이지 노트와 아티스트웨이 책

온전한 아침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일찍 자야 한다. 물론 잠들지 않는 도시인 서울에서 일찍 잠들기란 매우 어렵다. 하지만 일단 눈을 뜬 후 식탁 앞에 30분 정도만 앉아 있으면 거의 성공이다. 나는 주로 방금 전까지 치열하게 꾸었던 꿈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저 의식의 흐름을 따라 말도 안 되는 단어의 조합들을 써 내려간다. 누군가에게 원망의 편지를 쓰기도 하고 나 자신을 자책하는 목소리를 따라가기도 한다. 생각이 멈추고 정신이 들기 시작하면 그냥 노트를 덮는다. 커피를 내리고 음악을 듣고 하루를 시작한다. 모닝 페이지는 누군가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되고 내가 들춰보지 않아도 되는 낙서장이다.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무엇을 써야 할지 난감하고 때로 펑펑 울고 싶기도 하지만 아침 커피처럼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면 모닝 페이지를 쓰기 위해 빨리 자려고 노력하게 된다. 하지만 내가 자연 한가운데에 산다면, 아침마다 공사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지 않는다면, 그저 뜨는 해를 바라보며 명상을 하고 싶다. 내 주변을 조용히 감돌며 변해가는 자연을 지켜보는 것만큼 생생한 감동이 어디 있을까. 


2. 만지고 맡기 


오감을 직접 사용하면 표현하기 어려운 세밀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처음에는 낯설고 익숙해지면 가만히 있고 싶고 풍부해지면 새로운 생각이 톡톡 터져 나온다. 우리는 보는 것과 듣는 것은 많이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다른 감각을 조금 더 신경 써서 건드리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많이 느껴보고 싶은 마음

나는 다양한 자연물을 만지는 것으로 시작해 점토로 구현해보는 방법을 즐긴다. 놀이터의 모래의 까슬함과 바다 습기를 머금은 현무암의 까칠함은 분명 다르다. 아이들의 발이 많이 닿는 푸슬푸슬한 모래와 한층 깊이 숨어있는 진흙의 축축함은 도시의 이면과 닮았다. 제주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무암은 물을 머금지 않아도 공기 속의 수분을 빨아들인 듯 항상 묵직하다. 점토도 종류가 매우 다양해서 마트에서 점토로도 쉽게 경험해볼 수 있다. 나는 처음 점토를 만지기 시작했을 때 어렸을 때 놀았던 놀이터를 만들었다. 나는 성격이 활발하지 못해서 쉽게 친구를 사귈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가 많은 놀이터를 항상 그리워했다. 즐거운 놀거리가 가득한 놀이터에서도 해가 지면 멀리서 밥 먹으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릴 것 같은 정겨운 풍경이 연상되면서 떠오르는 갖가지 공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코는 미각과도 연결되어 있는 매우 민감한 부분이다. 음식을 입에 가득 넣고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뱉는 것만으로도 재료의 향을 풍부하게 느낄 수 있다. 또 천연 에센셜 오일의 매력을 알게 되면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오일을 기분에 따라 조금씩 사용하고 있다. 우리가 음악을 들으면 어떤 특정한 장소의 기억이 연상되는 것처럼 후각도 조금만 신경 쓰면 다양한 추억과 연결할 수 있다. 그때마다 놓치지 않고 작은 노트에 필기를 해둔다. 다양한 오일 향을 느끼면서 비누를 만드는 것도 즐겁다. 레드팜오일, 코코넛오일, 아보카도오일, 참깨오일 등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올리브오일 이외에도 식용 오일을 혼합해 서서히 저어가며 굳어가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작은 비누 하나에서 느껴지는 에너지를 경험해 볼 수 있다. 


나의 첫 비누


3. 낙서 


낙서는 의식의 흐름을 기록하는 글쓰기의 방법 중 한 가지이다. 우리는 재미없는 강의를 들을 때나 회의 시간을 빨리 보내고 싶을 때 무의식적으로 낙서를 한다. 하지만 이 낙서를 의식적으로 무의식을 자극할 수 있는 놀이로 생각한다면? 어떻게 놀아야 더 재밌게 놀 수 있는지 고민하게 된다. 굵은 펜을 사용할까 부드러운 회색 붓펜을 사용해볼까, 종이는 크라프트지가 어떨까 아니면 막 굴러다니는 신문지는? 놀이도구를 선택한 후에는 방법을 선택하면 된다. 내가 좋아하는 단어를 서로 연결해봐도 좋고 이미지가 있다면 변형해보거나 떠오르는 단어들로 마인드맵을 그려보는 것도 괜찮다. 그리고 내가 의미 있는 결과를 얻고자 할 때는 이 놀이를 최대한 '많이' 하면 된다. 반복해서 하되 계속 조금씩 규칙을 바꿔가면서 데이터를 쌓아가다 보면 지금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작은 고민의 실마리를 찾을지도 모른다.

