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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Oct 26. 2016

여행스케치 (奈良의 사슴)

사슴은 무섭다.

여행은 그림의 좋은 동기부여이자 소재가 된다. 


오사카, 교토, 가나자와를 여행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소는 나라(奈良)였다. 현란한 간판의 쇼핑몰의 오사카, 시대의 흐름을 잘 맞춰가는 교토, 정돈된 소도시 가나자와 모두 나름의 정취를 느끼게 했지만 몇 시간만 머물 줄 알았던 나라(奈良)에서 큰 점을 찍은 하루를 보냈다. 동물을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키워본 적도 없는 나에게 전철역 입구부터 기분 좋게 누워있는 사슴을 보는 건 꽤 충격적이었다. 아이들과 관광객들은 사슴이 조금만 다가와도 꺅꺅 소리를 지르며 반응했고 사슴은 그들이 귀찮은 듯 센베가 있는지 냄새로 확인한 후 가열차게 돌아섰다. 


서너 시간 주요 관광지를 돌고 나니 옆을 무심히 지나가는 사슴들이 익숙해졌다. 다리가 아파올 때쯤 센베를 사들고 공원 벤치에 앉아 아기 사슴들과 꽁냥꽁냥 놀고 있는데 갑자기 사슴들이 슬슬 뒷걸음질 치며 도망쳤다. 잘려나간 뿔의 흔적을 당당히 내보이며 험악한 표정의 사슴이 우리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충혈된 눈을 보자 나도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성난 사슴은 자신을 피하는 내가 서운했는지 그대로 내 옆구리로 돌진했다.


뻐근한 통증보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어렸을 때 좋아했던 '아기 사슴 밤비'에게 배반당한 슬픔이 가슴 깊이 밀려왔다. 깊은 눈망울과 예쁘게 뻗은 다리, 반쯤 다소곳이 접힌 귀는 그대로였지만 거친 털과 센베를 향한 강한 집착, 무자비한 돌진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동물의 본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나의 편협한 고정관념이 무너지는 순간 나는 사슴의 얼굴을 하고 다가왔던 많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나를 가만히 응시했던 사슴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정이현의 소설 '상냥한 폭력의 시대'를 읽었다. 이번 책은 특히 제목에서 느껴지는 서늘함이 마음에 들었다. 에스프레소를 단숨에 들이켠 듯 소설은 흡입력이 강했지만 씁쓸했다. 정이현 작가는 '결정의 순간에 아무런 결단도 내리지 못하는 방식으로 결정해버리고, 전 생애에 걸쳐 그 결정을 지키며 사는 일이 자초한 삶의 방식"(p.139)을 고수하며 관성의 법칙으로 살아가는 기성세대를 세심하게 그려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사슴의 눈과 거친 털과 폭력성에 대해 생각했다.


여행 스케치 (교토, 나라)


여행 스케치 (교토, 나라)


사슴1 - 상냥한 폭력


나에게 사슴은 경험하지 못한 순수함이었다. 

천적이 없는 곳에 사는 사슴은 포악했고 거침이 없었다.

사슴의 겸손함은 오직 더 강한 존재에만 반응했다. 

상냥함을 가장한 폭력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나는 사슴에 연대감을 느껴야 할지 적대감을 품어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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