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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Nov 07. 2016

누드크로키를 추천하는 이유

재미있다.

1년 전만 해도 나에게 누군가 '누드 크로키'에 대한 느낌을 묻는다면 대뜸 거부감이 든다고 대답하지 않았을까 싶다. 갑자기 누군가 나에게 누드를 그리라고 했다면 가벼운 운동복을 입고 조깅하고 있는 사람에게 당장 에베레스트를 오르라고 하는 것처럼 황당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정체된 사물에서 자연으로, 결국 사람으로 옮겨진 내면의 시선은 계속 나에게 아름다운 인체를 그려보라고 부추겼다.  


많은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추천하기 어렵지만 그림을 좋아하고 인체에 관심있는 사람에게는 좋은 연습이 될거라 생각한다. 



1. 가장 쉬우면서 어려운 관찰 드로잉을 경험해볼 수 있다.


해외의 미술대학들은 관찰 드로잉(observation drawing, drawing from direct observation)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생소한 단어이지만 쉽게 이야기하면 사진 같은 인쇄물이 아니라 두 눈으로 직접 사물을 보고 그리는 방법을 가리킨다. 왜 해외 대학들은 관찰 드로잉을 중요시할까? 한국에 많은 취미 미술학원이 있지만 내가 접한 몇 곳에서는 사진 보고 그리기, 명화 보고 똑같이 따라 그리기를 주로 시킨다. 이 방법은 드로잉의 몇 가지 기술을 익힐 수는 있지만 나만의 스타일로 빈 도화지를 채우는 능력을 키우기 어렵다. 예를 들어, 누가 그려놓은 자전거 그림을 그대로 따라 하면 쉽게 그럴듯한 그림을 그릴 수 있지만 실물 자전거를 앞에 두고 그리라고 하면 쉽지 않다. 몇 번의 시행착오와 재료에 대한 고민을 거치고 나야 드디어 자전거의 어느 부분을 집중할지, 어떤 구도로 그려야 할지 등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내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해외에서는 이렇게 생각하는 방법이 얼마나 독특한지, 끝까지 이 생각을 붙들고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내는지에 관심이 있지 않을까 싶다.


움직이고 변화하는 자연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면 사람만큼 멋진 대상은 없다. 누드 크로키는 1분, 3분, 5분, 길게는 10분 정도 모델이 자세를 취하는 동안 빠르게 그려야 한다. 사람 몸은 원통, 정육면체 등 온갖 다양한 입체로 이루어져 있고 자세에 따라,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계속 연습하다 보면 조금씩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게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관찰 드로잉 실력이 급속하게 향상된다. 


2.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빠르게 스케치하는 방법은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사물을 빨리 이해하고 손으로 옮기는 연습을 할 수 있지만 한 가지 대상에 계속 집중해서 개선해나가는 인내의 과정은 겪을 수 없다. 나는 누드크로키의 이 장단점을 적극 활용해서 인생의 가장 중요한 교훈 한 가지를 배웠다. 우리가 어렸을 때 놀이터에서 모래놀이를 했던 때를 떠올려보자. 모래성을 열심히 쌓다가 무너지거나 혹은 스스로 무너뜨렸을 때 어떤 감정이 들었을까. 아쉬움? 분노? 설움? 아니었을 것 같다. 잠깐 아쉬웠다가도 다시 쌓으면 되지. 하고 더 멋진 성을 쌓아 올렸다. 하지만 우리가 어른이 되고 실패가 두려워지기 시작하면서 그 어떤 작은 하나도 망치면 안 된다는 강박을 갖게 되었다. 그림을 그릴 때도 망쳤다고 생각하는 순간 스케치북이 보기도 싫어진다. 


만약 망친 그림에 대한 짧은 반성의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면 어떨까?


다음 그림에 집중하게 된다. 1분의 시간은 굉장히 빠르게 흘러서 내 손이 어디까지 갔는지 중요하지 않다. 그저 내 손이 종이 위를 잠시 스쳤고 모델이 포즈를 바꾸는 순간 나는 다음 장으로 넘어가야 한다. 30분 동안 30장의 그림이 쌓이고 나면 내가 망친 손의 흔적들은 그저 과정으로 남는다. 완벽하지 않은 내 스킬은 결국 나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내고 그 과정을 조금씩 즐길 줄 알게 된다. 우리가 인생에서 만들어내는 작은 흠집들이 실패로 불릴 수 없는 이유다. 