 

공연을 보고 난 후


나를 이성적으로 깨워주는 공부


목욕탕에서 냉탕에 들어가면 곧 나가야 할 시간이 다가옴이 느껴진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멋진 잡지와 작가의 작품을 많이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인생은 잡지 속 사진처럼 정지해 있지 않고 온갖 굴곡을 넘어 흘러간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 공부는 인생과 예술이 닿아있는 지점에 직접 다가볼 수 있는 좋은 다리가 되어 준다. 



철학 공부

 

철학을 철학이라고 부르는 순간 거리감이 생긴다. 그냥 옛날 사람들이 어떻게 고민하고 살았는지 써놓은 생활수필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철학 스터디를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단지 스터디를 위해 책을 읽는 게 아니라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이것저것 찾아보게 되지 않았나 싶다. 철학자의 호흡을 함께 따라가다 보면 당연하게도 내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어떤 철학자의 삶의 양식에 동의하고 내 삶에 반영하기를 원한다면 일상적인 선택에 영향을 받고 말을 할 때 더 조심스러워진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에리히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읽었을 때 안식일(Shabbat)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지점이 떠오른다. 굳이 기독교의 관점에서 얘기하지 않아도 안식일의 개념은 모든 소유 양식을 버리고 신에게 감사하며 온전히 즐길 수 있는 날을 의미하는데 프롬은 현대의 일요일이 소비하는 날이며 진정한 나와 멀어지기만 한다고 이야기했다. 사실 요즘에는 돈을 벌기 위해 내 모든 것을 쏟기만 하기 때문에 주말에 소비하지 않으면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지 허탈함을 느끼기 쉽다. 그래서 진정한 안식일을 실천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나의 능력과 존재가 쇼핑 목록으로 증명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물건들을 하나 둘 정리하기 시작했다. 굳이 요즘 유행하는 미니멀리즘이 아니더라도 나를 가볍게 만들고 필요 없는 씀씀이를 줄일 필요가 있었다. 


이 지점에서 내가 최근에 일했던 브랜드 상품 기획분야가 왜 계속 회의감이 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회사에서 원하는 상품은 당연히 '잘 팔리는' 상품이다. 처음부터 브랜드 가치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만든 회사가 아니어서야 기존의 큰 기업에서 새로운 수익창출원으로서 브랜드 관리 부서가 생기면 일단 잘 팔리는 상품을 만들어야 부서가 존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저렴하고 작은 상품도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서 상품의 의미나 가치를 드러내기보다는 외관의 포장에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바로 버려질 수밖에 없고 그렇다고 재생용품으로 새로운 포장법을 시도해볼 여유도 없이 나는 계속 쓰레기를 만들었다. 그래서 그 회사를 그만두며 앞으론 내가 어떤 분야에서 일하더라도 적어도 그런 부분을 고민해 볼 수 있는 위치에서 목소리를 내겠다고 결심했다. 


원래 철학이야기로 되돌아오면 영화 '다가오는 것들(Things to come)'이 생각난다. 그녀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여자로 보이지만 출판사와 학생과 남편과 자식들에게 거부당하는 경험을 한다. 그런 불쌍한 그녀를 붙잡는 건 오직 머릿속의 지식인 철학이었다. 그녀에게 철학자와 그들이 쓴 책이 없었다면 그대로 무너져버렸겠지만 그녀는 비록 홀로 울더라도 평생의 공부를 지팡이 삼아 일상을 견뎌나갔다. 세상을 바꾸고 싶은 대단한 포부를 가진 것도 아니고 오직 자신의 학생들에게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알게 해주고 싶다는 그녀의 작은 목소리가 꼿꼿하게 느껴졌다. 

모든 것이 떠났을 때 또 어떤 것이 나에게 다가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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