모든 그림이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3. 다양한 재료를 시도해본다.


내가 가는 모임에서는 서로의 그림을 공개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그림을 잘 볼 수 없지만 가끔 곁눈질로 보면 대부분 비슷한 재료를 사용한다. 갱지에 4B연필로 그리는 사람은 매번 갱지에 4B연필만 사용한다. 수채화물감을 사용하는 사람도 같은 붓으로 매번 같은 색으로 그린다. 이왕이면 다양한 재료를 실험해보면 어떨까? 모래놀이를 하는 어린아이가 가끔 삽도 사용하고 물을 부어보면서 재밌어하듯이 그리는 과정이 더 즐겁지 않을까? 매번 다른 색지나 다양한 질감의 종이를 준비하고 저렴한 아이용 크레용이나 돌돌 풀면서 쓰는 색연필을 사는 재미도 쏠쏠하다. 비싼 수입 그림도구를 산다고 더 좋은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저 나에게 더 맞는 재료와 도구를 발견하는 것에 목표를 두어도 좋을 것 같다. 


나의 경우는 초반에 붓펜을 사용하는 게 재미있었다. 손가락의 힘에 따라 굵기와 끝의 방향이 바뀌는 것도 재밌었고 흔들리듯 움직이는 인체를 표현하는 게 마치 만화가가 된 듯해서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꾸준히 사용하는 도구는 단연 색연필이다. 그냥 연필은 별로 재미가 없고 자꾸 힘이 들어가서 간결한 인체의 선을 표현하기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색연필은 색상에 담긴 감정과 선의 굵기가 주는 느낌이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선에서 면으로 넘어가는 좋은 다리가 되어 주었다. 선을 자세히 그리지 않고 바로 넓적한 등을 묘사한다던지 허벅지의 넓은 부분을 빠르게 채우기 좋은 재료는 파스텔이다. 물론 채우는 느낌이 좋은 목탄과 콘테도 있지만 파스텔이 몇 번의 터치로 인체의 굴곡을 표현해낼 때 짜릿한 흥분마저 느껴진다. 



4. 구조와 원리에 대한 관심이 생긴다.


우리 몸이 이렇게 복잡하고 다양한 모양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건 눈에 보이지 않는 뼈와 근육의 모양과 위치 때문이다. 더 정확한 표현을 하고 싶은 욕심이 생겨 나와 별 상관도 없었던 해부학 책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어떤 책을 봐도 상관없겠지만 나는 '미술해부학 바이블'과 'Anatomy for the Artist'를 틈틈이 보고 있다. 확실히 조금이라도 근육이 붙어있는 위치와 뼈의 구조를 읽어보고 크로키를 하면 어색한 비율 때문에 그림을 그리기 어려운 상황은 조금 피할 수 있다. 


나에겐 특히 그리기 어려운 자세가 있다. 보통 나에게 가장 크게 보이고 가까운 것부터 우선 그리는데 손가락이 날 향하고 있고 다리가 뒤로 뻗은 자세의 경우 원근법에 따라 그리기 어렵다. 손을 보통 크게 그리면 어색해서 웃기거나 만화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짧은 시간에 정확히 그리기 어려워서 아직 열심히 훈련 중이다. 자세에 따라 보이는 인체의 모양과 빛의 방향에 따라 바뀌는 그늘까지 빠르게 표현하려면 딴생각을 할 겨를이 없는 건 보너스 장점이랄까. 


5. 당연히 누드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진다. 


내가 누드 크로키를 좋아하고 많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다고 하면 상대방은 재미있게도 '진짜 모델이 다 벗어?'라고 묻는다. 사람들은 왜 그런 질문을 할까? 누군가 다 벗은 채로 내 앞에 서있는 상황이 너무 에로틱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물론 처음 몇 번 누드모델을 봤을 때 약간 당황스럽긴 했다. 하지만 그림으로 관심이 돌아가는 순간 진지해진다. 누드가 금기였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지나갔다. 우리가 수많은 매체에서 아름다운 우리의 몸을 왜곡해서 접하고 있는 게 진짜 문제가 아닐까 싶다. 때때로 모델이 뚱뚱하기도 하고 나이가 많기도 하고 전문 모델이 아니라서 자세가 어색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두 시간 반 동안 일반적인 시각으로 '아름답지 않다고' 여겨지는 몸을 열심히 관찰하다 보면 우리의 몸은 무조건 아름답고 경이롭다는 사실에 굴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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